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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28화 (128/200)

기갑무림 128화

내가 가진 천갑(天鉀)이 사실은 신들의 것이라는 사실에 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갑이, 신이 입었던 것이라고?”

아연한 기색을 한 내 물음에 가야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가신들의 것들과 내 것이 많이 다르다고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단지 보물급 정도의 천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신들이 입었던 천갑이라니!

언뜻 황망함까지 느껴지는 내 표정에 가야가 다시 한번 답했다.

[주인님께서 입으신 천갑은 진짜 신이 입었던 갑옷이 맞습니다.]

“……그렇다 쳐도, 천갑과 네가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설명이 더 필요한 듯한 내 물음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어느 날, 천상에 사는 신 하나가 실수로 자신의 갑옷인 천갑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천갑을 얻게 된 진천의 왕은 신의 갑옷을 보고 경탄을 하다가, 가신들에게 천갑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 오라 지시했죠.]

[저는 본래, 천갑의 사용방법을 연구하던 가신들에 의해 심어진 인공지능이었습니다.]

나는 진천인들의 기술이 워낙 발전해서 진화하는 기갑인 천갑을 만들어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신들의 천갑에 사용방법을 추가한 인공지능을 심은 것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가야는 설명을 이었다.

[원래의 저는 하찮은 인공지능 중 하나였으나, 주인님의 동화율이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자 천갑이 본래의 주인인 ‘신’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의 힘을 지닌 천갑에 녹아든 저 역시, 그 힘으로 인해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야의 설명을 듣는 내 입에서 당혹스러운 탄성이 내뱉어 졌다.

하기야, 일반인들의 동화율을 훨씬 넘는 나를 천갑은 신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신의 육체’를 타고났다고 하니 어쩌면 아주 약한 신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가신의 비고에서 보았던 천갑들은 뭐지?”

[제 창조자는 신들이 실수로 떨어뜨린 천갑을 본떠서 가짜 천갑들, 즉 기갑을 만들었지요.]

가야의 설명에 따르면 천갑은 진짜 신이 입었던 갑옷이고, 기갑은 진천인이 천갑을 본떠 만든 것이란 말이었다.

[진천인들은 엄청난 수의 기갑을 만들었습니다. 진천인들보다 기갑의 수가 더 많을 정도였으니까요.]

[여러 종류의 기갑은 진천인들의 삶을 편하고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공간마저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좋은 진천인은 천갑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기갑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냈을 것이다.

[가신의 비고에서 본 것은 천갑을 참고 삼아 만든 기갑들로써, 전쟁에 특화된 기갑입니다.]

[전투 기갑으로 진천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강력한 기갑 군대는 그들의 자랑이었으며, 힘의 상징이었죠.]

그럴 만했다.

비록 천갑이 아닌 기갑이라 할지라도 그 힘은 매우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졌음에도 얼마 안 되는 진천인들을 이끌고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많은 기갑을 가졌다면 진천인들의 힘은 매우 강했을 텐데, 왜 이 세계로 넘어 온 거지?”

늘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가야가 답을 해주지 않았기에 몰랐었던 의문들.

새로운 자아를 지니게 된 가야는 내 질문에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강한 힘은, 오히려 큰 화를 불러왔습니다.]

[진천인들은 자신들의 강력한 힘에 취한 나머지 진짜 신들에게 싸움을 걸고 말았습니다.]

……뭐?

신들에게 싸움을 걸어?

일견 믿지 못할 이야기이나, 신들의 갑옷인 천갑을 흉내 낸 기갑들이 그토록 많았다면 진천인들의 마음속에 오만함이 싹 텄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갑을 쓰다 보니 진짜 천갑들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수의 기갑이라면 충분히 신을 상대할 수 있으리란 오만이 진천인들에겐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가신의 비고에서 본 기갑들은 분명 내가 가진 천갑에 비해 질은 떨어질지 몰라도 충분히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처음엔, 진천인들의 힘에 신들 또한 놀랐습니다.]

[천갑을 흉내 낸 기갑들은 생각보다 강했으니까요. 그러나, 곧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가야가 손으로 앞을 가리키자, 그녀의 손끝에서 빛이 나오더니 빈 공간의 벽면에 거대한 장면들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신과 진천인의 싸움입니다.]

“……!”

빈 공간의 벽면을 가득 채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보이는 수천의 기갑들이었다.

‘이게 일부라면, 더 많은 기갑이 있었겠지.’

기갑을 지닌 인간과, 신의 싸움.

믿기지 않는 이 싸움 속에서 실제로 수천의 기갑들이 천갑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와아아-

내게 보이는 것은 그 당시의 장면일 뿐인데도 그들이 부르짖는 함성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빛나는 기갑들의 향연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신들을 향해 쏟아졌다.

‘저러니 신들과 대적할 생각을 한 것이겠지.’

일견 보기에는 개떼처럼 덤벼든 기갑들이 우세해 보였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콰르릉.

곧이어 천갑에서 나온 기파로 이루어진 해일이 기갑들 위로 넘실대더니, 일시에 쓸어버리고 만 것이다.

“……!”

그 거대하고도 웅장한 힘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천갑이 저렇게 강하다고?’

단지 천갑이 기파를 내뿜는 장면만을 봤음에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왔다.

이건 단지 신들이 입는 천갑 때문이 아니다.

저것은.

‘신들 본연의 힘이야!’

그들은 약해서 천갑을 입은 게 아니었다. 그저, 천갑은 그들이 입는 갑옷이었을 뿐이다.

[진짜 신의 힘을 진천인들은 과소평가했던 것입니다.]

