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32화
도둑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최상급 마석이 있다고?’
내가 듣는 줄도 모른 채, 도둑들은 신이 나서 마석을 훔친 일들에 대해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왕가의 창고를 땅굴을 파서 간다는 소리에 미친 줄 알았다니까?”
“크큭, 그런데 성공했잖아?”
“사도 한 놈만 왕가의 창고 앞을 지키니까 그런 거지. 두 놈이었으면 성공 못 했어.”
“에이, 신들이 우리를 얼마나 벌레 취급하는데 사도를 둘이나 쓰겠어?”
“우릴 벌레 취급하는 건 사도가 더 심해. 어찌나 고결한 척하는지.”
“무시하던 벌레에게 뒤통수 맞은 기분이 어떨까?”
“아주 열 받겠지.”
도둑들은 내가 있는 삼층에서 노숙하려는 듯 자리를 폈다.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서 그런가, 병원은 안 건드려 놨네.”
“여기 빼곤 아주 아작을 내놨잖아.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 병원이니까 여기로 온 거지.”
도둑들은 혀를 찼다.
“이십 년 전의 전쟁 이후로 우리의 문명은 쇠퇴했어.”
“쳇, 쇠퇴 정도가 아니야. 아예 아무것도 못 하고 살잖아. 이젠 끝난 거지.”
그들은 과거, 신에게 대항할 만큼 찬란했던 기술과 문명을 떠올리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왕만 있었어도 달랐을 텐데.”
누군가 중얼거리자, 도둑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도망간 왕 따윈 왜 찾아?”
“이곳의 문명 자체가 왕의 피가 있어야만 돌아가잖아. 뭘 하려고 해도 왕이 없으니 할 수가 있나.”
“차라리 도망간 게 나아. 그러면 희망이라도 있을 테니.”
“맞아. 괜히 여기 있다간 신에게 죽었을 거야.”
“그랬다면 재기는 꿈도 못 꿀 테지.”
도둑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도둑들이긴 하나, 그들도 진천인의 찬란한 문명들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천인들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십 년째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훔쳐 온 마석이나 보자.”
이번 일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듯한 도둑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품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냈다.
“자, 실컷 봐라.”
주머니를 열자 붉은색의 최상급 마석 하나와 푸른색의 상급 마석 세 개, 그리고 황금빛의 중급 마석 열 개가 보였다.
“오, 이게 얼마만의 마석이냐.”
“아주 눈이 부시는구나!”
“역시 왕가의 보물들은 다르네!”
다섯의 도둑들은 눈앞의 마석을 보며 탐욕에 가득 찬 눈을 빛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이 꺼낸 마석을 보며 속으로 놀라움을 삼키고 있었다.
‘최상급 마석이다!’
아버지가 목걸이의 형태로 가졌던 최상급 마석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강한 마력은 놈들이 훔쳐 온 마석이 꽤 순도 높은 고급 마석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걸 어떻게 가져가지?’
놈들이 마석들을 가져온 곳은 왕가의 보물창고다.
그리고 나는 진천의 마지막 핏줄.
즉, 놈들이 가져온 마석들은 원래 내 것이란 말이었다.
고민하다가 팔목에 위치한 장치를 보니 ‘一’자가 일곱 개로 변해 있었다.
‘세시진 반이나 남았으니 좀 더 저놈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넉넉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놈들에게서 마석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천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편하게 들을 수 없을 터였다.
가야조차 알 수 없는 진천의 세상에 대해 도둑들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스스로 뱉어내는 중이었다.
“젠장, 명색이 왕가의 보물창고인데 이것밖에 못 가져오다니. 아깝네.”
한 놈이 무척 아쉬워하는 투로 말을 꺼냈다.
“어쩔 수 없지. 보물 금고는 왕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 열려고 시도만 해도 다 날려 버리잖아.”
“금고 안에 대체 뭘 뒀길래 건들기만 해도 폭탄처럼 터져 버리냐?”
“신들이 왕가의 보물창고를 먼저 점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라고 하니 대단한 게 있기야 하겠지.”
