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10화
관을 열자 염지천의 말대로 차마 보지 못할 시신들이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욱.”
자연히 나오는 구역질.
한때나마 가족이라 여겼던 이들이 알 수 없는 썩은 고깃덩이 형체가 되어 얼려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상태라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휘는 재빨리 관의 뚜껑을 닫았다.
역하기도 했지만, 가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또한 아무리 괴롭혔다 한들, 그들은 혈육이었다.
저렇게 잔인한 형태로 죽은 것을 보니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숙부님 가족 말고 죽은 하녀를 볼 수 있겠습니까?”
염지천은 구석의 관을 가리켰다.
“원래 하녀들은 보관하지 않으려다 혹시 몰라 두었는데 다행이군요.”
이곳은 중요인사들의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다.
굳이 하녀들의 시신까지 보관할 필요가 없었건만 천갑무신의 후인이 주는 이름이 워낙 커 이곳에 둔 것.
“감사합니다.”
자휘는 염지천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천갑무신의 후인님께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인 것을요.”
그는 자휘의 감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직접 하녀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의 뚜껑을 열었다.
부단주의 말대로 숙부 가족의 시신과 달리 하녀들의 시신은 깨끗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죽인 것처럼 말이다.
“단 한 번에 죽였군요.”
“예. 그것도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듯 아주 빠르게 죽였습니다.”
그가 숙부 가족이 들어있는 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경우 말할 수 없이 잔인하게 훼손되었기에 너무 비교된 탓이다.
“이런 경우는 원한에 의한 살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
저들의 예상처럼 원한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없기에 하녀들의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별다른 건 없군.’
마차 안에서 나눴던 부단주의 말처럼 이 사건은 혈천교의 소행을 가장한 살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녀의 시신을 봤음에도 얻은 게 없어 관의 뚜껑을 닫으려는 순간.
[시신에서 적미륵을 사용한 자의 힘이 약하게 느껴집니다.]
적미륵의 힘을 감지한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정말 혈천교 놈들이 숙부 가족과 하녀들을 죽인 건가?’
전혀 다른 살인방법에 혈천교가 아니라 생각했건만.
가야는 하녀의 자상에서 적미륵의 힘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부의 시신에서는 적미륵의 힘이 감지되지 않았잖아?’
속으로 묻는 내 질문에 가야가 답했다.
[마지막에 방심한 나머지 적미륵의 힘을 감추지 못한 거라 추측됩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린 하녀를 죽이려다 보니 엉겁결에 적미륵의 힘이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사람을 많이 죽여보지 않은 자다.
수많은 살상을 저질렀다면 실수 따윈 하지도 않았으려니와, 저렇게 대놓고 차별해서 죽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또다시 가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 부근에서 이물질이 감지됩니다.]
[이물질의 종류는 종이입니다.]
하녀의 목에서 발견된 것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재빨리 목과 입을 자세히 살펴보자, 가장 어린 하녀의 입 쪽이 조금 더 벌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인 뒤 억지로 입을 벌린 건가?’
입을 통해 무엇인가를 목 안으로 넣었다면 확인해 봐야만 했다.
“이 시신을 부검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부검 요청에 염지천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하녀들은 무공도 익히지 않은 데다가 특이점이 없어 부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무언가 발견하신 겁니까?”
“입을 강제로 벌린 듯한 흔적이 약간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후 무엇인가를 입속에 넣었을 가능성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하녀의 시신에서 입 부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말씀대로 강제로 입을 벌린 듯하군요. 흔적이 미약하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부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염지천이 눈짓하자 이단주가 날카로운 부검용 단도를 가져왔다.
단도를 하녀의 목에 대고 가르자, 목 안쪽에 피에 물든 종이 하나가 보였다.
“……!”
하녀의 목 안에 종이가 있자 염지천과 이단주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진짜 목 안에 뭔가가 있었군요.”
감탄하던 이단주가 하녀의 목 안쪽에서 천천히 종이를 꺼내었다.
“후인님이 아니었다면 발견 못 했을 증거입니다.”
그는 나를 향해 종이를 확인하라는 듯 종이를 보여주었다.
“제가 펴봐도 되겠습니까?”
“예.”
내 대답에 이단주가 아주 조심스럽게 종이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종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드러났다.
드러난 것은 글자.
후(后)라는 단 한 글자였다.
“……후(后)?”
“이게 대체 뭘까요?”
염지천과 이단주가 알 수 없다는 듯 글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제 생각에는 혈천교와 관계된 인물의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혈천교 말입니까?”
“예.”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염지천과 이단주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 역시 혈천교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후인은 돌려 말하긴 했어도 어투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미륵의 기운에 대해 말해도 될까?’
저들 중 적어도 지부장은 적미륵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적미륵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해줘도 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저는 천갑무신의 후인으로서 혈천교가 가지고 있는 적미륵의 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적미륵의 힘을 감지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적미륵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염지천의 눈이 커졌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적미륵의 힘이 쓰인 곳은 알 수 있더군요.”
“허어, 앞으로의 혈천교와의 싸움에서 큰 힘을 얻은 듯합니다.”
