기갑무림 155화
해사한 얼굴을 한 그가 남궁한영을 향해 말했다.
“남궁세가의 세상이 될 것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허허, 남궁세가는 너의 것이 될 터. 축하는 내가 아닌 비천이 네가 받아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독 인자한 할아버지를 보는 남궁비천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남궁비천이란 제 이름처럼 남궁의 이름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만들겠습니다.”
남궁비천(南宮飛天).
그가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난산 끝에 죽고 아버지는 폐관 수련을 핑계로 어딘가에 처박혔지만, 이름만큼은 태중에 있을 때 사랑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가주직을 물려받은 뒤로 가끔씩 나오긴 했으나, 방황은 여전했기에 전대 가주였던 남궁한영이 실질적인 권력이 되고 말았다.
“네 아비가 이곳에 없는 것은 서운하다마는.”
따뜻한 손이 남궁비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어준 이름대로 훨훨 날며 살아가거라.”
그는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자를 바라보았다.
“남궁의 세상에서 네 뜻을 원 없이 펼쳐 보려무나.”
넓고도 따스한 품이 남궁비천을 천천히 얼싸안았다.
“아비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네가 이루는 것이야.”
기대했던 외아들이 며느리의 죽음에 폐관 수련에 빠지자, 남궁한영의 기대와 정(情)은 온통 하나밖에 없는 손자에게 쏠려 버렸다.
그리고 그 정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정도로 과했다.
“제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남궁비천이 눈을 빛내며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
허허 웃는 남궁한영을 세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직 유 장로만이 얼굴에 어두운 기색을 띠었다.
유 장로는 지난번 남궁비천이 적미륵을 흡수할 당시 반대했던 남궁세가의 장로였다.
그는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조손(祖孫)을 보며 탄식했다.
‘저들이 남궁세가를 망하게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걱정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지난번의 반대 이후로 남궁한영의 곁에서 내쳐졌기 때문이다.
만약 또 한 번 남궁한영의 뜻을 거슬렀다가는…….
요즘 쥐도 새도 모르게 하나씩 사라진다는 세가의 무인이 될지도 몰랐다.
무인들이 사라진 후, 유독 붉은 입술을 번들거리며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남궁비천.
그를 보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건 유장로만이 아닐 것이다.
“…….”
어두운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깊이 숙인 유장로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말을 아꼈다.
* * *
무량후를 만나고 다시 돌아가려 하니 이미 반 시진이 지나있었다.
당무가 있는 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이미 어두울 대로 어두워진 사방은 마치 암흑 같았다.
‘남은 시간은 여덟 시진인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내일 있을 일을 대비해 방법을 생각해 내긴 했지만, 과연 성공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당무가 가능하려나.”
이번 일에는 당무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둔 조건에는 당무가 맞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데, 산 초입에 익숙한 느낌의 검은 인영이 멀리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
일반인들과 달리 내 눈은 천갑과의 동화율이 높아진 뒤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분별이 되었다.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천반의 복장이었다.
‘전부 잡힌 게 아니었어?’
모두가 잡힌 게 아니라면, 잡히지 않을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천무륭.
얼마 전 초절정으로 올라선 천반의 생도이자, 화산의 천재라 불린 그였다. 게다가 워낙 홀로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놈이다 보니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났을지 몰랐다.
‘녀석을 만나야 해!’
나는 재빨리 진천비를 전개해 녀석의 신형을 쫓았다.
휘익.
그러나 내가 쫓는 것을 알자, 녀석의 경공은 더 빨라졌다.
상승의 진천비를 전개함에도 녀석을 잡기 어려울 만큼, 천무륭의 경공은 훌륭했다.
[천무륭! 나다, 진자휘!]
녀석을 향해 급하게 전음을 날리자, 검은 신형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전음을 날린 내가 진짜인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약 오장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정말…… 너냐?]
물음에는 반가움과 의심이 실려있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바로 답했다.
