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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21화 (121/200)

기갑무림 121화

신의라면 무림맹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어떻게 백옥까지 왔을까?

“아이고, 신의님 오셨습니까?”

신의를 보자마자 당무가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나 역시 일어나며 신의에게 인사하려는데 그가 만류했다.

“앉아 있어도 괜찮네. 무리하지 말게.”

당무가 옆으로 비키자, 신의는 당무가 앉았던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내 표정에 당무가 그간의 일을 알려주었다.

“저희가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신의님께서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당무는 재차 말했다.

“신의님께서 오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수면 독을 뿌려 두긴 했지만, 놈들이 어찌나 독하던지. 꽤 많은 후기지수가 다쳤거든요.”

“얼마나 다쳤습니까?”

물음에 답한 사람은 신의였다.

“서른세 명이 다쳤다네. 그중 열 명은 중상, 남은 스물세 명은 경상이지. 혈천교를 상대로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어.”

“맞습니다. 이번 백옥 탈환 전투에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주 큰 쾌거이지요.”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이 모든 것이 다 후인님 덕입니다.”

“맞네. 자네가 혈천대와 총사를 상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네.”

“후인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생명을 구한 천갑무신의 후인인 자네에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드는지 모른다네.”

당무와 신의가 눈을 빛내며 서로 다투듯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아닙니다. 다 같이 싸웠기에 얻은 승리입니다.”

나는 포권을 취하며 신의에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만약 중상자들을 빨리 치료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죽었을 테고, 나 역시 그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을 테니까.

“클클, 겸손하기까지 하구먼.”

신의는 긴 흰 수염을 쓸면서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무량후가 예전부터 자네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기에 늘 궁금했었다네. 그런데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볼 수가 있어야지.”

당무가 웃으며 맞받아쳤다.

“천갑무신의 후인님이 아프면 안 되죠. 아프면 큰일 납니다.”

“후인이 쓰러질 정도면 정말 큰일이지. 건강하던 자네가 이렇게 쓰러진 것도 혈천교 놈들을 상대해서 아닌가.”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네가 천갑무신의 후인일 줄을 상상도 못 했다네.”

칭찬에 인색한 무량후가 자휘에게 감탄하기에, 지난 정사화합전에서 유심히 보긴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뛰어난 기량을 가진 소년이라고 생각했을 뿐, 천갑무신의 후인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소년의 정체를 알고 보게 된 어제의 전투는…….

의원치고는 제법 무공을 할 줄 안다는 그가 보기에도 전율이 느껴질 만큼 압도적이었다.

“자네가 정도 무림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노부는 정말 감탄했어.”

신의는 어제를 생각하기만 해도 심장 부근이 찌르르 울렸다.

늙은 의원인 자신도 그러는데, 젊은 무인들은 어떻겠나.

신의는 얼굴까지 잘난 천갑무신의 후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당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예.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당무는 싱긋 웃고는 포권을 취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니 문 앞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십시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 신의와 나밖에 남지 않게 되자, 그는 방안에 기막을 둘렀다.

마치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무척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듯 말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신의와의 접점은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탈진한 나를 이렇게 비밀스레 진료할 필요도 없기에 나는 의문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부단주까지 나가게 한데다가 기막까지 두르니 궁금한 모양이로군.”

그는 소리가 밖에 새어나가지 않는 기막을 둘렀음에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꼭 전해줄 말이 있어서 그런 것이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대대로 신의를 배출한 내 가문과 관련된 일이지.”

“예?”

그의 가문은 의천문(醫天門)이었다.

이백 년 전부터 대대로 배출했던…….

‘잠깐, 이백 년 전이라면?’

천갑무신이 나타난 시기와 겹치지 않나.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신의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천갑무신을 배출한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나 역시 알고 있는 것이 적기에 솔직하게 답했다.

“제 진짜 가문의 이름이 ‘진천세가’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 맞네!”

그는 내 답에 무릎까지 치며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진천세가의 초대 가주가 진천유화라는 여인인 것도 아는가?”

“알긴 압니다만, 그것이 신의님의 가문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것까지는 모르는군.”

신의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흰 수염을 한번 쓸었다.

“진천세가의 초대가주는 아주 뛰어난 의원이었어.”

“……의원 말입니까?”

진천세가임을 숨기고 이백 년간 내려져 온 정보는 한정되었기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신의는 먼 과거를 생각하는 듯 잠시간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당시 의천문을 열었던 내 조상은 그저 그런 의원이었지. 그런데 어쩌다 우연한 계기로 진천세가에 들어가게 되었지 뭔가.”

그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천세가를 세운 이들은…… 믿을 수 없게도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고 하네. 그들은 이 세상에 적응하고자 내 조상을 안으로 들인 것이었지.”

“…….”

난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진천세가를 세운 이들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 안에서 내 조상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많이 봤다고 한다네. 이상한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치료하고, 인체의 해부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며 병에 대한 치료 방법 역시 목소리가 알려주었다고 하지.”

목소리라면, 가야와 같은 것일 테다.

