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51화
갑자기 발밑에 아무것도 없자 기겁하는 당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허헉!”
“왜 이러십니까? 한 경공 하시는 분께서?”
웃으며 말하자 그가 허옇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 지금 경공으로 무림맹까지 가시겠다고요?”
“못할 건 뭡니까?”
이미 하늘 높이 솟아오른 나머지 발을 허우적거리던 당무가 소리쳤다.
“저, 고소공포증 있단 말입니다!”
“압니다.”
안다는 말에 당무가 아연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늘 높은 성루만 가면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아, 아시는 분이 이렇게……!”
“아니까, 이렇게 손을 꽉 잡은 것 아니겠습니까?”
어딘가 사악해 보이는 입술이 말했다.
“눈 꼭 감으십시오.”
“예? 그, 그런!”
지금 전개하려는 것은 십이 성의 진천비.
파앗.
부드러운 진천기공의 기운이 당무를 감쌈과 동시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급해서 이러는 것이니 이해 바랍니다.”
“그, 그런 게 어딨…… 으아아악!”
들리는 비명은 잠시.
먼지처럼 보이는 작은 점 두 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 * *
“우워억.”
토해낼 것이 없는데도 헛구역질을 하던 당무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덕분에 빨리 왔잖습니까?”
덤덤한 내 답에 당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빨리 온 겁니까? 이건 빨리 온 게 아니라 차라리 순간이동을 했다고 해도 믿겠군요.”
우리가 도착한 곳은 무림맹 근처의 산 초입이었다.
평소 같으면 빨라도 오 일 정도 걸릴 거리를, 무려 반나절도 안 되어 주파했다. 당무의 말대로 이건 순간이동 수준인 것.
하지만,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나야 이미 철화된 몸에 진천기공을 익혀 아무리 빠른 속도라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당무는 달랐다.
그 역시 일류에 다다른 고수인 데다가 진천기공으로 막을 씌워 줬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고생한 것이다.
“정말이지, 오줌 지릴 뻔했다고요!”
당무가 입을 닦으며 계속 투덜거렸다.
“제가 고소공포증인 것도 알면서……! 정말 나쁘십니다!”
들으라는 듯 고소공포증을 계속 중얼거리는 당무를 보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신, 당문의 죄를 조금은 더 사해 드리지요.”
당문에 대한 말이 나오자 당무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네?”
“당문의 죄를 조금은 완화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아이고, 그렇다면야.”
그는 뭐가 힘드냐는 듯 벌떡 일어나 허연 얼굴로 영혼 없이 말했다.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겠습니까? 까짓거, 할 만하더군요.”
“그럼, 한 번 더?”
“그, 그건 좀. 아! 이 근처부터는 제가 잘 아는 곳이니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당무는 자신만 따라오면 된다는 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당문은 알까?’
당무가 저렇게 가문을 위해 애쓰는 걸 말이다. 그것도 양측에서 욕 들어가면서, 저렇게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제법 큰 덩치를 가진 당무의 어깨가 오늘따라 무겁게 보였다.
그를 따라 산에서 내려가자 바로 널따란 길이 보였다.
이제 이곳에서 이각 정도만 걸어가면 무림맹이 보일 것이다.
“힘드시면 마차라도 빌릴까요?”
내 물음에 당무가 손사래를 쳤다.
“겨우 이 각만 가면 되는데 무슨 마차를 빌립니까? 저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닙니다.”
“그렇죠?”
바로 수긍하는 내 답에 약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그가, 앞을 가리켰다.
“저기 무림맹이 보이네요.”
“워낙 크다 보니 여기에서도 보이는군요. 그런데…….”
무림맹 주변에 무인들이 가득했다.
“저들은 누굴까요?”
“아, 각 문파의 사람들입니다.”
“남궁세가가 벌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무인들입니까?”
“음, 그건 아니고…….”
당무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답했다.
“사실, 무림맹에서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남궁세가가 아닙니다.”
“네?”
