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34화
신은 사도와 확연히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도의 은빛 머리칼이 사방으로 넘실거렸고, 눈에는 절대자가 지닌 거만함이 서려 있었다.
어지간해서 겁을 먹지 않는 나조차도 신의 기세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였다.
‘하급 신이 이 정도라고?’
사도가 말했던 아흔아홉 번째 신이 이 정도라면, 상위의 신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신이 강림한 은발의 사내를 보는 사이,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내 사도를 죽였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지하를 가득 울렸다. 차가운 냉기를 품은 신의 목소리에 등 뒤에 소름이 쭉 돋았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죽였다.”
내 대답에 작은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내장을 진탕 시키는 웃음소리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 퍼런빛을 흘려대는 신의 눈이 나를 훑었다.
[네가 입은 천갑은 원래 우리들의 것. 신들을 적대하면서 신의 힘을 쓰고 있다니. 우습구나.]
그러나 비웃는 말과 달리 신은 내가 입은 천갑을 보며 탐욕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그것이 누구의 천갑인 줄 아느냐?]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오며 눈에서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강렬한 신의 기세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자, 신이 손가락을 천천히 뻗었다.
[이 천갑은 반역자의 것이다.]
신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너무 강했던 나머지 일족의 왕좌를 꿈꾸던 자의 것이었지.]
[마치, 주제를 모르고 우리에게 덤볐던 너희처럼 말이야.]
내 가슴팍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신의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사도의 얼굴을 한 신의 입술이 찢어질 듯 올라갔다.
[죽어라.]
[그리고 너의 천갑은 나의 소유가 될지니.]
이십 년 전에는 신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반역자의 천갑을 놓쳤다.
그런데 스스로 들어올 줄이야.
기쁘다 못해 일그러져 보이기까지 하는 신의 표정은 기괴했다.
[너로 인해 나는 하급 신에서 벗어나게 되겠구나.]
기대로 가득 찬 신의 손가락이 천갑에 닿았다.
“크윽!”
붉어진 손가락이 닿은 천갑의 부분이 불에 덴 듯 뜨거웠으나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진짜 신의 힘이라는 듯, 가짜는 신에게 대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처럼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역시, 신이라는 건가.’
인세에서 천갑의 힘을 가진 나는 무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천갑을 지녔음에도 너무 쉽게 신에게 목숨줄을 내주고 있었다.
용암처럼 타오르는 그의 손가락으로 인해 천갑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뜨겁다.’
천갑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하려고 신이 택한 것은 천갑의 안에 있는 나를 그대로 태워 죽이는 것.
그러나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내가 처음 온 지하였으니까.
건물의 천장을 삼 층부터 지하까지 무너뜨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점점 뜨거워지는 천갑 안에서 더운 숨을 몰아내며 신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나를 죽일 수 없어.”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의 눈이 뱀처럼 가느다랗게 휘었다.
[그럴 리가.]
“너희들은 항상 우리를 무시하지. 하지만…… 그거 알아?”
천갑 안의 뜨거움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있었다.
만약 진천기공 육 성, 금강화를 이루지 않았다면 내 몸은 진작 타버릴 정도였다.
가쁜 숨을 몰아치며 아까부터 계속 붉은 빛을 반짝이는 손목을 보았다.
“우리는 너희보다─”
동시에 손목에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글씨가 떴다.
[귀환 시작.]
드디어, 귀환의 순간이 되었다.
나는 놈을 향해 더없이 밝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머리가 더 좋거든.”
[……뭐?]
내 몸은 귀환을 위해 분자화되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나를 보며 놈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흩어지는 나를 행해 놈이 잡으려는 듯 손을 급히 뻗었다.
[안 돼─!]
손을 휘젓는 놈을 향해 젖먹던 힘을 다해 한쪽 주먹을 말아 올렸다.
“과거를 먹고 사는 네놈들에게 미래는 없어. XX아.”
신에게 욕설을 날리자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다 없애 버리겠다!]
분노한 신이 천갑이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붉은빛을 터뜨렸다.
멸절(滅?)의 격(環)!
폭발력만큼은 중급 신에 버금갈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콰콰쾅!
그러나 내 몸은 귀환이 이미 시작되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빛의 입자로 변한 나를 신이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신은 나를 잡긴커녕, 먼지만 뒤집어썼을 뿐.
[내가 당하다니…….]
[말도 안 돼!]
신은 사라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어쩌지 못하자,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분노로 가득 찬 신의 괴성을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는 검게 물들었다.
* * *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가야의 음성이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난 눈을 뜨고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진천인들의 세계에 다녀온 일은 꿈만 같았다.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다.’
마지막에 예상치 못했던 신 때문에 죽을 뻔한 위험을 겪었으나, 다행히 원래 있던 곳으로 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익숙한 공기의 내음이 맡아졌다.
“진짜로 왔구나.”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가 살아서인지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
마지막에 신이 괴성을 지르던 것을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웃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무척 염려스러운 표정을 한 가야의 얼굴이 보였다.
하긴, 멍해 있다가 갑자기 웃으니 이상해 보였겠지.
나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가야에게 말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지금은 괜찮아.”
