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52화
끈 떨어진 노인네?
무림맹주 진무양은 화경을 바라보는 무림 삼원(三元) 중 하나다.
맹주라는 직위를 떠나서 중원에서 한 손에 꼽히는 무인을 노인네라고 부르다니.
‘미친 거 아니야?’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진무양을 보는 내 표정은 굳어졌다.
눈치 빠른 당무가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방금 말한 사람은 종남파의 장로 종인강입니다.]
종남파라면 요새 이름 좀 들어보긴 했다. 그래도 구대문파의 말석을 차지하는 종남의 장로가 맹주에게 저렇게 군다고?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저 사람이 맹주보다 더 강합니까?]
[당연히 맹주보다 약하죠. 하지만 같이 온 사람들을 합하면 더 강합니다.]
당무의 말에 가늘게 눈을 뜨고 종인강의 옆을 보았다.
[왼쪽이 무당의 장문인 허허자이고, 오른쪽이 화산의 장문인 설무향입니다.]
아까부터 기세가 유난하더라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채를 지닌 노인들은 무려 화산과 무당의 장문인들이었다.
‘무당이나 화산이라면 그럴 만도 하네.’
거대 문파의 장문인들을 양옆에 끼고 있어서인지 종인강의 콧대가 한껏 높아 보였다.
“서창지부의 당무가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과 종남의 장로를 뵙습니다.”
당무가 고개를 숙였으나 종인강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여 답례를 한 이들은 오히려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이었다.
종인강은 당무의 인사는 무시한 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진무양을 타박했다.
“후인이야 잘 모르신다 치더라도 진무양 님은 먼저 후인이 왔다는 걸 알려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먼저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알지 않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 알리지 않은 것뿐일세.”
진무양이 덤덤하게 답하자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자리에서 물러난 후를 생각하신다면 알아서 잘 행동하셔야 할 텐데. 참,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자네, 후인 앞에서 말이 심하군.”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진무양의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그제야 입을 다문 종인강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옆의 장문인들에게 나긋하게 말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차는 제가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알겠네.”
그의 말에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이 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앉는 듯하나, 예리하면서도 깊은 시선이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탐색한다 이거지?’
내가 저들을 탐색하듯, 그들 또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말만 무성했지, 천갑무신의 후인인 나를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엔 종인강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후인께서는 장문인들에 대한 인사가 없으십니다?”
“인사말입니까?”
“예. 아무리 천갑무신의 후인이라 한들 존장에 대한 예의를 표하셔야지요.”
조금은 고압적인 시선이 나를 향했다.
‘기세를 제압하려는 건가?’
뻔히 보이는 속내에 헛웃음이 나왔다. 종인강이 보기엔 나는 어린 나이에 힘만 센 무인으로 보였을 테다.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밑밥으로 은근슬쩍 내게 인사를 강요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보이겠지.’
아직 물러나지 않은 무림맹주에게도 저 짓거리인데, 어려 보이는 내게 오죽할까.
저런 인간 따위에게 틈을 보일 수는 없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나는 손가락을 깍지 끼며, 한쪽 다리를 올린 채 의자의 등 뒤로 천천히 기대앉았다.
그리곤 차갑게 말했다.
“인사라면 장문인들께서 제게 먼저 하셔야지요.”
“뭐라고요?”
되려 반대로 인사를 하라는 말에 종인강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
“예의는 그쪽이 없지 않나?”
“네?”
“배분으로 따지자면 천갑무신의 후인인 제가 더 높은 데다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 ‘피의 맹약’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
피의 맹약은 정파인들을 구원해 주고받았던 약속이자, 피의 맹세였다.
“……피의 맹약이라니!”
후인이 원하면 그들의 힘을 얼마든지 쓸 수 있도록 맹세한 것과 동시에 문파들을 하나로 통합할 힘이 바로 ‘피의 맹약’이었다.
한마디로 장문인이라 한들, 내게는 복속된 존재라는 뜻이었다.
종인강의 얼굴이 허옇게 변하는 가운데, 화산과 무당의 장문인이 벌떡 일어서며 포권을 취했다.
그들은 재깍 고개를 숙였다.
“무당의 장문인 허허자가 후인을 뵙습니다.”
“화산의 장문인 설무향이 후인을 뵙습니다.”
거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종인강 또한 고개를 숙이고는 머뭇대며 입술을 떼었다.
“……조, 종남의 장로 종인강이 후인께 인사드립니다.”
찌릿.
그의 몸이 순간 약한 살기를 맞은 듯 찌릿거렸다.
두 장문인이 보내는 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냐는 뜻의 경고였다.
아무렇지 않은 그들의 표정과는 달리, 종인강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하, 하.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깜빡했습니다. 제 실언을 용서해 주시지요.”
종인강의 말은 무시당했다.
당무를 무시했던 것처럼 종인강의 말에 답하지 않은 것.
그러나 종인강을 무시한 것과 달리 장문인들의 인사를 받은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일어섰다.
“존경하던 두 문파의 장문인들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건방지던 후인이 예의 바르게 포권을 취하자 장문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태가 종인강 때문임을 눈치채고는 내 인사를 재빨리 받아들였다.