그들은 신들과의 전쟁에 대해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는 듯 말했다.
‘왕가의 금고?’
최상급 마석만 해도 이곳에서 매우 구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최상급 마석조차 창고에 두는 사람들이 따로 금고에 보관할 만한 것이 대체 뭐가 있을까?
‘가야가 있다면 물어봤을 텐데.’
그녀가 없으니 아쉬웠다.
아쉬운 대로 손목에 있는 장치를 들여다보았지만, 장치는 어떤 정보도 보여주지 않았다.
‘진짜 기본적인 것들만 담았나 보네.’
아쉬움을 털어내고 도둑들의 말에 귀 기울이자, 내가 모르는 진천의 세계가 놈들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쟁 후의 피폐함.
그리고 원래부터 범죄자이긴 했지만, 이젠 거의 생계형으로 바뀌었다는 그들의 이야기부터 이번 일의 계획까지.
다섯 명이나 되는 그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의 휴식과 함께 들려오는 진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간은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데 신들이 가만 있을까?”
도둑 중 하나가 걱정스레 입을 열자, 옆에 있는 한 놈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신들은 우리에게 기만당하는 걸 제일 싫어하니 말이야.”
“걸리면 사도에게 잔인하게 죽게 생겼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 당장 다른 세계로 튀자고.”
우두머리가 곧 일어날 듯한 태세로 마석을 담은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그러자 남은 도둑들도 쉴 만큼 쉬었다는 듯 자리를 정리하는데, 지금껏 아무 말 없었던 놈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희생양이 필요한 거지.”
말 없던 놈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자 우두머리의 눈에 긴장감이 서렸다.
“……희생양? 그게 무슨 말이지?”
우두머리의 말에 놈이 비죽 웃으며 얇은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이긴. 네놈들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거지.”
“……!”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탓.
팽팽하게 차오르는 긴장감 속에서 도둑 둘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철컥.
그들의 손에는 길쭉한 쇠 모양의 무기가 앞에 있는 세 명을 향해 겨눠졌다.
“이 미친 새끼가!”
“당장 총 내리지 못해!”
우두머리와 함께 배신당한 자가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
반면, 배신자 둘은 무척 여유로운 음성으로 그들에게 대꾸했다.
“왜 총을 내려야 하지?”
“너희를 죽이면 마석도 더 가지고 추적도 피할 수 있는데 말이야.”
배신한 두 명의 총구가 세 명의 머리로 향했다.
“잘 가라.”
“안 돼……!”
살려달라고 애원할 틈도 없이 건물 안은 커다란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
우두머리를 포함한 도둑 셋의 머리가 순식간에 터져 버렸다.
대충 쏜 듯했는데도 도둑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총에 의해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강하다!’
총이란 것을 처음 본 나는 침음을 삼켰다.
도둑들을 처음 봤을 땐, 무공을 익히지 않아 보여 쉽게 생각했건만 총이란 무기를 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듯했다.
‘완전 개방화가 돼도 쉽지 않겠는데?’
강력한 천갑과 방패는 총이란 물건에 견디긴 할 테지만, 다섯이서 총을 쏴댄다면 나 역시 피해를 입을 터였다.
죽은 세 명의 도둑을 보고 있는데, 이번엔 배신자 둘이 서로를 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로를 배신하는 건가?’
짐작대로 둘은 서로를 겨눈 총구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두 놈 중 왼쪽에 있는 놈이 입꼬리를 올리며 오른쪽의 놈에게 말했다.
“어이, 이제 세 놈을 처리했으니 총을 내리시지?”
그러자 오른쪽의 놈이 피식 웃으며 왼쪽 놈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먼저 총을 내리지 그래?”
둘은 서로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말할 뿐 자신의 총은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크큭,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왼쪽 놈의 총구가 오른쪽 놈에게 향했다.
“역시 네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오른쪽 놈 또한 왼쪽 놈에게 총구를 겨누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믿나? 내가 처음부터 믿은 건 마석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죽는 상황.
