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54화
전각 안으로 들어가 지하를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도무지 지하로 들어갈 만한 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측 앞 서재를 살펴보십시오. 그곳과 지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야의 말에 따라 앞을 보니 서재가 보였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지가 덜 앉은 서책을 건드리자, 서재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긍.
약간의 굉음과 함께 지하의 문이 드러났다.
‘왜 지하의 문을 숨긴 거지?’
학관에 왜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을까 싶었으나, 아래로 내려가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감옥(監獄).
이곳의 지하에는 학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지하 아래의 계단을 밟자, 뭔가 작동되었는지 열렸던 서재의 문이 다시 닫혔다.
지하는 거의 다 타들어 가는 횃불로 인해 밝지는 않았으나 사물의 분별은 가능할 정도였다.
“……으.”
주변을 살펴보는데, 지하 안쪽에서 아주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인은 시체들이었다.
지하 한곳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시체들은, 교관 옷과 생도들의 옷이 섞여 있었음에도 핏물에 절어 그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어찌나 억울하고 원통했는지 눈마저 감지 못한 시신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눈에 익은 얼굴도 있었다. 그들의 죽은 모습을 보자 심장이 분노로 타오를 듯했다.
‘이런 짓을 벌이다니……!’
놈들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남궁세가와 연합한 세가들, 그리고 혈천교까지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신성한 학관을 피로 물들인 것이다.
“똑같이 만들어 주겠어.”
이미 명분이라는 칼날을 쥔 내게 놈들의 죽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천갑의 힘을 쓴다면 지금이라도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놈들에게 잡힌 생도들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
‘내 힘을 아는 이상, 그만한 덫을 만들어 놨겠지.’
생도들을 미끼로 나를 잡을 덫을 펼쳐놓았을 놈들을 생각하니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행동했다가 조금의 실수라도 한다면 생도들의 생명이 위험했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살아 있는 사람부터 구하자.’
그가 누구이든 간에 놈들의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신음이 흐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철창이 있는 몇 개의 작은 석실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엔, 온몸이 쇠사슬로 결박된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무량후!’
역시 짐작대로였다.
지하의 끝자리에 쇠사슬로 결박된 사람의 정체는 학관장 무량후였다.
한달음에 다가서니, 처참한 형태가 눈에 박혔다.
다리와 팔의 뼈는 이미 부러진 데다가, 단전은 파괴되었다.
고문당한 듯 그의 살점은 뜯겨 있었고, 온몸의 피가 사라져 건장했던 그의 외모는 형편없이 비틀어져 있었다.
나는 급히 주변에 기막을 펼친 후, 투명화를 풀고 무량후의 등 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으음.”
죽어가던 무량후는 등 뒤에서 심후한 내공이 흘러들어 오자, 감겼던 눈을 힘들게 떴다.
“자네는…….”
그가 고개를 돌리며 누군지 확인하려는 듯 흐린 눈을 끔뻑거렸다.
“저, 진자휘입니다.”
“아…….”
무량후는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곧 죽을 듯 쿨럭거렸다.
“……죽기 전에 자네를 봐서 다행이로군.”
나는 입술을 한번 꾹 내리 물었다.
“죽긴 누가 죽습니까? 죽게 하지 않을 테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나는…….”
그의 상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처참했다. 그러나 목이 잘리지 않은 이상, 무량후를 치료하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를 믿으십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이 무량후의 몸으로 전해졌다.
진천비급 육 장에 있는 진천뇌검 생결(生結)을 응용한 수법이었다.
진천뇌검 오 장이 모든 것을 뇌전으로 태우는 사검(死劍)이었다면, 육 장은 생명을 일으키는 생검(生劍).
생검이 일으키는 기묘한 생명의 결이, 진천기공으로 변화되고 정순하게 바뀌어 무량후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온몸의 피는 빠져나갔으나, 내공이 몸 구석구석을 돌며 그의 차가운 몸을 덥혔다.
그리고 생명의 기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량후의 끊어진 기혈들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흐읍!”
무량후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의 빛이 돌았던 그의 얼굴은 이제 약간의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나는 무량후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더 이상의 치료는 놈들에게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 치료해 드리고 싶으나, 놈들이 눈치를 챌 것 같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사전 탐색차 들어온 이곳에서 무량후를 완전히 낫게 하거나 탈출시킨다면, 놈들이 알아챌 것이다.
치료를 멈추는 것은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일세.”
무량후는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후 님께서 이렇게 된 것은, 남궁비천의 짓입니까?”
직설적으로 묻는 질문에 무량후가 탄식하며 답했다.
“놈은…… 자신이 주화입마에 걸렸던 것이 내 탓이라며 이 꼴을 만들어 놨다네.”
그는 물어뜯긴 듯한 자신의 목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빌어먹을 놈이 내 피도 강탈해 갔지. 내공이 심후한 무인의 피를 먹을수록 자신의 힘이 세진다고 하더군. 완전 피에 미친 놈 같았다네.”
“그런데도 놈이 무량후 님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죠?”
“내가 살아서 현무학관의 생도들이 죽는 모습을 똑똑히 봐야 한다고 했네. 그게 내게 더 지옥일 거라면서 말이야.”
무량후는 쌓인 시체를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생도들의 시체를 모두 던지고 마지막에는 이곳을 불태운다고 했지.”
이 지하는 거대한 무덤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무량후는 그들의 죽음을 보며 마지막에 태워지는 제물이었다.
