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15화
자휘가 천갑무신의 후인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제갈세가에서 드러난 힘을 본 이는 오직 제갈세가인들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혈천교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새어 나올 리는 없었기에 진정한 자휘의 힘을 아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껏 병이 나아 이제야 힘을 가지게 된 당균이었다.
몸을 부들대던 그의 몸이 자휘의 발아래에서 서서히 굳어갔다.
“…….”
침묵하는 정파의 무인들 속에서 자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적미륵의 힘이 부럽습니까.”
자휘의 물음에 다들 아무런 답을 안 했다.
천갑무신의 후인이야, 혈천교와 적이니 적미륵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윗사람들이 암암리에 적미륵을 사용하는 것을 몰랐던 그들은 이제 진실을 알고야 말았다.
솟아오르는 반발심에 후기지수들이 입을 다물고 있자 자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적미륵을 사용한 대가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이미 가야를 통해 적미륵의 부작용에 대해 알게 된 자휘가 발을 들고는 당균의 머리를 짓눌렀다.
터지는 당균의 머리.
사람들은 뇌수가 튀어나오는 잔혹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고 간혹 구역질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잠시였다.
곧이어 일어난 기이한 모습에 후기지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스스슷.
죽은 당균의 시체가 붉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붉은 기운들은 구름처럼 모이더니 점차 괴이한 악마 모양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혈운(血雲)라 부릅니다. 혈운은 적미륵의 힘을 흡수하고 혈천교인들처럼 피를 마시고 죽었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자휘가 놀란 눈으로 혈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무겁게 말했다.
“피를 마셔야 얻는 이 힘은.”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하물며, 사악한 무리가 주는 힘이라니.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한 대가로 얻는 힘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악마의 형상을 한 혈운을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휘가 혈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악마의 얼굴이 기이하게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크륵.
일그러진 악마의 형상에 자휘의 손이 닿자마자 혈운은 악마의 형상을 잃더니 천적을 만난 것처럼 한순간에 훅하고 사라졌다.
마치 악마를 처단하는 신의 손길인 양, 닿자마자 혈운은 흩어져 버린 것이다.
“……!”
모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든 가운데 자휘가 그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적미륵의 힘을 얻고, 이런 모습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은 정파였다.
아니, 정파가 아니더라도 인간이길 포기한 힘 따윈 얻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든다면 처음부터 정파가 아닌 사파나 흑도가 되었을 터였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힘을 얻은 무인들이 있다면.”
자휘의 시선이 서창지부장을 비롯한 모두에게 닿았다.
그리고 경고가 담긴 음성이 그들의 귓가에 벼락처럼 꽂혔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 * *
혈천교인들의 함정에서 벗어났음에도 파당으로 향하는 무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당문에서 열, 청성과 아미에서 각자 세 명씩 도합 열여섯 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배신자를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천갑무신의 후인이었다.
후인은 배신자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하던 혈천교인들 또한 죽였다.
밖으로 나가자 쌓여 있는 시체들을 보고 그들은 기겁했다.
무인이기는 하나, 목숨을 걸고 제대로 된 싸움을 한 적이 없는 그들이다.
후기지수들에게 자휘는 마치 혈신의 재래와도 같았다.
그들의 눈이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자휘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죽을 놈들이 죽긴 했지만…… 두렵구나.’
당문과 청성, 아미의 후기지수들의 무공은 낮지 않았다. 오히려 제 나이대보다 훨씬 높았음에도 지금껏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배신자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를 못했지.’
어젯밤, 불과 몇 시 진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동문들이 삽시간에 돌변해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공격했다.
고작 열 명이 넘는 배신자들임에도 백 명의 인원들이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천갑무신의 후인은 달랐다.
혈천교인들을 해치우고 나타나 배신자들을 쏴 죽였다.
‘망설임이 없었어.’
호리한 체격에 약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후인의 마음은 독했고 무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두렵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후기지수들이 저마다 어젯밤의 일을 곱씹으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네? 정말 후인님이 그러셨단 말입니까?”
뒤쪽에서 후인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하는 사람은 무림맹 서창지부 일단의 부단장인 당무와 이대 제자였다.
“그래. 이 모든 것 후인님께서 하신 일이지.”
모든 걸 후인님이 해내셨다는 이해 안 되는 말에 귓가가 자연히 당무쪽을 향했다.
“배신자들을 색출해 낸 것도 다 후인님 덕이라더군.”
배신자들을 발견해 낸 것이 후인님이라고?
후기지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당무의 옆에 있던 이대 제자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나야 서창 무림맹의 부단주이니 이번 일의 증거자료를 보고 알았지.”
“이번 일에 증거자료가 있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그거야 모든 일이 끝나서야 후인님께서 자료를 주셨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어떤 증거자료이길래 후인님께서 배신자들을 색출해 내셨다는 건지 궁금합니다.”
“혈천교 놈들이 우리가 노숙 자리로 알아본 곳을 어떻게 알았겠나?”
“그야, 당균 놈이 알렸겠지요.”
당무는 모두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음을 알고는 목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답했다.
“후인님께서 당균 놈이 우리 쪽 정보를 알리려 혈천교에 전서구를 보내는 것을 보시고는 서신을 바꿔 챘다고 하시더군.”
“그럼 원래 당균이 보내려던 서신을 증거로 드린 겁니까?”
