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45화
[세 개의 비고 중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차원이동기가 있는 곳을 택했다.
왜냐면 그곳은 재물로 가득 차 있지도, 괴상하고 난잡한 잔해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적당히 물건도 있고 깨끗한 곳이 좋으니까.’
창고로 쓰이던 비고가 알맞았다.
“세 번째 비고로 하지.”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내 몸은 차원이동기가 있던 마지막 비고로 옮겨졌다.
비고 안에는 이미 은은한 빛을 뿌리며 여인의 형태로 변한 가야가 있었다.
[주인께서 진천의 세계에서 가져오신 물약은 특정 마력의 부작용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이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 재료가 필요하나 하급 마석과 비고의 기능으로 대체 가능합니다.]
[대신, 요청하신 삼백 개의 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삼십 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삼십 일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
제대로 된 기구도 없이 이런 공간에서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나는 흔쾌히 답했다.
“좋아.”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약을 만드는 동안 계속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한 달 내내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아닌 가야만 비고에 있게 되더라도 그동안 내 활동은 위축될 게 뻔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약의 제조는 제가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순간 빛이 하얗게 폭발하듯 빛나더니, 서서히 사라져 가는 빛은 둘로 나뉘었다.
밝은 빛에 눈을 감았다 뜨니, 가야가 둘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운 나머지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진짜로 보이는 가야가 입을 열었다.
[일하는 것은 제 분신입니다.]
“……!”
갑자기 가야가 두 명으로 분리되자 입이 떡 벌어졌다.
“분신?”
가야가 웃었다.
[분신이라고는 하나, 제 능력을 반으로 나눈 것에 불과합니다.]
“능력을 반으로 나눈다면 약을 만드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 아니야?”
물음에 답한 것은 분신으로 만들어진 가야였다.
[그건 아닙니다.]
[약 자체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삼십 일이며, 저는 그 과정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분신은 말을 마치고 가야처럼 고개를 숙였다.
“와, 똑같네.”
말투와 행동조차 진짜 가야와 같았다.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진짜 가야가 살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스슷.
그러자 분신이 입은 옷의 색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주인께서 좀 더 편하게 구분하시라고 옷의 색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진짜 가야가 입은 옷은 빛이 날 만큼 흰옷인 반면, 분신이 입은 옷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푸른색.
“이제 달라 보이네.”
덕분에 혹시라도 헷갈릴까 봐 걱정했던 마음을 사라졌다.
“그럼 분신과 세 번째 물약만 이곳에 있으면 되는 거야?”
[맞습니다.]
‘한 달간 이곳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적미륵이 무림에 퍼져 문파들 내부는 이미 일정 부분 혈천교에 의해 장악된 상황이었다.
차라리 혈천교 놈들이라면 마음껏 죽일 수라도 있지, 적미륵의 힘을 흡수했다는 사실 하나로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물론, 가야는 적미륵의 힘을 흡수한 사람들을 가려내겠지만…….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무림맹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남궁세가의 봉문 사태로 무림맹 주요 인사들이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무림맹 자체가 혼란스러운데 무슨 도움을 얻을까.’
오히려 무림맹에 속한 놈들이 적미륵의 힘을 더 얻었으면 덜 얻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들의 도움을 받느니, 안 받느니만 못했다.
게다가 적미륵의 힘을 흡수했다는 걸 나는 알지만, 어떻게 증명하나?
증명 없이 그들의 부모와 자식을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발과 내 위신을 떨어뜨리려는 놈들의 수작은 안 봐도 뻔했다.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가 적미륵의 힘을 흡수했다고 나서는 거야.’
그렇게 만들기 위해 무량후를 이용해 소문을 뿌려 놓았다.
흡혈만 하지 않았다면 적미륵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으니, 효능을 경험한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되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적미륵의 힘을 흡수한 이들은 목숨을 구하고 혈천교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남는 건, 어떻게 벌하느냐인데…….’
아직 흡혈을 저지르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들은 손대서는 안 될 혈천교의 힘을 흡수했다.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미륵의 힘을 얻어 흡혈을 한 놈들이야 죽어 마땅하지만, 이들의 처리는 애매한 것도 사실.
너무 강한 벌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스스로 나서지 못할 게 뻔했다.
‘무량후는 적당한 재물을 내는 것으로 하자고 했었지.’
힘 있는 문파이니만큼 재물을 내놓고 그들의 죄를 삭감받는 것이니 더 나설 확률이 높긴 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적미륵의 힘을 흡수한 걸 용서받는다고?
말도 안 됐다.
스스로 나서게 만들기 위한 미끼로 약한 벌을 내세웠지만, 놈들에겐 더 강한 벌이 필요했다.
최소한 놈들에게 적미륵의 힘을 얻을 걸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의 것을 말이다.
나는 가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약을 먹으면 바로 적미륵의 부작용이 사라지나?”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효과도 원하시는 겁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약을 먹으면, 최소 한 달간은 기어 다니게 만들어 놓을 수 있지?”
내 질문에 가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합니다. 모든 것은 주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놈들은 부작용을 없애는 대가로 약을 마시고 최소 한 달간은 똥줄이 빠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놈들의 죄를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테니.
‘흡혈을 한 놈들이라면.’
당무에게 말했듯 그들은 목숨을 구한 대신, 남은 평생을 지옥 속에서 살게 할 예정이었다.
아니라면, 놈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 그러나 죽기 전에 놈들이 발악할 것은 뻔했다.
