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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40화 (140/200)

기갑무림 140화

제갈신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가야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도움을 주신다는 건지……?”

나 역시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결을 한다는 것일까.

“방법을 말해봐.”

가야는 눈이 부실 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해답은 주인께서 가지고 오신 물건들에 있습니다.]

“가져온 물건?”

가야가 말하는 것은 진천에서 가져온 가방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때 내가 가져온 것들은 최상급 마석 한 개와 상급 마석 세 개.

그리고…….

하급 마석 열 개와 작은 물약들.

설마, 물약들이 적미륵의 힘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건가?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물약들을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물약 중 하나가 특정 마력의 기능을 지우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약을 사용한다면, 혈천교가 심어놓은 부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

혹시 몰라 챙겨온 다섯 병 중 하나가 적미륵의 좋은 효과만을 남기고 부작용은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나중에 피를 마시게 되는 부작용이 사라지지.’

이로써 사람들을 제어하려던 혈천교의 음모 또한 막을 수 있었다.

많던 약병 중에서 골랐던 다섯 병 중 하나가 이런 효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작은 병 하나로 모든 사람에게서 적미륵의 힘을 제거할 수는 없어.”

[진천의 비고에서 하급 마석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추가 생산이 가능합니다.]

진천의 비고는 마석이 모자라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가져온 상급 마석은 가신들의 기갑에 써야 했으니, 남은 건 하급 마석들.

“하급 마석으로 물약 몇 병을 만들 수 있지?”

[하급 마석 하나에 물약 백 개입니다.]

혈천교 놈들이 아무리 적미륵을 많이 구했다 한들 이삼백 개 정도일 것이다.

‘더 있었다면 중소문파까지 진짜 적미륵을 주면서 회유했을 테니까.’

큰 문파 위주로 한 두 개만 주었다는 것은 그들도 대량의 적미륵은 구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마석은 충분하네.”

최대 삼백 개 정도면 놈들이 뿌려 놓은 적미륵의 힘을 상쇄시킬 수 있을 테다.

“가야, 삼백 개의 물약을 만들어줘.”

[삼백 개의 물약을 만들 시 하급 마석 세 개가 소요됩니다.]

[물약들을 만들기 원하신다면 진천의 비고로 절 데려다주십시오.]

“알겠어.”

일단 방법을 안 이상, 물약들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현무학관에 가는 길이니 지금 당장 물약이 필요하진 않았다.

“고맙다, 가야.”

고맙다는 말에 몸에서 푸른빛이 빛나며 가야가 황송하다는 듯 몸을 숙였다.

[저는 사용법을 알려드렸을 뿐.]

[이 모든 것은 주인님께서 용기를 내어 가져오신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죽을 수 있음에도 진천의 세계로 가서 얻은 물건이었다.

“그래도 네가 없었으면 쓰지 못했을 거야.”

가야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그녀는 우리 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처음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

지금까지 옆에서 가야와의 대화를 구경하던 제갈신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기하다.”

여운이 남았는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연한 푸른빛을 잡으려는 듯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진짜 여인은 아니니 너무 좋아하진 말고.”

“그건 나도 알아.”

손바닥 안에서 푸른빛의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제갈신이 말했다.

“가야의 말대로 물약이 적미륵의 힘을 얻은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나를 제갈신이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될 수도 있는 일을 될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가야는 허튼소리는 한 적이 없거든.”

천갑에 내장된 인공지능인 만큼 가야는 늘 정확했다. 제갈신은 두 눈에 부러움이 가득 담겼다.

“……최고네.”

높은 지능을 지닌 데다가 신비한 외모까지 가지고 있다니.

진짜는 아니지만, 오히려 환상 같은 모습이 그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가야의 존재에 대해서는 너밖에 몰라.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

“내가 왜 말하겠어.”

되레 나 빼고 자신만이 가야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이 기쁜 듯 제갈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야를 생각하는 제갈신의 몽롱한 눈빛에 내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너, 저런 취향이었냐?”

“취향이면 뭐 해? 어차피 이 세상엔 없을 텐데.”

“이 세상엔 없어도 진천의 세상엔 있을지도?”

“응?”

“그런 게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제갈신을 향해 나는 밖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해결 방안도 생겼으니 나갈까?”

“어디로?”

“당연히 현무학관이지.”

바로 현무학관으로 간다는 말에 제갈신의 입꼬리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몇 달 만에 본 친우기에 조금은 노닥거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봤는데 바로 보내야겠냐?”

“너 수업시간도 제끼고 여기로 온 거잖아? 수업은 해야지?”

“우와, 넌 이제 수업 안 듣는다 이거지?”

“어.”

싱긋 웃으며 당당하게 말하는 내 표정에 제갈신이 기가 막힌다는 눈빛을 했다.

“어째 능글스러워졌다?”

능글스럽다는 그의 말에 순간 당무가 떠올랐다. 그를 생각나자 입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물들어서 그래.”

“누구한테?”

“그런 사람이 있어.”

어차피 제갈신도 당무를 볼 테니 그때가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바로 나가자고.”

“어휴. 현무학관에서 수련귀신이라고 불릴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제갈신은 투덜대며 장난스레 말을 올렸다.

“천갑무신의 후인께서 가자 하시니 가야겠지요.”

“앞장서거라.”

“네네.”

제갈신이 내시처럼 고개까지 숙이며 답하자,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좋네.’

늘 칼끝을 걷는 삭막한 삶에 제갈신이란 친우는 시원한 빗물과도 같았다.

밖으로 나가는 제갈신의 뒷모습을 보자 오랜만의 평온함이 심장에 스며들었다.