괜찮다는 내 답에 가야는 미소 지었다.
[일단 진천의 의료기술로 화상을 치유하긴 했습니다만…… 혹시라도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알았어.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내 대답에 가야가 알겠다는 듯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진천의 의술은 끝내주네.’
신의 악독함으로 인해 천갑 안에서 불타 죽을 뻔했던 나를 멀쩡한 상태로 되돌려 놓다니.
감탄이 나오는 의술이었다.
진천유화의 비고에 가득한 재물이 이해가 될 만큼 말이다.
‘진천기공 육 성이 되지 않았더라면 귀환하기도 전에 죽었겠지.’
신이란 놈에게 한 방 먹일 때만 해도 피부가 녹을 정도로 흐물거렸는데…….
나는 전과 같은 내 몸을 보며 진천의 의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런 진천의 의술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들의 세계를 생각 나게 만들었다.
‘거만하다 못해 진천인들을 벌레 취급하는 사도 놈과 진천의 신들.’
놈들을 생각하자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왕족들이 가신과 다른 세계로 탈출한 이후, 남아 있는 진천인들은 힘든 날들을 보내는 듯했다.
마석을 훔쳤던 도둑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일반 진천인들이 무슨 잘못으로 그런 취급을 당한단 말인가.
많은 것을 보고 듣지 않았음에도 왕족의 마지막 후손인 내 피를 들끓게 만들기 충분했던 모습이었다.
“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단 한 번의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의 일은 내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빌어먹을 신들 같으니.’
신들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만, 인간은 약한 것을 알기에 늘 발전하고 놀라운 결과를 이뤄냈다.
진천인들 또한 그 결과로 이런 놀라운 의료기술을 만들어 낸 것일 테다.
‘너무 기술이 좋아진 나머지, 신들처럼 과신한 게 문제였어.’
그 원인은 바로 내가 입었던 천갑이었다.
기술력이 발전할 대로 발전한 진천인들이 천갑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천재적인 과학자는 천갑을 따라 한 기갑을 만들어 냈고,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이 천갑이 반역자의 것이라 했지.’
내가 얻은 천갑이 신의 왕좌를 꿈꾸는 반역자가 입은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리고 이것이 하급 신마저 욕심낼 정도의 강력한 천갑이었다니.
새삼 내가 가진 천갑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반역자의 천갑이 진천인의 세상에 갑자기 떨어졌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기술력이 최고로 발전한 진천인이었다.
그런 진천인의 세상에 반역자의 천갑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개가 웃을 일이지.’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내가 뭘 어쩌겠는가?
진천의 세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진천유화의 차원이동기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잠깐.’
나는 머릿속에 이번 일의 목적이었던 마석을 떠올렸다.
“가야, 내가 가져온 흰 가방이 어디에 있지?”
내 물음에 가야가 손짓하자, 내 앞으로 흰 가방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가방은 여기 있습니다.]
가야는 빛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물리력은 없고 대신 마력을 이용해 지금처럼 물건들을 움직이곤 했다. 아직 가방을 열어보지 않은 듯 그녀는 가방 안이 궁금한 듯 바라보았다.
가방을 열자, 사도와의 싸움 이후 챙겨 두었던 마석이 보였다.
최상급 마석과 상급 마석 세 개.
그녀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급 마석은 힘들지만 구할 수는 있는 마석입니다. 하지만 최상급 마석은 재물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것인데, 어떻게 구하신 것입니까?]
가야가 보기에 최상급 마석은 마치, 왕가의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설마, 왕가의 창고에 떨어지셨는지요?]
가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떨어진 곳은 빈 의원 건물이었어. 그곳에 온 도둑놈들의 물건을 내가 가지고 온 거야.”
[왕가의 창고를 턴 도둑들의 물건을 발견하시다니. 운이 좋으셨군요.]
“글쎄.”
나는 말을 아꼈다.
단순하게 마석만을 본다면 운이 좋을 수도 있으나, 덕분에 사도의 추적을 받아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상급 마석이 있으니 가신들의 기갑을 움직일 수 있겠지?”
[예. 상급 마석만 있으면 가신들의 기갑을 주인께서 쓰실 수도 있으며, 원하신다면 가신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가신에게 줄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야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실제로 내가 가신으로 삼은 인간은 둘이다.
흑영과 신의.
신의야 의원이니 굳이 기갑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흑영은 달랐다.
‘하지만 아직은 일러.’
나와 계약한 가신의 수가 아직은 둘밖에 없기에 좀 더 두고 봐야 했다.
‘이왕이면 장군급으로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가신의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상대가 내게 진심으로 탄복을 하고, 내 밑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아직 내 곁에는 장군급의 가신은 없지 않은가.
‘……당무?’
생각과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당무와 기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상급 마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다른 가신이 생기기 전까지 그냥 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우선 가신들의 기갑에 상급 마석을 연결하기만 해줘.”
[알겠습니다. 그럼 최상급 마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상급 마석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상급 마석으로 기갑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상급 마석의 쓰임새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가슴에 박혀 천갑의 동력으로 쓰이는 최상급 마석이 있긴 하지만 이건 극히 예외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가야는 내 질문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