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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20화 (120/200)

기갑무림 120화

현천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총사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넓게 퍼져라!”

모여 있다가는 저 큰 대검에 쓸릴 판이었다.

촤락.

밀집해 있던 혈천대원들이 옆으로 넓게 퍼졌다.

약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날 선 칼을 앞세운 채, 적들은 빛나는 대검을 손에 든 천갑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장 가득한 놈들의 눈빛과 달리 내 시선은 그들을 넘어 백옥의 초소를 향해 있었다.

‘아직인가.’

정파인들과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옴에도 백옥 초소의 망루에는 약속의 징표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이지 않음에도 초조한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정 안 되면 앞의 놈들이야 혼자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혈천대와 쉽게 싸울 기회를 놓친 건 그들의 실책이니까.’

완전 기갑화가 되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눈앞만을 직시하게 했던 것이다.

“놈이 방심한 사이 공격해라!”

총사의 소리에 잠시 하던 생각을 멈추고 달려드는 놈들을 보았다.

천갑으로 변하자, 적들의 행동은 무척이나 느리게 보였다. 놈들의 외침조차 늘어진 말처럼 들려올 정도였다.

“으아아!”

“천갑무신의 후인을 죽여라!”

정확히 구십팔 개의 날카로운 칼들이 나를 향해 찔러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짓쳐 들었다.

검을 배운 것은 고작 삼재검법일지 모르나, 천갑에게서 나오는 힘과 빠르기는 그들로서는 감당치 못할 인외의 것이었다.

촤악.

고작 한 번의 가로 베기였을 뿐인데도 벌써 다섯의 혈천대원이 피를 뿜었다.

이어진 검의 호선.

호선이 이어지는 궤적을 따라 또다시 다섯의 혈천대원의 피가 사방에 흩날렸다.

“크악!”

짧은 찰나 간 벌어진 열 명의 죽음에, 혈천대원들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괴, 괴물……!”

괴물이라.

그래, 인세에서는 내가 괴물로 불리는 게 맞을 테다.

이 힘은 결코 인세의 것이라 볼 수 없으니까.

적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감에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저들이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이어서일까. 아니면 내 머릿속이 너무 차갑게 얼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촤악.

또다시 현천검을 횡으로 가로지르자, 이번에는 여덟의 혈천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학살(虐殺).

이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던 총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정도 일 줄이야!”

강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에서 강하다고만 생각했건만.

천갑무신의 후인은 예상을 넘어섰다.

“이건 진짜 괴물이 아닌가!”

총사가 가진 잠깐의 경악 속에서도 학살은 이어졌다.

푸확!

이번에는 여섯 명의 혈천대원들이 두동강이 되어 이미 피로 물든 땅에 뒹굴었다.

“아, 안 돼!”

벌써 죽어 나간 혈천대원만 해도 스물네 명이었다.

숨을 두 번 쉴 정도의 시간 동안 무려 혈천대 한 부대 가까운 인원을 천갑무신의 후인이 처리한 것이다.

“이익!”

혈천대원 백 명이면 충분하리라 여겼건만 오산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총사는 두 손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정파인들을 살리고 싶다면 멈춰라!”

내려치려던 천갑의 대검이 한순간에 멈췄다.

그 바람에 눈앞에서 칼을 맞을 뻔한 혈천대원 하나가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자빠졌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천갑이 총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총사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네놈이 기다리는 것은 백여 명의 정파인 아니더냐? 백옥 초소에서 만나기로 한 놈들! 그놈들이 우리 손에 있다!”

총사의 외침에 현천검이 스르륵 내려갔다.

현천검이 아래로 내려가자 남은 혈천대원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그들이 굳게 잡은 칼은 떨려왔으며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되레, 큰 무공이 없음에도 천갑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총사가 대담해 보일 지경이었다.

“정파 놈들을 살리고 싶다면 어서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총사가 이때라는 듯 벌떡 일어나 외쳤다.