[내가 아니면, 너를 이렇게 쫓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내 답에 천무륭이 멍하게 있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확인하듯 꼼꼼히 훑어보더니, 자신의 친우임을 확인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짜 너구나.”
자세히 본 그의 얼굴은 초췌했고, 그동안 고생이 심했는지 몸이 상한 듯 보였다.
“그래. 나야.”
목소리마저 나임을 확인한 천무륭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널 만나서 다행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천무륭이 목소리에 울음기를 담고 있었다.
“모두가 잡혔어. 그런데 나만 도망쳤지. 나 혼자만…… 말이야.”
흐느끼며 중얼거리는 말에는 천무륭이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모두가 갇히고 죽는 마당에 혼자 도망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녀석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천무륭의 상태가 조금은 나아 보일 때쯤 물었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눈물이 멈춘 퀭한 눈을 들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 이후…… 깨달음을 얻은 뒤, 현무학관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어.”
학관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 경지를 이룬데다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니 더 갑갑했을 것이다.
“그래서 천 교관님께 사흘에 한 번 밖의 수련을 허락받았지.”
“그럼 현무학관이 공격당한 그 날에 밖에서 수련하고 있었던 거야?”
“맞아.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밤에 수련하러 나갔어. 그런데…… 학관 가까이 오자 비명이 들려왔다.”
그의 말은 이랬다.
비명소리를 듣고 급히 현무학관으로 갔으나, 붉은 옷의 괴인들이 교관들과 반항하는 생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다고.
자신도 그들에게 대항했지만 넘쳐나는 붉은 옷들의 놈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도망쳤다고 말이다.
“……평소라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어가고 있었어. 마치 독에 당한 것처럼 말이야.”
말을 하는 천무륭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생도들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지. 하지만…….”
말끝이 흐려지던 그의 표정이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그들을 구하기란 무리였어.”
천무륭은 자신만 도망쳤다는 자책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림맹에 날라온 서신대로, 현무학관의 사람들은 독에 당했구나.’
황보세가 놈들이 몰래 독을 풀었고, 현무학관에 없었던 천무륭만이 독에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붉은 옷이라면 혈천교 놈들일 터.
녀석은 혈천교 놈들과 싸웠으나, 홀로 싸우긴 중과부적이었을 테다.
더 싸우다간 개죽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도망을 치는 게 맞긴 했다.
그러나 모두를 두고 도망쳤다는 사실이 천무륭에게 큰 죄책감으로 남아버렸다.
천무륭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뒤로 현무학관의 주변을 서성이며 기회를 살피고 있었지. 그러다가 너를 만난 거야.”
목소리에서 절절하게 새어 나오는 죄책감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잠시 말을 고른 후, 천무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너대로 할 일을 한거야.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 마.”
“하지만…….”
“네 마음은 알겠어. 그래도 도망친 덕분에 나를 만나게 됐잖아.”
나는 입을 어물거리며 주저앉은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하면 돼.”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생긴 죄책감이라면, 구하면 될 일이었다.
“……뭐?”
너무 쉽게 사람들을 구한다는 내 말에 천무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어.”
“……진짜?”
“그래.”
여전히 의문에 싸인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해.”
“내가 널 도울 수 있을까?”
“도울 수 있어. 아니, 도와야만 해.”
생도들을 구하는데 자신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에 천무륭의 눈에 빛이 돌았다.
“그래. 너라면…… 사람들을 구하는 게 가능하겠지.”
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냈던 눈앞의 소년이라면 정말 모두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천무륭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널 믿을게.”
믿는다는 말과 함께 천무륭은 내민 손을 꽉 잡으며 일어섰다.
일어서는 녀석의 얼굴에는 이번에는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뭐지?”
어느새 단단해진 눈빛이 물었고, 나는 웃으며 답했다.
“일단, 가만히 있는 것?”
의아해 보이는 천무륭의 표정을 보며 턱으로 산위를 가리켰다.
“저 위에 무림맹의 사람이 있어. 자세한 건 그 사람을 만난 뒤 알려줄게.”