적미륵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란 말인가.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적미륵이 무엇입니까……?”
반면, 적미륵에 대해 모르는 이단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방 지부의 일개 단주가 알기에는 적미륵은 비밀에 싸여 있는 기물이었던 탓이다.
“적미륵이란 혈천교에서 힘을 얻기 위해 찾은 기물이라네. 적미륵에 대해 아는 이들은 많지 않으니 자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지부장이 이단주에게 설명하자 그제야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시체의 상처에서 적미륵의 기운을 느끼시다니 대단하군요.”
염지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휘를 다시 한번 보았다.
‘그저 운 좋게 후인이 된 줄 알았더니, 능력까지 갖췄을 줄이야.’
후인이 아니라면 하녀의 목에 종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묻을 뻔했다.
그뿐인가.
적미륵의 힘까지 느끼다니.
이 세상에서 오직 천갑무신의 후인만이 가능한 것일 터였다.
그는 속으로 연신 감탄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말씀대로라면 혈천교와 관계된 인물이 진가장주와 원한이 있어 죽인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하녀는 어쩔 수 없이 살해한 후, 후인님에게 남기는 일종의 전언을 남기는 도구로 사용된 듯합니다.”
하녀가 전언을 남기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말에 자휘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누가?’
혈천교에 관련된 인물이며, 숙부 가족에게 원한을 가진 데다가 나를 아는 인물이 누구란 말인가?
‘후(后)라는 이름이라면…….’
순간적으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숙부 가족을 죽이며 적미륵을 사용하나?
‘말도 안 돼.’
그럴 이유도, 그럴 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머리를 저은 후 말했다.
“좀 더 조사가 필요한 듯합니다.”
염지천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인님의 말씀대로 보강조사를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가장의 일에 신경 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염지천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저들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이미 시체들은 들짐승의 밥이 되었거나, 땅속에 들어가 있을 터였다.
언젠간 갚아야 할 빚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어쨌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더욱이 혈천교까지 관련되었다면 이것은 비단 진가장의 일만이 아니라 무림의 일인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염지천은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염지천이 이제는 나가자는 듯 손짓했다.
“일단 시신들을 확인하셨으니, 올라가서 쉬시지요.”
“예.”
천갑무신의 후인이 주는 이름 탓에 얻은 과분한 호의.
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일단주는 후인님의 말씀대로 시신을 좀 더 조사하도록 하게. 난 후인님을 모셔다 드리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시체가 있는 곳에서 나오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아니라 해도 그들의 시체를 보며 긴장했던 것이다.
염지천은 그런 내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후인님께서는 담대하시군요. 어떤 이들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군요.”
떨떠름하게 답하는 자휘를 보며 눈치 빠른 지부장은 대충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었다.
그는 자휘가 더 이상 숙부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을 깨닫고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저는 후인님께 많이 놀랐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보름 동안 저희가 발견 못 한 증거를 단 한 번에 발견하시고 적미륵의 힘까지 찾아내지 않으셨습니까?”
허허 웃던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터라 더 놀랐지요.”
솔직하게 말하는 염지천.
그가 웃음기를 지우고 나를 향해 말했다.
“서창지부에 후인님의 자리를 만들어 계속 뵙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 대놓고 내게 서창지부로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한곳에 머물기는 힘들 듯합니다.”
“하하. 후인님이 부족하다면 그 어떤 사람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말씀만 하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으로 후인님을 모시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처음엔 천갑무신의 후인이라는 소년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혈천교를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자휘를 보면 볼수록 능력이 탐났고, 옆에 두고 싶었다.
“마음만은 받아두겠습니다.”
에두른 거절에도 염지천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높은 자리로 가신다면 절 기억이라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높은 자리로 가겠다는 생각 따윈 없었기에 난 편하게 답했다.
“그러도록 하지요.”
설사, 그의 말대로 높은 곳에 간다고 해도 그건 그때의 일이었다.
* * *
숙소에 올라와 침상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잔인하게 죽은 숙부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후라는 인물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미륵이 관련된 걸로 보아 혈천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혈천대를 죽였다고 숙부 가족에게 바로 복수를 한 것일 수도 있고, 혈천교인 중 하나가 숙부 가족에게 원한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혈천교 놈들이 숙부 가족을 죽인 건 사실이지.”
그리고 나 또한 여전히 위험 속에 있었다.
아무리 천갑무신의 힘을 얻었다고는 하나, 극히 일부다.
놈들이 지난번처럼 흑마석을 가지고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나 혼자는 피할 방법이 없다.
‘다른 고수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피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흑마석은 마력에 반하는 물질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치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듯한 천갑무신의 힘을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흑마석이었으니.
흑마석의 존재는 혈천교와의 싸움이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얻어야 해.”
어차피 처음부터 혼자 싸울 생각은 없었다.
내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얻을 것이고, 홀로 싸우지 않고 함께 싸우길 원했다.
‘난 천갑무신과는 다르니까.’
그가 홀로 모든 것에 맞서 싸웠다면 난 인간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혈천교를 앞에 두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