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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35화 (135/200)

기갑무림 135화

[최상급 마석은 마석이 필요한 모든 것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만능열쇠와 같은 존재입니다.]

‘만능열쇠?’ 그렇다면 차원이동기의 사용도 가능한 것일까.

나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가야에게 물었다.

“최상급 마석으로 혹시, 차원이동기를 다시 작동시킬 수 있나?”

[그것은…… 저로서도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약간은 실망 섞인 내 물음에 가야가 차원이동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차원이동기 쪽으로 손을 뻗자,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도면 같은 것들이 수십 개 펼쳐졌다.

[차원이동기는 진천의 천재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 것입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는 차원이동기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지만, 고장 난 것을 고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럼, 최상급 마석으로 차원이동기를 가동할 수는 있는데 고치지 못한다는 건가?”

[예.]

가야의 답에 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난번처럼 무작위로 떨어뜨리는 것도 안 되나?”

이제 진천인의 세상에 관해 조금은 알았으니, 무작위로 떨어진다 한들 괜찮을 듯했다.

가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원이동이 가능한 것은 단 한 번이었습니다. 다시 사용하려면 수리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수리가 가능하지?”

나는 차원이동기를 꼭 고치고 싶었다. 마석도 마석이지만, 한 번 가보았던 진천인들의 세상은…….

왕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천의 세상은 왕의 피가 있어야지만 작동되는 중요한 문명장치들이 있다고 들었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들만이라도 고쳐주고 싶어.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명령과 다름없는 내 말에 가야의 눈동자 속에 수많은 도면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내 말을 따르기 위해 수많을 가능성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알 수 없는 글자들과 숫자가 그녀의 눈만이 아니라 빈 공간에서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수천 번.

차원이동기의 도면을 면밀하게 검토한 가야의 눈이 과열된 나머지 붉은빛을 띠었다.

한참 후, 가야가 입을 열었다.

[차원이동기를 고칠 가능성은 삼 할입니다.]

[삼 할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최상급 마석을 쓰셔야 합니다.]

[그래도 차원이동기를 고치시겠습니까?]

삼 할의 가능성에 왕가의 보물 창고에 있던 최상급 마석을 써야 한다.

‘앞으로 최상급 마석을 구할 수는 없을 텐데.’

고민은 잠깐이었다.

“차원이동기를 고칠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어차피 이쪽 세계에서 최상급 마석이 필요한 일은 거의 없다.

진천의 세계는 최상급의 마석이 보물로 분류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답하자마자 바로 최상급 마석을 차원 이동기 하단의 둥그런 부분에 마석을 끼워 넣었다.

우웅.

아까 내가 차원이동기를 썼을 때와는 달리 공명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야는 공명음이 나는 차원이동기의 기계 판을 빠르게 두드렸고, 잠시 후 하단 부분에서 검은 석판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왕의 피를 확인하는 장치입니다.]

[진천의 중요한 모든 기술의 중심에는 왕의 마력을 담은 피가 필요합니다.]

검은 석판을 보자, 검은 판 위로 금빛의 기묘한 글자와 도식이 원을 그리며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원의 중심에는 작은 홈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곳에 왕의 피를 넣으면 될듯했다.

‘왕의 피가 필요하다는 게 이런 방식이었구나.’

나는 손가락 끝을 까득 깨물었다.

금강화가 진행된 내 몸은 어지간한 칼로도 상처를 내기 힘들었기에 꽤 세게 물었음에도 피는 많이 나오지 않았다.

똑.

한 방울의 피가 검은 석판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스슷.

금색의 문양은 피와 닿자 빛을 내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살아 움직이듯 일렁였다.

가야는 내 피에 반응하는 검은 석판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시 차원이동기의 하단 부분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더욱 강하게 공명하는 차원이동기에는 주변에 푸른 기운들이 몰려들었다.

차원이동기의 거울처럼 비치는 부분에 글씨가 차례대로 떠올랐다.

[진천의 왕을 확인합니다.]

[피에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피의 순도를 다시 검증합니다.]

피의 순도를 검증한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백 년이나 이곳 사람들과 섞였는데 괜찮을까?’

잠시 뒤, 차원이동기에 결과를 알리는 글자가 생성되었다.

[피의 순도 72.]

[70이 넘었으므로 진천의 왕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확인되었다는 글자와 함께 차원이동기는 더욱 강렬하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후우웅─

겨우 왕의 피임이 증명되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야에게 물었다.

“이제 된 건가?”

[아직입니다.]

가야는 차원이동기를 보며 말했다.

[차원이동기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진천의 시간으로 열흘이 소요됩니다.]

[이곳의 시간과 열 배가 차이나니, 둘을 잇기 위해서는 진천의 시간에 맞춰 백 일이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차원이동기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백 일이 지나야 알 수 있겠네?”

[그렇습니다.]

나는 푸른빛의 기운이 몰려들고 있는 차원이동기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가동만 되면 돼.’

백일 뒤에 차원이동기가 제발 고쳐져 있길 바랐다.

그리고 조금 지쳐있는 듯한 가야에게 물었다.

“왜 중요한 시설마다 왕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의 피가 있어야지만 시설물이 가동되도록 만든 이유가 뭘까.

그냥 가동되게 만들었다면, 진천인들이 지금보다는 편하게 살았을 텐데.

내 물음에 가야가 미소 지었다.

[차원이동기나 진천에 있는 중요한 시설물은 모두 왕가의 사비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많은 시설물이 모두 왕가의 돈으로 만든 것이라고?”