나는 초췌해져 몸선이 호리해진 천무륭을 보며 미소지었다.
덕분에 당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천무륭에게 옮겨 갔고 성공확률은 더 높아졌다.
‘문제는 시간이 충분하냐인데.’
이제 남은 시간은 여덟 시진.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 * *
신(申)시를 알리는 종이 현무학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후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는 처형장과 함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유시가 되기까지는 이 각의 시간만이 남은 상황.
유시가 지난 후에는 한 시진마다 현무학관의 생도 열둘이 목숨을 잃는다.
둥둥.
마치 시간을 알려주듯, 일각의 시각이 지날 때마다 두 번의 북이 울렸다.
이제 남은 북소리는 한 번뿐.
“흐으으…….”
빠듯한 긴장감 속에서 신음소리가 나직하게 주변에 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무예를 연무했던 널따란 연무장은, 처형장으로 바뀌었다.
불타오르는 횃불 위로 쇠판이 올려져 있고, 끌려온 생도들이 원을 그리듯 안쪽으로 모여 앉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백 명에 가까운 생도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쇄골에 두 개의 구멍이 뚫린 채 쇠사슬을 연결해서인지 상반신은 피에 젖어 있었으며, 뼈까지 튀어나온 생도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쇠사슬과 생도들의 품속에는 벽력탄들이 흉물스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웠으며, 무릎 아래 뜨거운 쇠판은 몸을 태울 정도로 뜨거웠다.
고통에 찬 신음과 흐느낌.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마치 한편의 지옥도와 같았다.
“재미있군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하나, 남궁비천이었다.
“후인은 오지 않았습니까?”
손자의 말에 남궁한영이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다.”
어쩌다가 정파의 선봉이었던 자신들이 이런 사파놈들도 하지 않는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일까.
눈앞의 비참한 모습에 후회마저 드는 자신과 달리 흥미를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이 즐거운 장면을 빨리 봐야 하는데. 늦으면 늦을수록 생도들만 고생하는데 말이죠.”
남궁한영은 뭐라 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으나, 애써 덤덤하게 답했다.
“세가인들 뿐만 아니라, 혈천교인들도 가득 찬 이곳에 홀로 오기란 쉽지 않겠지.”
“그래서 자진하라고 한 거잖습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생도들을 보며, 단상 위에 자리한 화려한 의자에 앉은 남궁비천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진했다는 말도 들리지 않잖아요. 그렇다는 것은 놈이 이곳으로 온다는 뜻이겠지요.”
남궁비천은 후인이란 놈이 결코 자진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잔머리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지.’
이번에도 놈은 절대 그냥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도 놈을 잡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일부러 놈의 분노를 촉발하기 위해 생도들을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뿐일까.’
여기 있는 생도가 다가 아니었다.
남궁비천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운데, 생도 하나가 견디다 못해 뜨거운 철판 위로 쓰러졌다.
“……으으.”
입마개로 입마저 막힌 생도들은 어떻게든 쓰러진 생도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벽력탄만이라도 닿지 않게 하기 위해 힘들게 몸을 기대는데, 마지막 북소리가 울려왔다.
둥둥.
북소리는 유시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유시를 알리는 종소리마저 현무학관에 퍼졌다.
“아…….”
유시 정각이 되었음에도, 자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과 한탄이 섞인 생도들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으윽.”
눈물에 담긴 그들의 통곡은 마치 장송곡처럼 흘러내렸다.
“흥, 나타나지 않겠다 이건가?”
입술을 비죽이던 남궁비천이 생도들 사이로 훌쩍 날아들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살기를 품고 번득이고 있었다.
“네놈들을 죽여도 나타나지 않나, 어디 한번 보자고.”
들으라는 듯 소리친 남궁비천이 앞장서서 생도들의 목을 치려는 찰나.
“멈춰.”
내공을 가득 실은 음성과 함께, 현무학관 안으로 날렵한 신형 하나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