시간이 흐르고 가야가 준 장치의 ‘一’은 한 개만이 남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반 시진.’
벌써 한 시진이 지나 버린 것이다.
놈들이 가진 총이 위협적이긴 했으나, 완전 개방만 된다면 두 놈 정도는 충분히 이길 만했다.
‘더는 시간을 버릴 수 없다.’
상황을 봐서 도둑 두 놈을 제압하려는데, 갑자기 도둑놈들에게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 삐이!
도둑들은 경보 소리를 듣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버, 벌써 신의 사도가 오다니!”
“제기랄!”
오른쪽 도둑이 소리쳤다.
“내가 최상급을 가져갈 테니, 네놈이 상급 세 개를 가져가!”
급박한 와중에 놈들은 서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원래대로 마석을 갈랐다.
재빨리 마석을 주머니에 넣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는데, 굉음이 울렸다.
쿠아아!
천정이 무너지며, 굉음과 함께 나타난 존재는 신을 따르는 존재인 사도였다.
새하얀 천갑을 입은 사도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도망치려 하는 도둑을 양손에 낚아챘다.
휘익.
일반인들이라면 보이지 않은 정도의 빠르기였다.
“으윽!”
“사, 살려줘!”
사도에게 잡혀 허리가 부러지기 일보 직전인 도둑들이 고통 속에 소리를 질러댔다.
[……벌레 같은 놈들이 감히. 신의 물건을 욕심내?]
왼쪽에 있던 도둑이 죽음을 각오한 듯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크윽, 신의 물건? 그게 왜 신의 것이냐?”
도둑은 어차피 죽을 바에야 사도에게 조금이나마 대항하려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마석은 우리 진천인의 것이다!”
[진천인의 것이라고?]
사도가 비웃었다.
[신들을 흉내 내다가 전쟁에서 패한 것들이 어떻게 소유를 주장하는 거지? 마석은 전쟁에서 이긴 신의 소유다. 너희 같은 벌레가 아니라.]
“그럼 너희는 왜 벌레 따위의 것을 가지려 하는 거지? 그토록 잘났으면 너희의 원래 고향인 하늘에서나 살면 될 것 아닌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소리를 질러대던 도둑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으어억!”
사도가 한 손으로 도둑의 허리를 꺾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콰직.
사도의 손에서 두 동강이 난 도둑이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으…….”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남은 도둑의 바지에서 노란 물이 흘러내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는 지문이 닳도록 두 손을 비비며 사도에게 자비를 구했다.
[더러운 벌레 새끼 같으니.]
사도는 도둑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컥!”
강하게 내리친 바람에 도둑의 뼈의 마디마디가 부서져 고통스러워하자, 사도가 커다란 발을 들어 올렸다.
[벌레들은 짓밟아줘야 제 맛이지.]
쿠웅.
사도의 하얀색 발 위로 붉은 피들이 비산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도의 발에 깔려 죽은 도둑의 시체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도둑이 죽자, 사도라 불린 이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촤르르.
하얀 견갑들은 마치 커다란 비늘이 몸에 들어가는 것처럼 남자에게 삽시간에 스며들었다.
“쯧.”
하얀 천갑이 사라지자 드러난 남자의 모습은 은발을 지닌 젊은 사내였다.
“더러운 게 묻어버렸군.”
그는 이마를 찡그린 채 손수건으로 대충 묻은 피를 닦고는 죽어버린 도둑의 몸 위로 손을 올렸다.
스슷.
그러자 신기하게도 도둑들이 훔쳤던 마석이 떠오르더니, 손 안에 안착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마석이 괜찮은지 한번 살펴보았다.
“마석에 추적 장치가 달린 것도 모르고 신의 물건을 훔쳐? 모자란 것들 같으니.”
은발의 아름다운 사내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마석을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은 후, 자신의 흰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컥!”
갑자기 그의 왼쪽 배 부근에서 피가 번져 나왔다.
피가 번지는 중앙에 삐죽 솟아난 것은 검(劍).
“너, 너는!”
은발의 사내는 자신의 왼쪽 배를 감싸 안으며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