‘이 평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혈천교 놈들을 없애야겠지.’

따라나서는 발걸음이 즐거우면서도 조금은 무겁게 느껴졌다.

* * *

금의환향(錦衣還鄕).

현재 상황을 말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문장은 없었다.

제갈신이 언제 현무학관에 연락을 했는지, 도착할 시간이 되자 모든 생도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우와! 천갑무신의 후인이시다!”

“후인이 현무학관에 다녔다니 최고의 영광입니다!”

축제가 벌어진 듯한 모두의 환영 속에서 나는 현무학관에 들어섰다.

‘처음하고는 완전 딴판이네.’

현무학관에 발을 들였을 때를 생각하면 무시가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생도가 환호하며 나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지나가며 옆을 보니, 추교관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추교관의 옆에 선 천교관이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진자휘, 최고다!”

엄지를 척 올리며 손뼉까지 치는 그의 모습은 무신이라도 영접한 태도였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약자는 무례를 논할 자격도 없다던 사람이 천교관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격렬하게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참 많이 변했어.’

나만큼이나 변화를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옆에선 제갈신이었다.

“이야, 이렇게까지 환영할 줄 몰랐는걸?”

제갈신의 입에서 휘파람이 새어 나왔다.

“천교관의 말대로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곳이라 그런 것이겠지.”

“그런 말을 하다니…… 역시 천교관이네.”

그가 혀를 차는 가운데, 나는 마중 나온 생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후인께서 손을 흔드신다!”

생도들은 모두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며 손을 흔드는 내 얼굴을 쳐다봤다.

“예전에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더 잘생겨 보인다.”

“천갑무신의 후인이어서 그런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

“크큭, 번쩍거리는 빛은 네 눈에서 나는데?”

옆에 있던 생도의 놀림에 말을 하던 생도의 인상이 구겨졌다.

“오징어는 좀 꺼져줄래?”

“뭐? 오징어?”

“후인 옆에 있으니 아주…… 됐다. 그냥 옆에 있어. 그래야 우리 후인께서 더 잘생겨 보이지.”

당무 덕에 옷까지 잘 챙겨입자 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옆을 지나칠 때마다 생도들의 눈이 황홀하게 변하자, 제갈신이 은근슬쩍 내 옆에서 벗어났다.

“어디 가?”

“나도 오징어 될까 봐.”

“크큭, 네가 언제 그런 거 따졌다고.”

웃고 떠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어느새 현무학관 안쪽에 서 있는 무량후가 보였다.

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나를 보며 입술을 떼어냈다.

“드디어 후인께서 오셨군요.”

무량후는 높임말을 함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러십니까? 고개를 드십시오.”

당황스러워하는 내 태도에도 그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답했다.

“정도 무림을 지켜주는 영웅이신데 이 정도 예의는 당연합니다.”

“저는 천갑무신의 후인이기 이전에 현무학관의 생도입니다. 그러니 학관장님께서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아닙니다. 설사 생도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섰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량후는 쉽게 높임말을 바꾸진 않을듯했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정중하게 물었다.

“오늘 후인께서 현무학관에 오신 이유가 있으실 테니, 제 집무실에 갓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절 따라오시지요.”

무량후를 따라 들어간 집무실은 여전했다.

널따란 방에 사방이 창으로 둘러싸인 무량후의 집무실은 생도들을 둘러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방으로 뚫린 창으로 안력을 돋구면 생도들이 무엇을 하는지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예전에 지반에서 높다란 무량후의 집무실을 보며 강해지고자 다짐했었는데.

‘이제는 현무학관을 나가도 될 정도로 강해졌어.’

감개무량한 느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직도 서성이는 생도들이 보였다.

나는 계속 창밖을 보며 물었다.

“원래 수업시간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후인께서 오시는데 수업이 되겠습니까? 다들 들뜬 마음에 수업은 내팽개친 것이지요.”

그는 흰 수염을 천천히 쓸더니 말을 덧붙였다.

“보십시오. 생도뿐 아니라, 교관들까지 저러고 있지 않습니까?”

무량후의 말대로 교관들조차 집무실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그만큼 후인께서 가지는 위상이 대단하다는 방증입니다.”

한동안 창가 아래쪽을 바라보던 무량후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현무학관에 있지 않으실 것이란 것을 잘 압니다.”

천갑무신의 후인의 무위는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런 무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학관의 생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참 허전하군요.”

무량후는 수염을 여전히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봤다.

“저 역시 현무학관을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너무 아쉽습니다.”

사실이었다.

친우들과 학창 시절을 보낸 시간은 고작 일 년이었다.

어떻게 아쉽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떠나야 하겠지.’

앞으로 있을 곳은 현무학관이 아닌 진천세가와 전장(戰場)이었다.

그것이, 이곳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었으니.

나는 무량후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야말로…….”

무량후가 고개를 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 사람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니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나 했었을 일입니다.”

부정하지 않고 답하자 무량후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웃었다.

“허허, 후인님이시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곧이어 나온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가라앉아 있었다.

“남궁세가의 손아귀에서 사람을 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두 눈 속에 일렁이는 분노.

나는 조용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뭔가를 아신 겁니까?”

“알다마다요. 그 벼락 맞을 것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게 되었지요.”

어쩐지 현무학관의 생도 중 남궁비천이 안 보인다 했다.

‘뻔뻔한 낯짝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남궁비천을 본다면 그가 적미륵의 힘을 흡수했음을 모두에게 보일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약간은 아쉬웠다.

그러나 무량후의 다음 말을 듣고는 아쉬움은 싹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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