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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22화 (122/200)

기갑무림 122화

그녀가 많은 재물을 두었음에도 아무도 발견 못 할 곳이 있다면, 하나밖에 없었다.

절벽 밑의 비고(?庫).

‘그곳이라면 진천의 피를 가진 사람을 빼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백 년 전 급작스럽게 가문을 지우면서 돈을 써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물들을 추적하면 숨겨진 진천세가가 드러나 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또한 진천유화라는 사람 자체가 인세의 재물과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니 그냥 모아만 뒀을 가능성이 컸다.

‘완전 돈벼락이네.’

상상하기 어려운 재물들이 비고에 있다고 생각하자 어서 빨리 일어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생각나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하군요.”

“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재물들을 발견한다 한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그의 앞에서 예의상 한 말이었다.

재물들 중 일부만 무림을 위해 쓰고, 대부분은 나와 진가장을 위해 쓸 생각이었지만 내속을 모르는 신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마음이 넓으신 후인님이시군요!”

감탄한 신의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 얼마나 마음 넓은 천갑무신의 후인이란 말인가.

“예전에도 아낌없이 베푸셨던 진천세가의 후인님답습니다.”

진천유화가 돈을 받긴 했으나, 정말 주는 대로 받았다.

돈이 없는 이에겐 거의 무상으로 치료해 주다시피 하고, 그의 선조에게는 의술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의천문의 선조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진천인들 대신 부자들에게 돈을 더 받아내기도 했다.

‘나도 선조님들처럼 진천세가를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의의 마음속에 언뜻, 의천문을 연 선조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또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앞의 존재를 가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중간 등급의 가신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가신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진천의 피를 향한 조건 없는 충성심은 배가됩니다.]

[또한 앞의 인간은 진천의 ‘의원’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가야는 무슨 이유에선가 배신에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내게 충성할 것이란 뜻으로 봐도 되나?’

게다가 의원 자격 획득이라니?

그렇다면 의천문의 선조는 진천세가의 가신이 되어 의술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린 신의를 향해 물었다.

“목소리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시니 직접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신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지금 후인님께서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까?”

“네.”

내 답에 그의 눈이 번득였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이 목소리는 진천세가와 관련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입니다.”

“알다마다요!”

신의가 엎드리며 읍소했다.

“제 선조는 진천세가의 가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짐작대로 그의 선조는 진천세가의 가신이었다. 그러나 신의가 가신을 안다는 것은 의외였다.

“가신을 안단 말입니까?”

“예. 의천문을 만드신 선조께서 자신이 진천세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의술의 발전에 목숨을 걸 정도로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책 속에 숨겨진 기능들을 앎에도 그동안 보지 못해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그러나 ‘가신’이 되는 순간, 모든 봉인이 풀리게 된다.

가신이 되는 것은 그로서는 꿈에서도 바라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조금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하시는 말씀들은 무척 비밀스러운 것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한 건 아니겠지요?”

한결 서늘한 목소리에 그가 재빨리 답했다.

“이 사실들은 가주들만 아는 것입니다. 의천문의 단 한 명만이 들을 수 있는 비밀이며, 만약 이 비밀을 누설하거나 진천세가를 배반할 시 이 책은 사라집니다.”

진천세가를 배반하면 책이 사라진다니.

‘진천유화는 나름의 금제를 의천문의 사람들에게 주었구나.’

의천문의 사람이라면 목숨보다 끔찍하게 아끼는 이 책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아무 말 못 했을 테다.

“후인님께서 저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신이 되고픈 마음에 처음으로 후인님께 말한 것일 뿐,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한결 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가신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환희에 찬 신의의 몸에서 흰빛이 번쩍 빛났다.

전에 흑영에게서 나던 빛보다 훨씬 더 빛나는 빛이었다.

[가신 중 ‘의원’이 추가되었습니다.]

[진천의 의서를 볼 자격이 생성되었습니다.]

가신이 됨과 동시에 진천의 의서가 빛나는 것을 보며 신의는 황급히 책을 폈다.

“아아……!”

그러자 아까처럼 영상이 보였다.

이제는 자휘가 없어도 얼마든지 이 책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군이시어, 감사합니다!”

그는 주군으로 바뀐 호칭을 연발하며 벅찬 감정을 주체못하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었다.

“의천문의 6대 가주 이정철, 천갑무신의 후인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신의는 내게 군신의 예로 다시 한번 인사를 올렸다.

나는 그를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신이 되셨어도 굳이 제 곁에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연구는 계속하시되, 무림맹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주군님의 곁에 있는 편이…….”

“아닙니다. 그리고 호칭은 평소대로 해주십시오. 그게 더 편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주군님이신데. 흠, 하지만 주군님께서 불편하시다면 후인님으로 부르겠습니다.”

나는 극존대를 하는 신의에게 말을 낮추라고 했지만, 그는 결사반대했다.

어차피 무림을 구한 후인이니 이런 극존대 정도야 이해할 거라면서 말이다.

가신이 되어 계속 붙어 있으려는 그를 얼른 다른 후기지수를 치료하라며 등 떠밀어 내보냈다.

지금으로선 그가 내게 붙어 있다 한들, 큰 도움이 되진 않았으니까.

‘이로써 두 번째 가신을 얻었다.’