어이없는 내 물음에 당무가 약간은 회의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에서 중요한 건, 남궁세가의 인간들이 나간 후 비워진 중요한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죠.”
“뭐라고요?”
황당했다.
무림맹이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남궁세가의 중요 인물이 빠지면서 공백이 생겨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권력 싸움이었다니.
“무림맹주는 허수아비입니까? 저런 놈들을 가만히 두게?”
“그게…….”
당무가 한숨을 쉬었다.
“현 맹주이신 진무양 님은 올해 은퇴할 예정이셨습니다. 게다가 그분 역시 남궁세가의 추천으로 올라간 자리라……지지 세력이 없어졌죠.”
“그럼, 문파들의 싸움에 맹주자리까지 걸려 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세가끼리 연합해서 저 지랄을 하는데도 권력 싸움이나 하는 겁니다.”
“……하!”
황망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권력 싸움이 혈천교와 세가들이 연합한 사안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내 반응에 당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차기 맹주와 주요 자리가 정해져야 뭐든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림맹으로서는 중요한 사안이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요.”
“무림의 명운이 걸려 있는 상황인데 자리싸움이 당연하다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다들 나름의 이유는 있다는 겁니다.”
이번 한 번으로 인해 문파 간의 서열과 권력 구도가 바뀌게 된다.
천갑무신의 후인이야, 확고부동한 단 하나의 자리이니 아무도 탐낼 수 없지만 무림맹의 자리는 달랐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남궁세가 놈들이 다른 세가들과 연합한것도 모자라 혈천교를 끌어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롭게 자리싸움이라니.
“좀 더 빨리 가야겠군요.”
“네?”
나는 당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당무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잡았다.
“굳이 여기서까지…… 으헉!”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하늘로 솟자 옆에 있던 사람의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 신선이다!”
무림맹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니만큼 어지간한 경공은 봤어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처음 본 것이다.
그들의 눈이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진 곳을 신기하게 바라볼 때쯤.
이미 두 사람은 무림맹의 담장을 넘은 상태였다.
“누구냐!”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신형의 무림맹의 담장을 넘자, 수십 개의 창칼이 침입자를 향했다.
“……자, 잠깐!”
당무는 창칼을 들이대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향해 무림맹주가 준 황금패를 황급히 꺼내 들었다.
“나는 서창 무림맹의 부단주 당무라 하오! 옆의 이분은 천갑무신의 후인이니, 칼을 내리시오.”
당무의 말에 놀란 그들이 황금패를 확인하고는 무기를 내렸다.
“……그런데 후인께서 왜 정문으로 안 오시고 이렇게 담을 넘은 것인지?”
무림맹의 순찰을 담당하던 무인이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묻자 당무가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분께서 일반 무림인들과 같소? 급한 이유가 있으니, 이런 것 아니겠나!”
당무의 말에 순찰무인이 눈을 부라리며 취조하듯 말하려는 순간.
“대체…….”
뒤편에서 힘 있는 음성이 울리며 무인의 말을 막았다.
“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뒤를 돌아보니 무림맹주 진무양이 우리를 바라보며 반갑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를 보자 무인들이 황급히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진무양은 고개를 들라는 듯 무인들을 향해 손짓하고는 말했다.
“앞의 이분은 진짜 천갑무신의 후인이 맞으시네. 그러니 자네들은 물러가게.”
“하지만…….”
순찰당 당주가 반대의 말을 덧붙이려 하자, 맹주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곧 물러날 나라서 내 말이 우스운가?”
“아, 아닙니다.”
순찰당 당주는 곧바로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직속 부하 하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쯧.”
그 모습을 보던 진무양이 혀를 찼다.
“오랜만에 본 후인께 좋지 않은 모습부터 보여드린 듯하군요.”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힘이 떨어진 것이 너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내부가 이러니 밖의 일에 빨리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로군.’
진무양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시지요.”
“예.”
그를 따라 당무와 함께 맹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창 무림맹 지부에는 가봤으나, 실제로 부림맹 본부에 온 적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무림맹 곳곳을 향했다.