[예. 처음에는 몇 개 없었으나, 오랜 시간 누적되면서 많아진 것입니다.]

[왕가의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시설물에 강력한 마력을 담은 피를 넣어 시설들을 작동시켰습니다.]

[왕이 진천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킨 것이죠.]

처음에 진천인들을 위해 만들던 시설물에는 왕의 피가 꼭 필요했었다.

시간이 지나 기술력이 좋아져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어느새 왕의 피는 왕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왕의 피는, 강력한 통제 수단이자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권력 유지용으로 사용된 왕의 피.

이로써 진천인들은 왕족에게 무한한 감사를 품게 되고 왕이 없이는 그들의 삶을 영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둑조차 왕가를 위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들은 신에게 왕들이 멸족되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희망을 갖기를 원했다.

진천인들에게 진천의 왕은 하나의 생명줄이란 인식이 강하게 박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진천의 ‘피’를 강조한 이유가 있었네.”

절벽에 떨어졌을 때부터 어찌나 진천의 피를 강조하던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그런데 가야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만했다.

살아있는 왕족의 피가 있어야만 굴러가는 나라라니. ‘피’에 집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왕가에서 만든 시설물은 모두 몇 개지?”

[도합 삼백육십칠 개입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남은 것은 백 개 정도밖에 안 될 것입니다.]

백 개라.

적지 않은 수였다.

그러나 한 방울만 있어도 작동되는 차원이동기를 보건대, 백 방울의 피 정도는 흘릴 가치가 있었다.

[왕의 피는 열흘이 지나면 사용하지 못합니다. 보통은 가신들이 왕의 피를 가지고 왕의 위대함을 강조하며 시설물을 가동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시설물을 가동시키는 데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설물들은 모두 왕가의 것으로, 진천의 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힘과 돈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왕가의 호의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들이 잊을 만하면, 피로써 그 가치를 증명해 냈다.

진천인들은 자신을 위해 돈과 피를 아낌없이 주는 왕을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쓸데없이 전쟁을 일으켜서는.’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신과의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계속 존경받는 왕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강력해진 힘과 기술, 권력은 왕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전쟁에 패한 후유증은 진천인들의 삶을 망가뜨렸고 왕가 역시 다른 세계에서 하나씩 죽음을 맞이했다.

그 결과로 마지막 남은 왕족은 나 하나.

오직 나만이 진천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낫게 할 수 있었다.

‘사실을 안 이상, 진천인들이 최소한의 문명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다.’

왕가의 창고에 하급 사도 하나만을 둔 신들의 행태를 보건대, 그렇게 해준다 해도 신들이 방해할 것 같진 않았다.

자신들의 권위나 힘만 넘보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용납해 주는 듯했으니까.

‘관심이 없어서겠지.’

그들이 벌레처럼 느끼는 진천인들의 삶에 큰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해서라도 진천인의 삶이 나아진다면…….

나로서는 내 할 일을 한 셈이었다.

‘이왕이면 내 피가 없이도 시설물들이 굴러가게 만들면 좋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차원이동기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했다.

“잘되길 바라는 수밖에.”

차원 이동기를 보며 중얼거리자, 가야가 기원하듯 말했다.

[왕께서 원하시니 이뤄질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들의 왕이 아니야.”

내 답에 가야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진천인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순간부터.]

가야에게서 나직하지만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이미 진천의 왕입니다.]

* * *

비고에서 나왔음에도 밖은 아직 오후였다.

진천의 세계에서 꽤 많은 시간이 보냈음에도 이곳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비고만 갔다 오면 다른 세계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진천의 세계에 다녀오긴 했지만, 비고는 꿈속의 공간 같았다.

가야는 빛으로 이루어진 모습이기에 비고 속에서나 여인의 모습으로 있지 밖에서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그것도 내 귀에만 말이다.

‘비고에 다녀오면 기분이 묘해지는 건 가야 탓도 있어.’

그녀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인 인물이다 보니, 더욱 꿈같았다.

게다가 왕이라니.

‘선조들이 도망만 가지 않았어도 진천인들에게 덜 부끄러웠을 텐데.’

아무리 진천인들이 희망 삼아 왕을 기다린다지만, 내 입장은 달랐다.

“싸우다가 죽더라도 진천의 세계에서 도망치지 말아야 했어.”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질 전쟁 따윈 하지 말던가.

도망친 왕가의 후손이랍시고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들에게는 이런 나라도 있는 게 낫긴 하겠지만.’

진천인들을 생각하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사도 놈이 그렇게까지 진천인들을 벌레 취급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감정 따윈 들지 않았을 텐데.

선조가 일으킨 전쟁이 마치 내 탓이 된 양, 느끼지 않아도 될 죄책감이 내 심장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시설물들이 내 피가 없어도 잘 돌아가도록 꼭 고쳐야지.”

그렇게만 한다면 이 알 수 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 정도가 최선을 다한 것이니 말이다.

‘몰랐으면 모를까, 그들의 실상을 안 이상 외면할 수는 없잖아.’

진천인들에 관한 생각이 정리되자, 이제는 이곳의 산적한 일들이 떠올랐다.

진천의 세계에 관련된 일은 어차피 백일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의 현실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새롭게 단장한 전각이며 건물들이 보였다.

진천세가(進天世家).

진천세가를 보자 정신이 들면서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래,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하는 거야.”

속으로 결심을 한 뒤, 발걸음을 옮기는데 허공에 무언가가 맴도는 것이 보였다.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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