흑영이 첫 번째이긴 하나 하급 가신이다. 신의는 중급 가신이고.

아마도 능력에 따라 가신의 등급 차이가 나는듯했다.

“신의로 인해 많은 걸 알게 되었구나.”

진천유화의 숨겨진 보물부터, 의천문이 진천세가의 가신이 세운 문파였다는 것까지.

진천세가는 생각보다 더 끝내주는 곳이었다.

빨리 비고에 가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일이 정리되어야 갈 수 있겠지.’

당무에게 듣기로는 일단 후기지수들의 상처가 아무는 대로 무림맹에서 온 무인들을 두고 떠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다고 해서 나까지 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놈들이 다시오면 안 되니까.’

혈천교 놈들이 또다시 오게 된다면 실제로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어쩔 수 없지.”

혈천교가 있는 서장과 맞닿은 이곳에 내가 있어야만 놈들도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비고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나밖에 없으니 괜찮을 거야.’

비고 자체가 찾기 어려울뿐더러, 진천의 마지막 피인 나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니 재물은 안전할 터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돌려 혈천교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혈천교 놈들, 이번 일로 속 좀 타겠어.”

이번 전투로 인해 그들은 총사와 무려 여섯 개의 혈천대를 잃었다.

혈천대가 모두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백에 가까운 혈천대원이 죽었기에 그들로서도 큰 손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총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무엇일까.

‘그분이란 사람이 나처럼 인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가 적미륵을 만들고 혈천교에게 준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적미륵 자체가 인세에서는 만들 수 없는 기물.

‘그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몰라도 천갑무신의 힘을 가진 나와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하다면서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나?

‘분명 문제가 있는 거야.’

천갑무신의 힘을 얻은 나도 개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다. 인외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세에 적응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을 테다.

그리고 ‘그분’이란 존재가 나설 때는 나 또한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한번 맞붙어 보자고.”

이미 몇 번의 전투를 통해 천갑무신의 힘에 날로 익숙해지는 지금.

놈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 * *

혈천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붉은 비단이 깔린 대전을 사뿐거리며 걷은 신녀의 발걸음만이 가벼울 뿐.

침울한 얼굴로 높은 권좌에 앉아 있는 혈천교주와 양옆으로 늘어선 혈천대주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신녀, 교주님을 뵙사옵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신녀가 절을 하며 몸을 숙이자, 그제야 혈천교주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거라.”

“예.”

혈천교주는 오늘따라 꽤 미색이 돋보이는 신녀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알고 있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신녀의 되물음에 혈천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거야, 신녀인 네가 스스로 알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신녀니까 혼자서 알아보란 뜻이었다.

심기가 불편한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조차 해주기 싫은 듯 보였다.

신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는 눈을 한 번 껌뻑였다.

그러자 흰자위만이 드러나는 그녀의 눈이 보였다.

잠시 후,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대전 안을 울렸다.

“……모두가 죽었군요.”

“그렇다. 넌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느냐?”

교주의 말에 신녀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본디, 큰 물줄기만을 신녀는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물줄기는 지나가고 나서야 볼 수 있죠.”

“혈천대원 백이십과 총사가 작은 물줄기라.”

작은 물줄기라는 말에 교주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들이 작은 물줄기라고 치자. 앞으로의 큰 물줄기는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신녀가 다시금 눈을 껌벅였다. 그러자 되돌아오는 그녀의 눈.

신녀는 교주를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제 신력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대가라.”

교주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혈천교인들 몇이 커다란 금빛 그릇과 거대한 청동거울을 가져왔다.

“저 그릇 안에 있는 것은 가장 순수한 자들의 피다. 네 신력에 대한 제물로 알맞지 않나?”

교주는 신녀를 향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나는 신력을 쓸 때마다 제물을 요구하는 너보다는 총사가 내 옆에 있길 원했지.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너로구나.”

그의 말에 신녀가 황공하다는 듯 몸을 숙였다.

“이제라도 아심이 다행인 줄로 아옵니다.”

“큭. 그래,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보자꾸나.”

신녀는 교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붉은 피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는 사이, 다시금 신녀의 눈이 흰자위만이 남았다.

스스슷.

그녀의 손바닥 아래로 피들이 붉은 기운을 이루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청동거울로 손을 옮기자 붉은 기운들은 청동거울 안으로 흡수되면서 거울이 검게 요동쳤다.

마치 검은 구름이 강렬하게 휘도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신녀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물어보시지요.”

그녀의 말에 혈천교주가 여전히 검은 구름이 넘실대는 것처럼 보이는 청동거울 앞에 섰다.

“천갑무신의 후인을 이길 방법은?”

교주의 물음에, 거울 안은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글자 몇 개를 위로 띄웠다.

“……오직 ‘그분’ 만이 이길 수 있다라.”

뻔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분과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녀뿐이었다.

“그렇다면.”

신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이, 또다시 교주가 물었다.

“지금의 신녀를 대체할 사람이 있는가?”

“……!”

놀란 신녀의 흰자위만 있는 눈이 부릅떠지는 가운데, 거울 안이 파직거리며 누군가의 모습을 띄웠다.

“어, 어떻게 저 아이가!”

거울 안의 모습을 본 신녀가 경악에 찬 음성을 내뱉고는 울컥,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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