‘초대가주였던 진천유화에게는 가야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 당시라면 마석이 풍부해서 인간의 신체 정도야 쉽게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군요.”

모든 것을 간접 시인하는 내 말에 그의 눈이 빛났다.

“역시 자네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하는군.”

“제가 입은 천갑 또한 인세의 기술로는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니, 설령 제 조상들이 뛰어난 의술을 구현했다고 한들 믿지 못할 것은 아니지요.”

“맞네.”

신의는 대답과 함께 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꺼내어 건넸다.

“이걸 보게.”

그가 건넨 책은 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으나, 신기하게도 종이의 질 자체가 이곳에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진천유화 님이 내 조상에게 주신 것이라네.”

“이게 이백 년 전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렇네.”

나는 책을 보며 새삼 놀랐다.

이백 년 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새 책 같았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자 놀라운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지금의 인쇄기술이라 할 수 없는 글자와 실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인체 해부도와 각종 설명들이 책안에 가득했다.

진천세가의 기술이 아니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책은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우리 가문의 비밀이지.”

그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원래 이 책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열리지 않네. 그런데 자네는 쉽게 여는 것을 보면 진천유화 님의 피를 이은 게 분명하군.”

신의의 말에 나는 새삼스럽게 손에 든 책을 바라보았다.

하긴, 아무나 이 책을 볼 수 있다면 그의 가문뿐 아니라, 진천세가의 이해할 수 없는 의술이 드러날 터였다.

내가 뭔가 신의에게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책은 영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상을 보시겠습니까?]

“영상?”

내 혼잣말 같은 물음에 신의가 반색했다.

“영상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황급히 내 손을 잡으며 간절한 어투로 부탁했다.

“제발 영상을 보게 해주십시오!”

아마도 마석의 기운이 모자라, 그동안 남은 신의 가문의 사람들은 영상이란 것을 못 본 듯했다.

나 또한 궁금했기에 수락하자 허공에 마치 실물 같은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오! 내 생전에 이것을 보게 될 줄이야!”

영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감격을 넘어 눈물마저 맺혔다.

영상에는 진천유화로 보이는 인물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과 인체에 대한 여러 설명이 담겨 있었다.

영상을 보는 신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동안 그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영상에 담겨 있었고, 신의는 이 시간 동안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약 반 시진에 이르는 영상이 끝나자, 신의가 돌연 일어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진천세가의 후인님께, 의천문의 후인이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돌변해서 극도의 예를 표하니 당황스러웠다.

“일어나십시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이러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여 가문의 비기를 잇지 못한 것을 후인님께서 찾아주셨지 않습니까? 원래부터도 후인님께서는 저희 가문의 은인이셨지만, 지금도 은인이십니다.”

그는 여전히 엎드린 채로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의천문의 모든 것은 후인님의 것입니다. 실제로 저희 가문의 모든 것은 진천유화님의 은혜로 이뤄진 것과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무려 이백 년간 의천문은 중원 최고의 세를 이뤘다.

돈이 있어도 못 만나는 사람이 신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게 준다고 하다니!

“감사는 마음으로 되었습니다. 제 선조가 의천문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일지 모르나, 그 모든 것을 제가 받기엔 과합니다.”

내 말에 신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 영상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천갑무신님을 위한 것들 또한 들어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가문이 존재하는 것은 천갑무신의 후인을 위한 것.”

그는 여전히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후인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인간들을 위한 의술이라면 굳이 받을 건 없었으나, 천갑무신의 후인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혹했다.

“그렇다면 그에 관한 연구 결과를 전달해 받는 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신의는 거듭된 내 거절에 눈을 크게 뜨며 감탄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욕심이 없으시다니…… 역시 천인(天人)다운 면모이십니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진천유화는 재물이나 다른 권력에 큰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그러니 그 많은 재물을 안 쓰신 게지요.”

“예?”

놀란 내 되물음에 신의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셨습니까? 진천세가를 세운 진천유화 님께서는 아주 큰 재물을 가지셨습니다.”

“얼마나 큰, 재물 말입니까?”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못해도 성 몇 개는 살 정도?”

그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천유화 님의 의술이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재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줄을 섰습니다. 당시 재물에 대해서 잘 모르셨던 진천유화 님께서는 주는 족족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주는 족족 다 받았단 말입니까?”

“예. 그 많은 돈을 모두 날리신 건 아닐 텐데. 이상하군요.”

허어, 내 입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숨이 뱉어졌다.

“그 당시 유명했던 고서며, 유물까지 지금 따져보면……. 어디 보자, 성이 아니라 작은 나라 정도는 살 재물이 되겠는데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많은 재물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대체 어디에 재물들이 있단 말인가?

신의는 내 경악한 표정을 보고는 더욱 이해 가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인님께서 태어나신 진가장은 보잘것없다는…… 아, 죄송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정도 재물이라면 펑펑 써도 십 대는 잘 먹고 잘살 돈입니다. 아마 전혀 안 쓰신 듯 한데 어디에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으십니까?”

“아……!”

순간, 내 머릿속에 장소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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