“천갑무신의 후인을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혜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늘 말로만 듣던 후인을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처음부터 배분과 맹약을 따져가며 장문인들께 인사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기분이 나쁘셨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허허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솔직히…… 종남의 장로가 무례하긴 했지요.”
설무향은 종인강을 슬쩍 흘겨보았다.
“후인께 잘 말할 테니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하길래 데려왔건만 분위기만 안 좋게 만들었군요.”
“그, 그건.”
종인강이 말까지 더듬으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에 진무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개처럼 고개를 숙이는데, 용서를 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맹주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용서해 드리지요.”
내 말에 여태 고개를 숙인 채 있던 종인강이 일그러진 표정을 겨우 정리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가 앉으려는데 설무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종인강 자네는 뒤로 물러나 있지.”
“맞네. 아무래도 이 자리에 자네는 어울리지 않는 듯 허이.”
허허자까지 맞장구치자, 자리에 앉으려던 종인강은 얼굴이 벌게지며 의자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을 힐끗 본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두 분께서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들어볼까요?”
내 질문에 머뭇대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설무향이었다.
“진무양 맹주께서 은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네. 맹에서는 새로운 맹주를 뽑기 위해 경합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허허자와 내가 남게 되었지.”
허허자가 설무향의 말을 이었다.
“우리는 천갑무신의 후인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고 결정했다네.”
“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 입으로 직접 하긴 그렇지 않나? 그래서 저 사람을 데려왔건만…… 상황이 이렇게 될은 몰랐네.”
설무향의 말에 종인강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군요.”
나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진무양을 바라보고는 두 장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서늘한 비난이 담긴 말투였다.
“지금 남궁세가가 다른 세가와 혈천교까지 끌어들여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굳이 맹주 선출을 하셔야 하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네.”
허허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파일방 아래에 오대세가가 있다지만, 요 근래는 오대세가가 기세등등했지.”
설무향도 말을 덧붙였다.
“이제야 구대문파가 실력대로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네. 시기도 시기지만, 우리도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일세.”
구대문파가 오대세가에 권력을 빼앗긴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무력이야 구대문파가 강했으나, 오대세가가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하면서 권력이 기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미륵 사태로 남궁세가와 다른 세가들이 빠져나갔고, 구대문파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그들로서도 지금 터를 닦아 놓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렇군요.”
무림맹의 복잡한 사정을 몰랐으나, 그렇다고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어쨌든, 제가 무림맹주에 관한 중요한 표를 쥐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내 말에 두 장문인의 눈에 맹주자리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제안을 드리죠.”
“제안?”
“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는 말에 장문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이건 제안이 아니라, ‘피의 맹약’을 이행하라는 것과 다름없겠군요.”
피의 맹약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것은 후인이 내리는 명과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제안입니까?”
“저는.”
나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이번 남궁세가의 사태가 끝날때까지 맹주자리는 그대로 진무양 님께서 하길 원합니다.”
“……!”
내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진무양이었다. 설무향과 허허자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계속 진무양 님께서 맹주 자리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남궁세가의 사태가 끝나는 대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문파의 장문인께서 맹주가 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화산과 무당 중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린다 한들, 한쪽의 반발을 얻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원 중 하나인 진무양이란 큰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다.
그럴 바엔, 둘을 경쟁시키고 지금껏 잘 무림맹을 잘 꾸려 왔던 진무양을 내세우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단호한 내말에 맹주의 집무실엔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命令).
‘피의 맹약’에 따른 후인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그들도 알았다.
이것이 오직 후인만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화산과 무당, 그리고 진무양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모두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후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
결정이 난 뒤, 무림맹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진무양은 다시금 제대로 된 맹주자리를 얻게 되었고, 화산과 무당은 이번 전쟁에서 열의를 불태웠다.
남궁세가가 빠져나간 후 힘이 비슷한 문파끼리의 의견 다툼은 천갑무신의 후인이 지닌 ‘피의 맹약’으로 정리된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요.”
무림맹을 떠나려던 나에게 진무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꽤 복잡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후인님의 말 한마디에 정리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피의 맹약을 내세워 급한 일부터 처리하게 한 것뿐입니다.”
만약 새로운 맹주가 나온다 한들, 또다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낭비하느니, 모든 전력을 남궁세가와 혈천교를 처리하는 데 써야 했다.
“저는 원래 맹주자리가 끝나는 대로 심산유곡에 들어가 은거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는 좋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맹주자리를 손에 넣게 되니 뭐랄까, 기분이 묘하군요.”
“무림맹주 자리에서 은퇴하는 것도 좋지만 무림은 아직 진무양 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은퇴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밀려나는 모양새가 아닌, 제대로 된 맹주의 은퇴식을 말이다.
생략된 내 뜻을 읽었는지 진무양이 허허 웃었다.
“제대로 된 은퇴식이라. 좋지요.”
그의 은퇴식에 맞춰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문파의 장문인이 맹주로 등극할 것이다.
“그럼 이제 남궁세가로 가시는 것입니까?”
진무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단 무림맹 일은 대충 정리되었으니 이 모든 일의 원흉들을 보러 가야겠죠.”
“알겠습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진무양의 배웅을 받으며 무림맹의 문을 벗어나려는데, 문 멀리에서 전령이 숨 가쁘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전령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쯤, 전령의 입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