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44화
그새 제갈신을 만나서 저런 말까지 듣다니, 부지런하다고 말해야 할까?
의아하게 바라보는 당무를 앞에 두고 킥킥대던 나는 잠시 후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어제 일을 잘 보셨는지요?”
내 물음에 당무가 잠깐 멈칫하더니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글쎄요?”
“무림맹과 연락한 게 아니었습니까?”
“제가 그쪽 소속이다 보니 연락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무한에 왔으니, 시간상 무림맹에는 다녀오지 못했을지라도 사람을 통해 연락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무는 속 시원하게 답하지 않은 채 말을 돌렸다.
“참, 무량후님께 적미륵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약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지요?”
“네.”
하루 만에 당무가 들을 정도라면 소식이 꽤 빠르게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대한 소문을 빨리 내달라고 했는데. 잘해주고 계시네.’
소문을 내달라고 한 것은, 적미륵을 흡수한 사람들이 혈천교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놈들이 적미륵으로 일을 벌이기 전에 소문부터 낸 것이지요.”
“오, 그렇군요.”
나는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주변에 기막을 펼쳤다.
혹시라도 객잔의 누군가가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막은 왜 펼치시는지?”
당무는 아무렇지 않게 기막을 펼치는 나를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앞으로 말할 내용들은 당분간 알려져서는 안 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져서 안 된다는 건, 혹시 약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맞습니다.”
“그게 무엇이길래 이렇게…….”
“약은 적미륵의 모든 부작용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
당무의 얼굴이 알 수 없는 당황스러움으로 얼룩졌다.
“설마, 한계가 있다는?”
“네.”
당무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적미륵의 힘을 흡수해서 능력을 높이거나 건강을 낫게 하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만, 이미 인간을 흡혈한 사람은 되돌리지 못합니다.”
“……그럼, 흡혈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
나는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 전에 묻겠습니다.”
“무엇을……?”
“혹시, 당문의 누군가가 흡혈을 한 것입니까?”
“……!”
당무의 사문은 당문이다.
지난날, 당하연이 나를 찾아와 당문을 구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문은 무척이나 폐쇄적인 문파다.
당무가 자유로운 사람이니 문파를 벗어나 무림맹에서 녹을 먹을지는 몰라도, 근본은 당문(唐門).
그에게 있어 당문은 무림맹보다 윗선에 둘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역시 숨길 수가 없군요.”
당무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제 제가 만난 사람은 당하연 아가씨였습니다.”
어쩐지 현무학관에 당하연이 없더라니, 그녀는 당무를 만나고 있었다.
설마, 하며 물어봤건만.
오늘따라 과장된 당무의 행동 기저에는 사문의 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일을 잊기 위해 더욱 웃고, 즐거운 일만을 생각하려는 듯 당무는 마치 경극 배우처럼 굴었던 것이다.
민낯이 된 당무의 입에서 속내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제 만난 아가씨는 제게도 자휘 님께 말씀하신 걸 말해주었습니다. 당황한 저는 부랴부랴 근처에 있는 당문의 지인에게 사정을 들었죠.”
그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떨렸다.
“불안한 기류를 눈치채고 얼마 전 이곳으로 온 녀석이었습니다. 피신하듯 온 녀석의 말에 따르면…… 아가씨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그중에는 이미 흡혈한 사람도 있겠군요.”
“예.”
답을 하는 당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문은 독을 연구하는 문파입니다. 그들에게 적미륵의 힘은 연구대상이자 하나의 보물이었죠. 그 힘을 쥐게 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겁니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약의 존재에 대해 무림맹을 통해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미 흡혈을 한 사람은 불가하다니…….”
당무의 두 손이 얼굴을 감쌌다.
“희망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무림맹의 사람입니다. 적미륵의 힘에 취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취한 이들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말에 당무는 여전히 두 손을 얼굴에서 떼지 않은 채,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압니다. 왜 제가 모를까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제 혈육과도 같은 사람이다 보니…… 제 마음이 물러진 것이겠지요.”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강하게 문지른 후,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두 눈가는 깊은 고민과 절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다만, 벌을 받음에도 적미륵의 부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모두 그들의 선택입니다. 적미륵이 혈천교의 것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인 것과 생명을 죽여 피를 탐하는 것이 죄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그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서늘한 목소리가 기막 안에 울려 퍼졌다.
“죽음입니다.”
“죽음…… 말입니까.”
“네.”
단순히 적미륵의 힘을 얻어 효과를 본 것과 다르게 피를 섭취한 이상, 그들의 몸은 독특한 마기(魔氣)를 띠게 된다.
마기는 계속 피를 요구하게 되는데, 혈천교 놈들이야 자신들의 특별한 사공을 익혀 괜찮다지만 정파인들은 달랐다.
“정파인들의 몸에 마기가 들어오면 일시적으로 강해질지는 모르나 결국 균형이 깨져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혈천교 놈들은 정파인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고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놈들은 사공을 미끼로 정파인들을 이용하겠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정파의 무공을 없애고 사공을 익히지 않는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씹어 먹을 새끼들.”
강하게 쥔 당무의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분노하는 그를 보건대, 아주 가까운 지인이나 혈육이 적미륵의 힘을 탐한 듯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벌이든 받게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이라도 구할 방법을 주십시오.”