“네놈이 스스로 죽는다면 놈들의 목숨은 살려주마!”

천갑무신의 후인과 백여 명의 정파인들과의 목숨을 교환하자는 총사의 제안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잠시 말이 없던 천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파인들을 잡고 있다는 증거가 있나?”

“증거를 보고 싶다면 보여주도록 하지!”

총사가 왼손을 까딱이자, 혈천대원 하나가 가마 속 공간에서 피 묻은 무복들과 칼들을 꺼내서 가져왔다.

이것은 천갑무신의 후인을 만나기에 앞서 그가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피가 묻은 무복들을 앞에 던지며 말했다.

“자, 아미파와 청성의 무복들이다. 옆의 칼은 놈들의 것이고.”

옷들은 피로 범벅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얼마나 칼질을 당했는지도 감히 상상 못 할 만큼의 처참함을 간직한 옷이었다.

“넝마가 된 옷들을 보면 알겠지만, 시체는 토막이 나서 가져올 수 없었다. 이래도 내 말을 믿지 않을 테냐?”

“…….”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미와 청성의 무복과 무기가 확실했다.

‘정말 정파인들이 이곳에 오다가 놈들에게 잡힌 것인가?’

그러나…….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기억해 볼 때, 그들은 혈천교놈들에 쉽게 잡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인가?

총사라는 놈이 거짓으로 정파인들을 잡았다고 가짜 증거를 내밀 수도 있지 않나.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진짜라면?

“시체라도 좋으니 단 한 명이라도 내게 데려와라.”

“좋다!”

총사가 흔쾌히 대답하자, 혈천대원들이 재빠르게 백옥의 초소로 향했다.

“어떻게 후기지수들을 잡은 것이지?”

“그걸 내가 네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나?”

총사의 번들대는 눈빛은 마치, 덫에 걸린 맹수를 보는듯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혈천대원들이 초소에서 시체를 들고 오는 데는 무려 이 각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였다.

서로의 긴장된 대치상태 속에서 반 시진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

정파인들이 잡힌 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놈들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완전 기갑 형태로 남을 수 있는 시간은 이 각조차 남지 않았다.

털썩.

혈천대원들이 시쳇더미를 내려놓았다.

넝마가 된 시체들은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원래였다면 시체를 자세히 볼 엄두를 못 냈겠지만, 이성이 앞선 머리는 앞의 시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줬다.

“이제 확인했나?”

“그래.”

총사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재촉했다.

“이 시체들은 확실히 정파의 무림인들이다. 죽은 열 명을 제외하고 우리에게는 구십의 정파인들이 있지. 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자진해라! 그래야만 네놈의 동료들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놈은 나더러 스스로 죽으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거짓 증거로 자진(自盡)을 이야기하다니. 어이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싫은데.”

“뭐, 뭣이?”

당황한 총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거렸다.

“네놈이 죽지 않으면 남은 구십의 정파인들을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싫다고?”

그는 진심을 파악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이 시체들, 정파인들이 아니잖아?”

“정파인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는 거지?”

총사의 물음에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파인들이라면 무인이 아닌가? 무인이라면 수련 흔적이 있을 수밖에 없지.”

차가운 천갑의 손가락이 사체들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봐라. 손에 굳은살 하나 없는 시체가 어떻게 무인이라 할 수 있나?”

“……!”

총사가 시체를 가져온 혈천대원들을 한번 쏘아보더니 변명했다.

“무인이라고 꼭 손에 굳은살이 있는 건 아니다. 너 역시 검을 바로 배운 것은 아니지 않나? 앞의 시체 역시 그런 것뿐이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권장이나, 각법 위주로 무공을 배웠다면 손마디에 굳은살이 배기지 않을 수도 있으니.

“빨리 결정해라! 네놈의 대답 여하에 의해 정파 놈들의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총사는 시체의 진짜 유무는 뒤에 버려둔 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을 재촉했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총사님!”