“맞아. 궁금해서 한번 원래 내용의 서신을 읽어보니 아주 가관이더군. 당균 그 미친놈이 무림맹을 아주 팔아넘길 작정으로 중요한 정보를 넘겼더라고.”
“아주 빌어먹을 새끼네요.”
“그놈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신자 놈들도 마찬가지야. 청성과 아미의 중요자료들도 다 있지 뭔가? 서신이 제대로 혈천교 놈들의 손에 들어갔다면…….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럼 서신으로 배신자들을 색출한 겁니까?”
“아니야. 서신에는 배신자들 이름이 없었어. 그래서 후인님께서 서신을 바꿔놓은 거야. 누런 옷을 입은 놈이 천갑무신의 후인이니 그놈을 공격하라고 말이지.”
“누런 옷은 당균 놈의 옷인데. 아하, 옷 색깔을 바꿔 전달했군요!”
소년은 맞장구를 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미리 말씀해 주시 않으신 걸까요? 저희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배신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말을 하나? 게다가 후인님이 배신자가 있다고 한들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처음 본 천갑무신의 후인보다 몇 년에서 십 년이 넘게 부딪치며 살아온 동문이 더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후인이 자신들을 믿고 이야기해 줬다 한들, 분란만 생기고 배신자들은 빠져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미리 말을 안 한 것이지.”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긴 했네요.”
“대신 절벽 위에서 놈들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후인님께서는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충분히 우리를 배려해 주고 계셨어.”
“정말 속이 깊으신 후인님이시네요.”
소년이 감격한 듯 말했다.
천갑무신의 후인은 이미 모든 것을 안배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당무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몰랐겠지.’
당무의 말을 듣던 후기지수들의 심장이 알 수 없는 감동으로 차올랐다.
“그럼, 혈천교 놈들이 옷색이 뒤바뀐지도 모르고 당균과 옆에 있던 배신자들까지 공격하자 당황해서 본색을 드러낸 건가요?”
“그렇지. 만약 후인님께서 그 방법으로 배신자 놈들을 색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혈천교 놈들에게 지금쯤 몸속의 피는 다 빨린 채 죽어가고 있었을 거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옆에 있던 당문의 소년이 몸을 으스스 떨었다.
당무는 소년을 행해 말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후기지수들에게 고하는 말이었다.
그는 더 큰 목소리로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천갑무신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린 은인이다. 아니, 우리뿐 아니라 목숨보다 소중한 문파를 보호해 준 사람이지.”
그의 말에 일행의 걸음이 조금씩 늦춰졌다.
당무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증거까지 나온 지금, 천갑무신의 후인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문파까지 큰 화를 당할 뻔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인님은 아무 말도 없이 지금도 묵묵히 앞에서 지켜주고 계신다.”
후기지수들 모두의 눈이 앞서가고 있는 자휘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아까 느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너희는 그런 후인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나? 네놈들의 알량한 정으로 죽이지 못한 배신자를 죽여줬음에도 한마디 말이나 했는가 말이다.”
배신자가 나오고 적미륵의 정체까지 밝혀지자 후기지수들이 충격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천갑무신이 행한 행동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적미륵에 대한 사실은 부단주인 나조차 처음 들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말 못 한 것이고.”
적미륵에 대한 말이 나오자 일행들의 속도는 더욱 늦춰졌다.
“하지만 그게 후인님 탓인가? 왜 너희의 생명을 구하고 목숨보다 소중한 문파까지 구한 후인님을 보는 눈빛이 그따위냔 말이다!”
사실, 자휘를 보는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을 넘어 이질적인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질적인 시선에는 어쩌면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천갑무신의 힘에 대한 경외와 질투.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는 그들의 심리가 깔려있었다.
천갑무신의 후인이니, 강한 것은 당연하고 그들을 지켜주는 것 또한 당연하다는…….
이기심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깨닫자 당황스러웠다.
‘후인님은 우리를 지켜주셨는데 지금 나는…….’
적미륵에 대한 배신감이 있었다고는 하나, 당무의 말대로 그건 천갑무신 후인의 탓이 아니지 않은가.
일부의 썩은 윗대가리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감정을 후인에게 전가할 이유 따윈 없었다.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안일함과 이기심이라는 추한 마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천갑무신의 힘이 너희를 지켜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당무는 모두를 향해 마지막으로 일갈했다.
“정파의 힘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니까.”
당무의 지적에 말없이 말고삐를 쥔 후기지수들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들은 다시 한번 앞서가고 있는 천갑무신 후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그저 두렵고 이질적이기만 했던 소년의 등이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작고 호리했던 소년의 등은.
천갑무신의 힘을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그 누구보다 크고 단단한 존재같아 보였다.
그들은 누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천천히 말을 세웠다.
그리고 먼저 말에서 내린 청성의 일대 제자들이 자휘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부족해서 후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청성과 부족한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마 얼굴을 보기 부끄러워 후인의 등 뒤에서 하는 말이지만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을 시작으로 모든 후기지수가 말에서 하나둘씩 내려서기 시작했다.
“아미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당문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생명과 문파를 구해주신 후인님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 명의 무인들이 진심을 담아 자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따각.
그들의 감사에 앞서가던 자휘의 말이 알겠다는 듯 걸음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는 자휘의 귓불이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