당무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객잔의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봄에도 당무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읍소했다.
“자휘 님께서는 방법이 있지 않으십니까? 저를 봐서라도…… 제발, 부탁입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야에게서 들은 두 개의 방법 중 하나는 진천의 세계에 또다시 다녀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차원이동기가 고쳐지기까지는 약 구십 일의 시간이 남았고 고쳐질 확률도 높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읍소하는 당무를 보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지?’
흡혈한 이들은 어차피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
그렇다면 나 또한 생명을 빼앗지 않는 선에서 같은 방식으로 놈들의 죗값을 받아내면 될 터다.
“알겠습니다.”
거절당하리라 생각했던 당무였기에, 그의 고개가 놀란 듯 번쩍 들렸다.
“저, 정말입니까?”
“예. 대신 목숨만 살려놓는 것으로 하죠.”
내 말에 당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으, 감사합니다!”
또 한 번 내게 흐느끼며 엎드렸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저, 당무. 앞으로 그 모든 것들보다 자휘 님을 위에 두고 받들겠습니다. 결코 이번 일을 결정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드릴 것입니다!”
엎드린 당무를 보는 내 표정은 차가웠다.
‘후회는 그들이 할 텐데.’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라며 당무를 탓할 미래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죽음 대신 내 제안을 택한 그들의 선택일 터.
잘만 견딘다면, 그들은 목숨을 지키고 그렇게 원하던 연구를 마저 끝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그 말,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 * *
당무는 예전과 비슷한 듯했지만 달랐다.
전에는 그저 한 발 걸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온전히 이쪽으로 넘어온 느낌이랄까.
‘가야가 가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근본은 여전히 당문이겠지만.’
그는 당문을 지키기 위해 완전히 내게 넘어왔으니, 현실적인 가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명줄을 내가 쥔 것이나 매한가지인데 어떻게 다른 마음을 먹겠나.
놈들의 생명을 살려준다는 것은, 적미륵의 힘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실험용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무척 고통스러울 테지만,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런 것이니 그 대가는 치러야 했다.
그리고 잘만 한다면, 명줄을 늘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연구의 끝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게 감사할 수밖에 없을 테지.’
다만…….
아직 그들은 적미륵의 위험을 몰랐다. 설령 알려준다 한들 믿지 않을 테고.
안 좋은 꼴을 보고 나서야 당무를 통해 내게 넘어올 가능성이 컸다.
당무 또한 마지막 방법이 있다는 것 정도만 그들에게 넌지시 말해놓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들의 선택.
당무를 믿는 자는 살고, 믿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빨랐고 우리는 얼마 후 진천세가에 도착했다.
겨우 열흘이 지났음에도 진천세가는 흑영의 손길 아래 더욱 정돈되어 이제는 어엿한 세가로 보였다.
‘역시 집에 오니 좋네.’
지난날엔 현무학관이 더 편했는데, 이제는 진천세가로 바뀐 이곳이 더 진짜 내 집 같았다.
“주공,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하지 않았음에도 흑영은 벌써 문 앞에 나와 있었다.
그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는 말했다.
“어쩐지 주공께서 오실 것 같기에 나와봤더니 지난번처럼 진짜로 오셨군요. 신기합니다.”
가신 중에서도 총관이어서일까. 유독 흑영은 촉이 빨랐다.
“저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큰가 봅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웃었다.
흑영이 뒤에 서 있는 당무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당무 님도 오셨군요.”
“예, 이제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예정입니다.”
“잠깐의 손님이 아니라, 이곳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흐음, 글쎄요. 그건 당무 님만이 알겠죠.”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당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천의무신님께서 내치지 않는 이상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천의무신이요?”
갑자기 나온 새로운 별호에 흑영이 고개를 갸웃하자 당무가 바로 답했다.
“후인님이 별호가 생기셨습니다. 무려, 천의무신이란 별호지요.”
“하하! 멋지군요. 그동안 단순히 천갑무신의 후인이라 불리는 것에 살짝 서운했는데 한 번에 풀리는 느낌입니다!”
크게 웃으며 좋아하는 흑영과 달리 나는 괜스레 멋쩍어서 말을 돌렸다.
“저분은 당분간 무림맹 일과 이곳에서 저를 보좌하는 일을 할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당무가 말했다.
“편하게 당무라 불러주십시오.”
어차피 한동안 같이 있게 될 터라 호칭이 애매하긴 했다.
“그러지요.”
당무가 전과 달리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흑영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건들거리는 당무는 생각보다 심지가 강한 사내였고, 그를 진심으로 고개 숙이게 만드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흑영은 진천세가에 당무와 같은 인물이 있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던 차라, 그가 반가웠다.
“당무 님의 거처를 원래 계시던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보다 좋은 곳으로 준비한다고 하자 당무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진작 그렇게…….”
“네?”
“아, 아닙니다.”
당무가 바로 고개를 숙이자, 흑영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미 친해 보이는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흑영에게 말했다.
“저는 들를 곳이 있으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흑영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나는 당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함께 있게 되었으니, 내 집처럼 편하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예.”
당무 또한 공손한 자세로 내게 포권을 취했다.
나는 그 뒤로 경공을 사용해서 바로 진천의 비고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오직 이곳에서만 약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약은 어디서 만들면 되지?”
내 물음에 오랜만에 가야의 음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