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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53화 (153/200)

기갑무림 153화

다급해 보이는 전령은 더 빨리 오기 위해 말에서 뛰어내려 경공을 전개하며 소리쳤다.

“위급상황입니다!”

얼마나 급하기에 전령이 저러는 것일까?

눈앞에 빠르게 도착한 전령은, 무릎을 꿇은 채 서찰을 건네며 굳은 얼굴로 고했다.

“현무학관이 놈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

전령의 말을 듣는 순간 분노로 눈앞이 노래졌다.

설마 했다.

남궁세가와 다른 세가 역시 정파라고. 그래서 어린 무인들이 공부하는 학관은 손을 대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놈들은 내게 이기기 위해서라면 악마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제길……!’

악문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당혹스러워하는 진무양이 전령을 가져온 서신을 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서신을 읽어가는 그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손까지 덜덜 떨려왔다.

어떤 내용일지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차마 말을 못 하고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내게 건넸다.

“후인께서 직접 읽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서신을 받아 들자, 누군가의 피로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림맹에 고한다.

내일 유(酉)시까지 후인 스스로 자진하게 만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한 시진마다 생도 열둘의 목숨이 날아갈 것이다.

-혈천(血天).

피로 점철된 서신이 분노한 내 손안에서 와그작 구겨졌다.

“미친놈들!”

명색이 정파라는 놈들이 어린 학생들의 목숨을 쥐고 날 죽이려 하고 있었다.

‘정파라는 것들이 사파도 하지 않는 짓을 저질러?’

정과 사는, 정사화합전이 열리기 전까지 적이었음에도 최소한 어린 학생들이 머무는 학관은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 명색이 정파라는 것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거라니!

꽉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놈들의 손에서 공포에 떨고 있을 친우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제갈신, 모용설화, 천무륭, 인반의 친우들…….

미칠듯한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리고 감긴 눈 사이로 불안을 덮을 만큼 시퍼렇게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닌 냉정이었다.

나는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는 전령에게 물었다.

“……생도들은?”

퍼져 나간 살기에 전령이 입술이 핏기를 잃은 채 답했다.

“현재 학관에는 약 백 명의 생도들이 생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백 명이라면 연합한 세가들의 자제들은 뺀 숫자였다.

“교관들이나 무량후 님은 어쩌시고 생도들이 잡힌 것이지?”

“그것이…….”

전령은 잠시 말을 골랐다.

“남궁세가가 다른 세가들과의 연합을 공표하기 전, 황보세가의 인물들이 독과 암습으로 교관들을 제압하거나 죽이고…… 생도들을 인질 삼아 무량후 님을 가두었다고 합니다.”

“……!”

교관들이 죽었단 말에 진무양이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교관들이 죽었단 말인가?”

“예.”

침통한 전령의 말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교관이 죽고, 남은 교관은 서넛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교관들의 부고를 듣자, 목이 막힐 듯 메어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갑무신의 후인이 현무학관에 나왔다며 그렇게 기뻐해 주던 그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 적혀진 서신은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죽지 않으면, 다른 생도 역시 교관들처럼 죽이겠다고.

지키겠다 다짐한 내 친우들을 지금 다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분노로 인해 손끝이 저릿거리고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당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인님, 진정하시지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렬한 살기에 주변 인물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 있었다.

모두, 심상치 않은 사태를 느끼고 온 사람들이었다.

무인인 만큼 그들 또한 전령의 말을 모두 들었을 터다.

무림맹의 사람들 모두 놈들의 경악할 행동에 분노하고 있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후인님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꽤 강력한 살기였을 텐데도 그들은 되려 날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해와 맞물려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이 눈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당무는 땅에 떨어뜨린 구겨진 서신을 주워 조용히 읽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놈들의 뜻대로 스스로 자진할 수는 없었다.

설령, 내가 죽어서 생도들을 살린다 한들 과연 그들이 생도들을 그냥 둘까?

혈천의 천하를 꿈꾸는 이들이다.

그들이 꿈꾸는 천하는 오직 혈천교들만의 세상이며 반하는 이에겐 죽음밖에 없는 곳이었다.

내가 죽으면 무림도 죽는다.

그러나 당장은 학관의 생도를 구해야만 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당무의 질문에 나는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떼어진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가야겠습니다.”

우선은 가봐야겠다는 말에 진무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현무학관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네.”

그는 막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을 끝낼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끝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일 유시라면…… 하루가 조금 더 남았군요.”

느리게 끄덕이는 내 얼굴을 보던 진무양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저도 무인들을 모아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각 문파의 목숨과도 같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다들 두손 두발 들고 나설 것이다.

다만, 걸리는 시간이 문제일 뿐.

“저도 가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당무가 말했다.

“학관에는 당하연 아가씨도 있습니다. 제가 세가의 연합을 말리는 통에 아가씨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저도 반드시 가야 합니다.”

당무가 간다면 나쁘진 않았다.

정신을 잃고 질주하는 나를 제어해줄 사람은 그나마 그였으니까.

답이 없음에도, 당무는 승낙으로 알아듣고는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가는 길은 물론 전과 같을 테지요. 전 차라리 기절하겠습니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스로 점혈을 했다.