“어떻게 정파의 탈을 쓰고 그런단 말입니까?”
“그놈들은 정파는커녕, 인간이 아니야. 인두겁을 쓴 악마들이지!”
분노하던 무량후는 곧이어 두 눈에 회한이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나는 악마들에게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네. 학관장으로서 막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닙니다. 무량후 님은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그는 인질이 된 생도들의 생명을 지키려 스스로 온몸에 쇠사슬을 박았다.
마치, 나에게 하려 했던 것을 먼저 무량후를 통해 시험하듯 말이다.
욕설이 삼켜지는 가운데 그가 서글픈 눈으로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나처럼 되지 말게.”
주름진 눈이 밖을 향했다.
“아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어. 그들의 몸에는…… 벽력탄이 감겨 있지.”
“벽력탄을 감아놨다고요?”
“놈들은 아이들의 쇄골을 두 개씩 뚫어 쇠사슬로 연결해 놓고는 각자의 몸에 벽력탄을 매달아 놨다네.”
“……!”
“생도들이 도망 못 가도록 쇠사슬로 연결해 놓은 거야. 그리고 누군가 쇠사슬을 끊으려 하면…… 바로 벽력탄이 폭파되게 만들어 놨지.”
나는 무량후의 말에 놀란 나머지 헛숨을 들이켰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있는 곳의 바닥은 철로 되어 있어. 밑은 커다란 장작불이 불타고 날카로운 무기들이 있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면 철로 된 바닥이 문처럼 열리면서…… 벽력탄이 폭발하고, 모두가 불지옥 속에서 죽게 된다네.”
놈들의 준비는 철저했다.
나를 상대함에 있어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 어린 생도들을 상대로 잔인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런데도…….”
무량후는 나를 절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힘들게 입술을 떼었다.
“구할 수 있겠나?”
어려운 상황임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생도들을 구해야만 했다.
날 바라보는 무량후의 눈은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구할 겁니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답했다.
“생도들뿐만 아니라 모두를 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 있게 답하는 나를 먹먹한 눈길로 바라보던 무량후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이 몸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아이들만은 구해주게. 부탁일세.”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는 무량후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또한, 현무학관을 이렇게 만든 놈들을 모두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무량후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모든 것을 안 지금.
악귀가 된 놈들에게 어울리는 진짜 지옥을 선사해줘야만 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어두운 지하 감옥 안에서 살기를 품은 눈빛이 시퍼렇게 번득였다.
* * *
현무학관의 중앙전 밑은 거대한 지하 연무실이 있었다.
어떤 기후에도 상관없이 연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으나, 지금은 생도들을 인질로 삼아 가두고 있는 곳으로 쓰이고 있었다.
쇄골이 뚫린 채, 고통에 신음하는 생도들을 바라보던 남궁한영이 옆에 있던 남궁호에게 물었다.
“후인은 오지 않았나?”
“예. 현무학관 주변의 십 장 거리를 살펴보았으나, 후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궁호의 답에 남궁한영이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일이 되기 전 한 번쯤은 들를 줄 알았건만 의외로군.”
경비조차 세우지 않았지만, 실상은 곳곳에 세가인의 눈을 두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현무학관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과 기감으로는 투명화가 된 자휘를 발견할 리 만무했다.
“또 모르죠. 이미 왔을지.”
뒤에서 들리는 냉소적인 말에 남궁한영이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입술이 새빨갛게 번들거리는 남궁비천이 보였다.
그는 남궁한영을 보며 히죽 웃었다.
“워낙 신기막측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놈이라 예상외의 짓을 잘하거든요.”
남궁한영이 입가를 누그러뜨리며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놈이 몰래 왔다 한들 이곳에는 없을 테니 염려치 말아라.”
남궁비천은 무심한 얼굴로 온몸에 벽력탄과 쇠사슬로 감긴 생도들과 주변을 지키는 혈천교인들을 바라보았다.
“하긴, 이곳까지 오는 건…… 쉽지 않겠군요.”
남궁한영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의 웃음은 주변의 잔인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무척 인자한 웃음이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남궁한영은 다시금 고통에 신음하는 생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만 지나면, 남궁의 천하가 열릴 것이니.”
비록, 잠깐의 비난은 있겠지만 무림의 패자가 된 그들 앞에서 누가 대놓고 돌을 던질까.
“그 누구도 우리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생도 백 명의 목숨으로 무림의 패자가 된다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남궁한영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로 인해 죽어갔던 이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자신의 손자에게 흡혈당하며 죽어가던 무량후의 모습이 유독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무량후는 죽은 게 맞느냐?”
“제가 흡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남궁비천의 말에 그는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눈 한 번 깜빡임에 모든 것들을 털어버렸다는 듯 남궁한영에겐 아무런 죄책감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 명의 인재가 사라지긴 했어도, 그만큼 우리 남궁세가의 힘은 더 빛을 발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를 죽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말거라.”
“예.”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남궁비천의 눈이 비열하게 빛났다.
흡혈이야 어쩔 수 없이 승낙했겠지만, 남궁한영은 무량후를 하나의 무인으로 인정한 사람이었다.
‘무량후에게 지옥을 보여주려 목숨만 붙여 놓은 것을 알면 싫어하겠지.’
그것도, 온갖 고문에 팔다리를 부서뜨린 후 단전까지 파괴한 것을 알면…….
‘알아도 별 수 없을 테지만.’
할아버지를 향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드는 남궁비천의 표정은 매우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