그때, 혈천대원 하나가 급히 총사에게 달려오더니 무언가를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대원의 말에 총사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시선의 끝이 백옥의 초소 꼭대기에 닿았다.

“역시, 거짓이었군.”

세차게 날리는 푸른 깃발은, 바로 정파인들이 백옥에 도착했다는 징표였다.

비록, 약속한 시각보다는 조금 늦긴 했으나 그들은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

내 시선을 따라간 총사 또한 푸른 깃발을 보더니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저 깃발이 나와 정파인들간의 약속을 알려주는 표시라는 것을 눈치챈 탓이었다.

“속이려는 수법이야 그렇다 쳐도, 너희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게 뭐지?”

“내 목숨은 다른 정파인들로 위협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야.”

“너 역시 정파인이거늘, 어떻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

“이기적인 생각?”

“천갑무신의 후인이면서 정파인들의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구경만 한다는 것이니 이기적이란 것이다!”

“어차피 내가 죽어서 정파인들을 구한다 한들, 너희들 정파인들을 그대로 살려줄 리 없잖아?”

“그, 그건!”

정파인 모두를 죽이고 혈천하를 꿈꾸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이기적이란 말을 내뱉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남은 시간은 일각입니다.]

가야가 완전기갑화의 남은 시간을 알려왔다. 완전 기갑화가 풀리기까지 남은 시각은 이제 일각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일각이나 남았지.’

스산한 눈빛이 총사에게 스치자 그가 체념한 듯 한숨을 흘렸다.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해 분명, 백 장 거리 안에 아무도 올 수 없도록 만들었건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정파놈들이 백옥의 초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에 있던 혈천대원까지 모두 물리쳐 버렸다.

적미륵의 힘을 얻은 대주마저 있는 판에 어떻게 이렇듯 쉽게 함락이 되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총사가 얇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더니 물었다.

“말해줄 수 있나?”

“그걸 내가 네놈에게 말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놈에게 전에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현천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옥에서 네 동료에게나 듣도록 해.”

시간이나마 끌고자 했던 총사의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졌다.

그는 발악하듯 외쳤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에 비하면 발끝의 때만도 못하지. 네놈이 아무리 인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분’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총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대검이 번쩍하고 빛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개소리.”

듣기 싫다는 듯 내뱉는 한마디와 함께 총사의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데구르르.

아직도 부릅뜬 채 껌뻑이는 총사의 두 눈이, 자신의 수하들을 도륙하는 천갑의 뒷모습을 보았다.

목이 잘려서도 참지 못해 질끈 감은 두 눈.

컴컴해지는 눈앞이 총사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백옥의 초소를 총사 몰래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비밀통로 덕분이었다.

원래부터 백옥에는 초소와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었는데, 혈천교가 처음 이곳을 기습적으로 점령한 바람에 기존의 무인들은 탈출조차 하지 못했다.

비밀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지부장과 부단주로 인해 이 계획은 성립되었다.

내가 놈들을 처리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백옥의 초소를 탈환하기로 말이다.

“……그래도 걱정이 되지 뭡니까?”

당무는 탈진해서 누워있는 자휘를 향해 눈썹을 아래로 휘며 말을 이었다.

“비밀통로 위로 올라갔을 때, 떡하니 혈천교 놈들이 있을까 봐 걱정되더군요. 그래서 수면 독을 한동안 뿌려 두었지요.”

“그래서 약속 시각에 늦은 겁니까?”

“예. 수면 독이 초소에 돌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후인님께서는 워낙 강하시니까 잘 버티시리라고 생각했습죠.”

어쩐지, 늦게 깃발이 올려졌더라니.

알고 보니 수면독이 퍼지는 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역시, 당무였다.

“하아. 어찌 되었건, 다들 무사하시면 되었습니다.”

조금은 허탈한 내 답에 당무가 히죽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 물론 가장 큰 공을 세우신 건 후인님이시지만요.”

그가 내 손을 넙죽 잡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누군가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좀 어떤가?”

들어온 사람은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무림맹의 신의(神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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