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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11화 (111/200)

기갑무림 111화

새벽에 가까운 깊은 밤.

무림맹 서창지부에 온 첫날인데 누가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온 것일까.

‘문을 두드린 걸 보니 위협을 할 생각은 없는 듯한데.’

경계하며 문 앞으로 다가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후인님, 부단주입니다.”

마차를 같이 타고 왔던 그가 나를 찾고 있었다.

자는 척할까 하다가 내 앞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부단주를 생각해 내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인 부단주가 보였다.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웬만하면 오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방문한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의 뒤에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여리한 체격의 사람이 서 있었다.

‘여자?’

부단주가 왜 이 시간에 여자를 내방으로 데리고 온단 말인가?

내 눈에 의문이 가득하자 부단주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보아하니 그로서도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온 듯했다.

‘저 여자는 누구지?’

답 없이 여자 쪽을 노려보자 검은 망토에서 들어본 듯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네.”

머리 쪽의 망토를 내리자 드러나는 얼굴은 나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당하연?”

“그래. 당문의 당하연이야.”

나는 더욱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하연이라면 모용설화의 친구잖아. 이런 밤에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모용설화가 있을 때 몇 번 보았던 것이 다일 뿐 그녀와 나는 딱히 친분이 없었다.

무림맹 서창지부가 사천에 있어 당문과 다른 곳에 비해 가깝긴 했으나 굳이 나를 찾아올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하연의 어두운 표정과 밤중에 나를 찾아온 것을 보건대,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들어와.”

내 허락에 당하연과 부단주가 뒤를 살피며 방안에 들어왔다.

겨우 방안에 들어온 부단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열었다.

“후인님, 진짜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꼭 후인님을 뵈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늦은 시간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무 아저씨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널 꼭 봐야한다고 했으니 내 탓이지.”

부단주의 이름이 당무라고 불린 것을 봤을 때 같은 당문이다.

당하연이 당문의 딸이니 그로서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어찌되었건 당하연은 사천의 패자인 당가의 딸이었으니.

“무슨 일로 온 거지?”

내 물음에 그녀가 탁자에 털썩 앉으며 부단주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가줄래요? 자휘와 이야기 할 것이 있어서 그래요.”

“예? 하지만…….”

당무는 나와 당하연을 차례로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밖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당하연이 나를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천갑무신의 후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어. 뭔가 많이 달라졌을 줄 알았는데 전과 같네.”

“후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 자체가 변한 건 아니니까.”

“그래. 그게 너답기도 하고.”

그녀가 설핏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이 밤중에 찾아온 거지?”

“그건…….”

당하연이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

내가 물 한 잔을 주자, 그녀는 마른 입술에 물을 축이고는 고맙다고 말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본가인 당문으로 오랜만에 가게 되었어.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달까? 아버지와 장로님들이 뭔가 숨기는 것 같고…… 이상한 거야.”

당하연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내가 예민한 거로 생각했어. 그랬는데…… 봐서는 안 될 걸 보고 말았어.”

“봐서는 안 될 것?”

말을 잠깐 멈춘 그녀가 무섭다는 듯 떨리는 몸을 두 손으로 감쌌다.

“붉은 부처 모양의 조각이었어.”

적미륵이다.

그런데 왜 당문에 적미륵이 있단 말인가?

“어쩌다 몰래 보았는데, 요사스런 기운이 얼마나 강했는지 몰라. 우리 당가가 정사지간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엄연하게 정파야. 그런데 그런 요사스러운 붉은 미륵을 가지고 있다니 너무 이상했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몰래 알아보기 시작했어. 내가 워낙 주변을 잘 쏘다니다 보니 당문 사람들은 큰 경계를 하지 않았거든.”

말을 하는 당하연의 눈빛이 떨려왔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붉은 미륵의 이름을 ‘적미륵’이라 부르시는 걸 들었어. 그리고…… 적미륵이 혈천교에서 건네진 물건이란 것까지 알게 되었지.”

그녀는 떨림을 숨기려는 듯 물을 들이켰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당문은…….”

당하연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혈천교에 포섭되었어.”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당하연의 말에 따르면 혈천교는 오직 힘만으로 혈천하를 만들려 하는게 아니었다.

‘이미 적미륵으로 포섭하고 있었어.’

무림의 세가들에게 적미륵을 미끼로 교묘히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당문까지 당한 상황이라면, 언제부터 포섭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

혈천교는 물밑부터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난 아무도 믿을 수 없었어. 미칠 것만 같은데 말할 사람도, 의논할 사람도 없었던 거야. 그런데 네가 천갑무신의 후인이란 소문과 사천에 내려왔다는 말을 듣게 되었어.”

그녀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혈천교와 완전한 대척점에 선 사람은 너 하나지.”

그리고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 역시 오직 자휘 하나뿐.

“그래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가문이 혈천교에 의해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이것을 막을 사람은 천갑무신의 후인.

막막한 어두움에서 한 줄기 빛으로 빛나는 자휘밖에 없었다.