당무의 몸이 땅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행동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학관으로 가는데 왜 점혈을……?”

그러나 바로 이어진 상황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눈 한 번 깜짝일 사이, 하늘로 솟아 버린 두 개의 신형은 그들의 눈에서 바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 * *

“우워억.”

입술이 퍼렇게 질린 당무가 헛구역질했다. 점혈에서 깨어났음에도 워낙 빠르게 이동한 탓에 몸이 견디지 못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앓는 소리 없이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학관 근처군요.”

주변은 무척 어두웠으나 당무는 이곳이 학관 근처의 산임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높은 산 아래로 거대한 현무학관이 자리 잡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도 안 되어 오다니 빠르긴 빠르네요.”

당무는 감탄하며 조용히 학관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들끓는 기운들이 주변으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당무는 뭐라 입을 벙긋거리려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역시 조용히 학관을 내려다보는 사이, 귓가에 종소리가 울려왔다.

……뎅뎅.

시간을 알리는 학관의 종소리였다.

지금은 자(子)시.

깊게 잠들어 있어야 할 가장 어두운 암흑의 시간이었다.

“자시라면, 유시까지 아홉 시진이 남았군요.”

당무는 여전히 아무 답도 없는 내게서 답을 기다리지 않고 턱을 괴고는 아래의 현무학관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군데군데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현무학관은 몹시도 적막해 보였다.

‘아홉 시진이라.’

이 시간이 지나게 되면 한 시진마다 학관의 생도 열둘이 목숨을 잃는다.

백 명이니,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하루도 안 되어 현무학관의 모든 생명은 죽게 된다.

‘놈들이 일을 저지르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무모한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내 실책이었다.

정파라는 놈들의 알량한 양심을 믿은 내 실책.

현무학관이 마음속에 걸렸음에도 그래도 믿었다.

혈천교 놈들은 그럴 수 있어도 정파인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혈천교 놈들을 막아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놈들은 이미 정파의 껍데기를 쓴 혈천교인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도 스스럼없이 치르는.

그렇다면…….

나 역시 악마가 되면 된다.

인두겁을 쓴 악마를 잡기 위해서는 같은 악마가 되는 것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너희는 실수한 거야.’

정파라는 테두리 안에서 선을 넘지 않는 짓을 저질렀다면 나도 그들을 어느 정도 봐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명백한 잘못을 저지름과 동시에 내게 가장 강력한 칼을 쥐여주었다.

명분(名分).

그들은 어리석게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내게 명분이라는 스스로를 찌를 칼을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무학관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차디찬 냉기가 실려 있었다.

“한번 가 봐야겠군요.”

“현무학관에 말입니까?”

“네.”

“조심하십시오.”

당무는 어떻게 할 거냐는 말 대신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믿음이 실려 있었다.

“그럼 다녀오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천비를 이용한 내 몸은 현무학관 쪽으로 날아갔다.

산을 벗어나는 내 몸은 투명화가 되어있었다.

적들의 눈을 피해 상황을 살피기에는 투명화 기능이 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현무학관 정문 근처로 소리 없이 내려서자, 며칠 전만 해도 멋지게 걸려있던 현판은 엉망이 된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들이 가득했다.

“…….”

조용한 분노 속에서 발걸음은 학관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경비가 없는 건 의왼데.’

현무학관에 올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혈천교인과 연합한 세가인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현무학관 밖으로는 경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치,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말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현무학관의 벽면에 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구가 보였다.

천갑무신의 후인이여.

경거망동하지 말라.

네놈이 허튼짓을 벌인다면,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경고 문구였다.

그러나 놈들의 말을 따른다 한들 모두 살까?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잠시 죽음의 시간이 늦춰질 뿐이다.

반대로 생도들이 죽는다면, 나에게는 그 어떤 족쇄도 없는 셈이 되었다.

‘족쇄라.’

순간, 떠오른 단어에 심장이 서늘하게 차가워졌다.

생각해 보면 기갑과의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내 심장과는 반대로 머릿속은 한없이 차가워지곤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될 걸, 정말 몰랐을까?’

그러쥐는 차가운 손가락 끝이 무감각한 손바닥을 찔렀다.

어쩌면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외면했는지 모른다.

늘 허울 좋은 정파라 욕했으면서도, 그들의 양심을 기대했다니.

어쩌면 나는…….

머릿속에 든 냉혹한 계산들을 떨쳐내려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현무학관의 생도들은 족쇄가 아니야. 저들은 내 친우들이다.’

그러니 구해야만 했다.

마음을 다잡고는 인반 시절 수없이 넘었던 담벼락을 넘어 현무학관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코끝에 혈향이 훅 끼쳐 왔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현무학관을 둘러보았다.

싸움이 있었는지 곳곳에 보이는 널브러진 물건들과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그리고 잔해들의 바닥에는 어김없이 아직도 붉은 빛을 내는 핏자국들이 가득했다.

‘생도들은 어디 있지?’

생도들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학관의 교관들이나 학관장마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적을 포함해 이백삼십 명의 인간이 십 장 앞 전각 아래의 지하에 존재합니다.]

[또한, 한 명의 인간이 이곳의 지하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모여 있는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급한 마음에 지하로 연결되어있는 전각 쪽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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