‘역시, 훨씬 크네.’
크다 뿐일까, 곳곳에 비싼 장식품 하며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건 그냥 훑어만 봐도 알 정도였다.
‘상당한 이권이 있나 보군.’
당무에게 듣기로는 드러난 한 달 예산만 해도 금 두 관이라고 했으니 숨겨진 것까지 따진다면 더 될 터였다.
돈뿐만이 아닌 무형의 이권도 따진다면 무림맹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훨씬 많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걸어 무림맹주의 집무실에 다다르자, 거대한 호랑이 가죽이 보였다.
날카로운 이를 벌리는 호랑이 가죽 옆으로는 기다랗고도 큰 탁자가 보였고, 벽에는 현 무림 지도가 크게 걸려있었다.
‘이게 무림맹주의 집무실이구나.’
이곳에 비하자면 전에 보았던 서창 무림맹의 집무실은 창고와 같았다.
고작 집무실이 이정도인데 맹주에게 향하는 권력은 얼마나 클까.
황금패 하나로 당무와 누렸던 것들을 생각한다면, 손가락 하나에 무인들 몇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앉으시지요.”
복잡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둘러보는 내게 진무양이 직접 차를 따르며 말했다.
달칵.
황금으로도 구하기 힘든 향긋한 극상의 용설차가, 바다 끝 나라의 귀한 찻잔에 담겨 나왔다.
‘장난 아니군.’
고작 차 한 잔이 이 정도라니.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가운데, 이미 이곳엔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당무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시비는 어디 가고 맹주님께서 직접 차를 따르십니까?”
“그들 또한 남궁세가에서 보냈던 시비들이었지.”
“……그렇군요.”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당무를 향해 진무양이 허탈하게 웃었다.
“솔직히 난 지금이 편해. 시비들이 있어서 말을 하는데 좀 껄끄러웠거든.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남궁세가에 들어가니 말일세.”
“그래도 사람들이 없어서 많이 불편하실 듯합니다.”
당무의 말에 진무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어차피 난 남궁세가에서 내세운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는데 뭘. 아, 우리 후인님께서는 모르셨겠군요.”
당혹스러운 내 얼굴을 보던 진무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처음 제가 맹주 자리에 오를 때만 해도 남궁세가의 힘이 이렇게 세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파들과 비등했었지요.”
그는 용설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어느 문파에서 맹주 자리를 차지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문파는 별 볼 일 없으나 운 좋게 무림 삼원(三元) 자리를 차지한 제게 맹주 자리가 왔습니다.”
진무양에게 맹주 자리를 가져온 이들은 남궁세가였다.
“남궁세가인들은 자신들이 못 가져온 맹주 자리를 준 뒤, 대외적인 용도로 저를 이용하고 진짜 권력은 그들이 가져갔지요.”
“……그래서 그들이 빠져나가자 무림맹이 마비가 된 것이군요.”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후인마저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남궁세가가 뒤에 있다고 한들, 내가 겪고 보았던 진무양은 괜찮은 무림맹주였다.
“저는 맹주님께서 나름 무림맹을 잘 다스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남궁세가가 빠져나간 이때야말로 진짜 맹주가 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보았으나…… 워낙 가문이 한미한 나머지 쉽지 않더군요.”
“다른 지지기반은 없습니까?”
“절 이용하기 위해 남궁세가가 제 지지기반을 모조리 한직으로 보내 버린 탓에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총체적 난관이었다.
남궁세가 일로 무림맹의 맹주에게 협조를 요청하러 왔건만, 무림맹 자체가 이래서야 뭘 하겠나.
지휘체계마저 흔들리는 지금 무엇을 요청할 것이며, 요청한들 이뤄질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맹주가 그들 손에서 추대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곳부터 정리해야겠어.’
진무량이 준 차를 마시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귀한 천갑무신의 후인께서 왜 끈 떨어진 노인네가 있는 곳에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