당하연은 의자에서 내려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발…… 도와줘.”

숙여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문이…… 아니, 무림이 혈천교에 삼켜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줘.”

* * *

당하연은 돌아갔다.

여기까지 온 것도 현무학관에 가는 길에 몰래 돌아서 온 것이라 했다.

‘우선은 피해 있는 게 낫겠지.’

나는 그녀에게 현무학관으로 가 있으라 했고 우선은 입 다물고 있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말해봐야,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당문마저 혈천교에 포섭된 지금 무림맹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다.

“누구도 믿을 상황이 아니었을 거야.”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단순히 혈천교 놈들이 들어와 전쟁한다면 천갑무신의 힘으로 누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파인들을 앞세워 공격한다면?

나는 과연 정파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목숨을 위협한다면 죽일 수야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아니지.”

최소한 적은 알 수 있었다.

‘가야가 적미륵의 힘을 가진 무인은 알려줄 테니.’

나는 고민하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쳤다.

“문제는 적미륵인데.”

다들 쉬쉬하면서도 적미륵의 힘을 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도 부단주나 이단주조차 적미륵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흐음. 있는 자들만 적미륵의 힘을 쓰겠다는 건데.”

혈천교는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적미륵의 힘을 탐한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에 대한 부작용을 알려주면 되겠네.”

나는 순간 머리에 떠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창밖은 이미 밤이 지나 조금씩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아침이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한 부단주는 밤새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내가 나가니 냉큼 달려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 당무.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하연 아가씨께서 너무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바람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내가 뭐라 말없이 고개를 괜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두 분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긴히 하신 것인지?”

“뭘 알고 싶으신 겁니까?”

당무는 내 차가운 눈빛에 흠칫 놀라 발을 뒤로 뺐다.

“아,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언젠간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 궁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내 말에 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당무는 뭐라 말하기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 서로 좋아하시는 사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나는 그의 말을 빠르게 자른 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제의 일을 돌이켜 보니 그로서는 그런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시기가 어떤 때인데 그런 걸 신경 쓰겠어요?”

“하하. 그렇죠?”

그는 안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새 가주님도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신 터라 하연 님도 눈치 없이 그러시진 않을 겁니다.”

가주에 대한 말이 당무에게서 나오자 나는 슬쩍 물었다.

“당가라면 사천의 패자인데, 내부에 문제가 있나요?”

“뭐, 어디나 겉은 멀쩡해 보여도 문제는 있게 마련이죠.”

내 물음에 당무는 대답을 회피했다.

‘문제가 있긴 있었다는 것이로군.’

나는 지나가듯 떠보며 말했다.

“어제 당하연이 여기 온 것도 그 문제 때문이었는데. 내가 잘 알지를 못하니 이거야 원.”

“하긴. 아가씨께서도 말씀하시기 좀 그러시려나.”

“뭐가요?”

“그건…….”

당무는 주변을 한번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이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후인님만 알고 계십시오.”

그가 내 귀에 속닥였다.

“사실, 가주님께서 첩을 들여서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괴질에 걸려 위태롭다고 합니다.”

“괴질?”

“예.”

당무는 괴질에 대해 모르는 듯한 내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인님께서는 현무학관에 계시느라 한동안 사천지방에서 떠나계셔서 모르시는군요. 몇 개월 전부터 사천지방에는 이상한 괴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설명을 했다.

“괴질에 걸리면 온몸이 문드러지는데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가족이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리고 괴질에 걸리면 석 달 이상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니…… 하연 님이 오셨어도 가주님께서 얼굴이 어두우셨을 겁니다.”

당문과 적미륵이 연결될 고리를 찾았다.?

‘괴질이었어.’

아들을 고치기 위해 당가주는 혈천교의 적미륵에 손을 댄 것이다.

그리고 당하연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속을 끙끙 앓은 것이고.

아들을 위한 부정(父情)은 이해하나 그것이 혈천교와 연결고리가 되자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괴질. 그리고 당가주의 어린 아들. 혈천교.’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맞물리고 있었다.

“놈들이 그런 것이로군.”

“예?”

내말에 당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습니다.”

“어제도 그러시고, 오늘도 그러시고. 다들 뭔 비밀들이 그렇게 많으시답니까?”

툴툴대는 당무를 보며 나는 웃었다.

“모르시는 게 오래 살 수도 있으니 너무 알려 하지 마십시오.”

“저도 명색이 무림맹 서창지부의 부단주입니다. 알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간 알게 되겠지요. 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후인님께서는 본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숙부의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혈천교인들 중 하나에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가장 근처의 무덤에 숙부 가족을 묻어주긴 해야겠지.’

그리고 그들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잊을 생각이었다.

“서창 지부장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지부장에게 본가로 간다고 말하기 위해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널찍한 복도를 지나, 그의 집무실 근처 앞에 다다를 때였다.

뎅뎅뎅!

커다란 종소리가 서창지부를 가득 메웠다.

“이런!”

그리고 종소리를 들은 부단주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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