‘특히 남궁세가.’
일단 봉문을 하긴 했으나,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후회하며 갇혀 살까?
절대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장손인 남궁비천이 그 지경이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판을 뒤집으려 하겠지.’
그리고 그들은 혈천교와 손을 잡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이다.
또한, 정파의 이름에 숨에 흡혈을 한 놈들 또한 남궁세가와 함께 기어 나올 테다.
‘그때 놈들을 잡으면 돼.’
이 모든 것들은 미끼이자, 덫.
단순히 적미륵의 힘을 흡수한 이들이 약의 소문을 듣고 나서게 만드는 것은 미끼이며.
흡혈은 한 놈들이 남궁세가와 함께 전쟁을 일으켜,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드는 것은 덫이었다.
이로써, 정파 안에 있는 혈천교의 씨앗을 정당하게 제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지난 전쟁이 외부의 적을 말살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부의 적을 섬멸하는 전쟁이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적들을 생각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갑게 빛을 발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산속.
우거진 숲속에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각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듯 전각에는 작은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각을 어떻게 찾았는지, 열댓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무인들이 미끄러지듯 빠르게 전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멈춰라.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가겠다.”
가장 앞에선 이가 말하자, 뒤에선 무인들이 대답 대신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각 앞으로 걸어가는 무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다가갈수록 그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조급해 보이는 모습.
빠르게 담을 훌쩍 뛰어넘는 무위는 꽤 상당한 수준으로 보였다.
전각 안으로 들어선 그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의 비석들을 특이한 순서로 눌렀다.
그그긍.
그러자 네 개의 방향으로 있던 비석들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바닥이 문처럼 열렸다.
열린 문안 쪽으로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었다.
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손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으로 안을 확인한 신형이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리자, 동시에 문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디 있는 것이냐?”
어두워진 지하에서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헤매기 시작했다.
“비천아, 나다. 네 할아비.”
이곳은 숨겨진 남궁세가의 안가.
만약의 일을 대비해 중원에는 열두 개의 남궁세가의 안가가 있었고, 남궁한영은 손자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이곳에도 없는 것이냐?”
열두 개 중 벌써 여덟 곳을 돌았건만, 자신의 손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허탈한 한숨이 지하 안을 울렸다.
그때, 지하의 끝부분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할아버지……?”
인기척이 들린 곳에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비천이었다.
“비천아!”
남궁한영은 한달음에 손자에게 다가섰다.
“이런……!”
꽤 마음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초췌한 모습에 할아버지라 말한 이의 얼굴이 무너졌다.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남궁한영의 얼굴은 회한과 걱정,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흐으윽.”
남궁비천은 할아버지를 확인하자마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소자가 그만……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흡혈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손자의 말을 듣는 남궁한영의 입에서 짙은 후회가 새어 나왔다.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모든 것은 이 할애비의 잘못이다. 그때 너에게 적미륵의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나 그날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주화입마에 걸린 손자를 그냥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그놈 탓이다.’
남궁한영이 이를 갈았다.
이미 그들의 잔혹한 고문 아래 죽어 없어진 총교관,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한번 이를 갈고는 남궁비천에게 다가갔다.
덜덜 떠는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이는지.
남궁한영은 손자의 몸을 얼싸안으며 토닥였다.
“이제 할애비가 왔으니 괜찮다, 괜찮아.”
“하, 할아버지. 흐흐흑.”
한동안 흐느끼던 남궁비천이 어느 순간 울음을 뚝 그쳤다.
“그런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남궁비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자, 오신 것입니까?”
“아니다. 세가의 무인들이 밖에 있어.”
그의 답에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는 남궁비천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흘렀다.
손자를 얼싸안고 있던 남궁한영이 왠지 모를 섬뜩함에 몸을 떼었다.
“그건 왜 묻는 것이지?”
“……가 필요합니다.”
“뭐?”
남궁비천의 말을 들은 남궁한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피가, 필요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는 손자의 눈빛이 이미 피에 대한 욕구로 번들대고 있었다.
“……!”
“제발, 한 번만입니다. 그동안 흡혈을 못 해서 죽을 것만 같아요.”
집요한 눈빛으로 피를 요구하는 손자를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 부탁입니다. 저를 살리고 싶다면 피를…… 주십시오.”
손자로 인해 벌써 몇 명이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이미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는 피 없이 살기는 힘든 몸이 된 것을.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전음으로 수행 무인 중 하나를 불렀다.
곧이어 지하에 나타난 남궁세가의 무인이 남궁한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타탁.
남궁한영의 손이 빠르게 수행 무인의 점혈을 짚었다.
“……!”
난데없이 점혈을 당한 무인의 눈이 설마, 하는 눈으로 자신을 소름끼치게 바라보는 남궁비천을 향했다.
“……미안하다.”
남궁한영은 애원하는 무인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더 보기 힘들다는 듯 곧바로 등을 돌렸다.
“끄아아악!”
잠시 후, 점혈을 했음에도 흡혈 당하는 세가 무인의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지하를 울렸다.
우걱우걱.
피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씹어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자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남궁한영은 헛구역질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놈들의 말대로 혈천교와 남궁세가가 무림을 양분하면 돼.’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은, 걸림돌이 되는 진자휘라는 녀석을 없애는 것.
적미륵의 힘을 흡수한 가문들을 연합해 놓은 상태이기에 승기는 남궁세가에 있다고 남궁한영은 자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