[신들이 작정하고 진천인들을 멸하기 시작하자, 죽어나는 것은 진천인들이었습니다.]

가야의 손짓에 의해 장면이 바뀌었다.

성대했던 진천인들의 문명은 폐허가 되었고, 기갑들은 거의 전멸했다.

오만함으로 신에게 덤빈 대가는 처참했다.

팟.

얼마 남지 않은 진천인이 초라하게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끝이 났다.

[결국, 신과의 전쟁에서 패한 진천인들은 일부의 왕족과 가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발전된 기술로 신들의 눈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어쩌다가 얻은 신의 천갑으로 인해 진천인들이 하늘을 욕심내고, 그로 인해 진짜 신들과 전쟁을 치렀단 말이었다.

‘신과의 전쟁이…… 내가 입은 천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천갑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았다.

완전한 진천인도 아닌 내가, 신이 입었던 천갑을 입고 동화까지 되어 있다니.

놀라움과 혼돈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렇게 탈출한 곳이, 바로 주인님이 계신 이 세계입니다.]

“……하.”

당혹스러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당당하게 신들에게 싸움을 걸더니, 이곳까지 도망 온 꼴이었다.

“그럼 최소한 자손은 낳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니야?”

가야의 말을 듣다 보니 억울함이 울컥 솟아올랐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으로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가!

그게 다른 세계에서 온 선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열불이 뻗쳤다.

[그 이유는, 자휘 님에게 있습니다.]

T3T

“뭐?”

난 당황한 어투로 되물었다.

“진천인들이 이곳에 온 지가 벌써 이백 년 전인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말도 안 된다는 내 표정에 가야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진천인들은 신들과의 전쟁에서 지고 난 후 복수심에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야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강렬한 푸른빛이 반짝였다.

[진천인과 인간의 피가 섞이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신의 육체’를 지닌 인간이 태어나리라는 것을요.]

* * *

가야의 설명은 놀라웠고, 동시에 내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남은 비고를 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비고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내가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었으니까.

가야 또한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하아.”

밖으로 나왔음에도 가슴속에 있는 답답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가장에 온 이유는 혈신의 힘을 받은 사도를 견제하고, 진천유화의 비고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했던 것들 이상을 이곳에서 보고 듣고야 말았다.

‘배신자의 존재부터, 가신들의 기갑. 그리고 선조들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까지.’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자 터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기분이 더러웠던 이유는 ‘신의 육체’인 나를 만들기 위해 이백 년간 진천세가인들이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갔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의 육체를 가진 내가 가장 고통받긴 했지만, 인간의 피를 이은 선조들 중 단명 안 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많은 선조의 생명을 대가로 태어난 하나의 실험체였다.

“젠장.”

욕이 튀어나왔다.

“다 좋다 이거야, 내가 실험의 결과고 실험이 성공했다고 쳐. 하지만 그럼 뭘 해?”

나는 진천의 마지막 피였다.

홀로 뭘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진천인들이 복수심을 불태웠던 신들에게 난 아무 감정이 없었다.

복수 따윈 할 생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이쪽 세계도 아닌 다른 세계의 신과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바라는 것은 날 태어나게 한 진천인들의 복수가 아니라, 이곳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천갑을 얻었고, 혈천교와 싸웠을 뿐인데.

신들과의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 나라니.

‘아니야, 오히려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편이 나아.’

만약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신과의 전투를 들먹이며 나를 부추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야는 내 명령을 듣기라도 하지, 부모 같은 이들이 나에게 강요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되었을 터였다.

“그냥 이대로 살면 돼.”

혈천교 놈들의 위험을 제거하고, 주변인들을 지키면서 말이다.

복잡한 생각들을 한쪽에 밀어 넣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 붉은 노을이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나는 이곳 사람이야.”

신의 육체건, 뭐건 간에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발붙이고 있는 이곳 역시, 믿기 힘든 진천인들의 역사보다 가치가 있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가야의 말이 진실일지라도, 진천인의 세상으로 가지 않는 이상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지, 그들의 이야기는 내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쓰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천갑의 힘과 내 선조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나는 새롭게 단장한 진가장의 지붕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이곳 사람들이야.’

믿기지 않는 진천인들의 이야기보다 당장 얼굴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진천인들의 이야기를 털어내고는 진가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가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전내음과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말입니돠, 진짜 비싼 술이거등요?”

당무의 혀 꼬인 소리를 들어보건대 지금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허! 감히 주공님의 돈으로 그런 비싼 술을 산 것인가?”

“에이, 설마요.”

타박하는 사람은 흑영인 듯했다.

그런데 흑영도 술은 취하지 않았으니 약간 기분이 올라간 듯 느껴졌다.

“흐흐, 이건 무림맹에서 얻은 술이라는 거죠.”

“……무림맹이요? 거기서 이런 술도 주나요?”

고영이 묻자, 당무가 젠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는 안 되지이! 그런데 내가 누구와 함께 왔냐, 이거야!”

“그거야, 우리 주공님이죠!”

“맞아! 바로, 그 유명한 천갑무신의 후인이자 정도무림을 구한 분이란 말이쥐.”

“아하, 그래서 돈을 마음껏 쓰게 한 거군요.”

“크흠. 우리 주공님이라면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지.”

“으흐흐.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러니 이런 비싼 술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야. 자, 한잔 받으시오.”

이어지는 쫄쫄거리는 술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웅다웅할 줄 알았는데.’

술 한 잔에 이미 친해지고 있는 저들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자 마음 한 구석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마치, 어지러운 꿈속에 있다가 이제야 깨어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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