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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09화 (109/200)

기갑무림 109화

부대원들은 자휘를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굽신댔다.

“귀인께서 타시는 마차에 먼지 한 톨 있으면 안 되지요.”

“저희는 마부석에 앉을 테니 편히 앉아 가십시오.”

“천갑무신의 후인님은 저희의 희망입니다. 앞에 한 말은 모두 잊으시고 저희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자휘는 정체를 알자마자 돌변한 대원들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따라 들어오는 부단주.

그는 반대편 측 자리에 앉아 소리쳤다.

“귀한 분께서 타신 마차이니 흔들리지 않게 마차를 잘 몰도록!”

“알겠습니다!”

좁은 마부석에 셋이나 쪼그리고 붙어 앉은 부대원들이 힘차게 답하자 마차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무림맹 서창지부까지의 거리는 마차로 반나절 거리.

오전에 출발했으니 늦어도 밤에는 서창지부에 도착할 것이다.

부단주는 마차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 없는 후인을 향해 슬쩍 입을 뗐다.

“저…… 보름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그의 말에 자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단주는 자휘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는 숨을 삼켰다.

‘뭔 놈의 남자가 저렇게 잘 생겼담?’

무림맹에 있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미남이나 미녀를 많이 만나본 그이지만, 자휘처럼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잘생긴 걸 넘어 신비해 보이네.’

뭐랄까, 꼭 인세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자휘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멍해 있는 사이.

“말씀해 주십시오.”

청량한 자휘의 목소리에 멍해 있던 부단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그동안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보름 전, 한밤중에 일가족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발견된 곳은 진가장에서 약 백 리 정도 떨어진 산기슭이었습니다.”

부단주는 입술을 한번 훔치고는 설명을 이었다.

“죽은 사람의 수는 모두 아홉 명. 진가장의 가주와 부인, 아들을 비롯해 가주의 친척 두 명과 사용인들 네 명이었습니다.”

숙부의 친척 두 명이라면, 그가 진가장 내 세력을 넓히기 위해 데려온 사촌 동생들일 것이다.

‘눈엣가시 같은 날 어떻게든 치우려고 눈이 벌겋던 놈들이었지.’

그러니 천갑무신의 후인이라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숙부 가족과 함께 도망을 택한 것일 테다.

“아홉 명 중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여섯이었습니다. 그 안에 장주와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고, 단칼에 죽임을 당한 이는 어린 축에 속하는 하녀 셋이었습니다.”

“골라서 잔인한 고통을 가하게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상하군요.”

만약 도적이나 혈천교에 당했다면 똑같이 잔혹하게 살해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젊은 여자들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녀들은 별다른 일없이 한칼에 죽었다. 반면, 숙부 가족이나 친척들은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

“저희 쪽도 이 부분 때문에 원한이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는 중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혈천교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처음엔 저희도 혈천교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지요. 후인님께서 혈천교인들을 죽인 지 며칠 되지 않아 혈육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니까요.”

부단주가 한쪽 눈썹이 올리며 목소리를 줄였다.

“어쩌면 혈천교를 가장한 원한에 의한 살해가 아닐까 하는 쪽의 의견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숙부나 가족들은 잔인한 죽임을 당할 만큼 나쁜 일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진가장을 차지하기 위해 조카를 괴롭힌 것을 제외한다면 밖에서는 선한 자의 탈을 썼으니까.

“흐음, 저희 조사에서도 그렇긴 합니다. 이번 사건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사건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부단주가 정말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조카가 천갑무신의 후인이면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재산을 챙겨서 도망을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려웠나 보죠.”

“뭐가 말입니까?”

그의 물음에 자휘가 대답 없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자휘의 표정을 보던 부단주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언가를 알아챘는지 혀를 찼다.

“……죽어도 싼 인간들이로군요.”

어쩐지 자신을 키워준 숙부와 그 가족들이 죽었다는 데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찔렸으면 밤중에 도망칠 생각을 다 했을까.

그저 혈천교가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생각했었는데 조카가 무서워서 도망쳤다니.

‘좁은 장원에 가둬두고 심하게 괴롭힌 모양이군. 쯧.’

어쩐지 후인님의 정보가 너무 없다 했다. 부단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와중에 창밖을 보던 자휘가 무심히 말했다.

“오히려 잘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날 죽지 않았다면.”

서늘한 목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제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 *

쉬지 않고 달린 마차는 저녁이 조금 넘어서 무림맹 서창지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가기 전 이미 전서구를 날린 터라, 서창지부에서는 자휘를 마중하기 위해 벌써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갑무신의 후인님은 어떤 사람일까요?”

기다리고 있던 사람 중, 일단주 가 나직한 목소리로 무림맹 지부장에게 물었다.

“듣기로는 현무학관에서 수학한 인재라 하더군.”

“현무학관 말입니까? 그럼 당연히 천반이겠군요.”

단주의 말에 지부장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처음부터 천반은 아니었지.”

“네? 천갑무신님의 후인이 천반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중소문파의 특혜로 들어온 작은 지방 장원 출신의 생도였는데, 점점 강해져 천반까지 되었다고 들었네.”

무림맹을 구성하고 있는 무인들은 대부분 현무학관 출신이다.

그렇기에 인반 출신이 천반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 불가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중소문파 특혜라니!

무림맹 내부에서도 불만 섞인 말이 나왔던 제도가 아니었나.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음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천갑무신의 후인이면서 인반으로 들어가다니요.”

“뭔가 사정이 있지 않았겠는가.”

서창지부장의 눈에 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차가 보이고 있었다.

그는 단주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어쨌든 서창지부로서는 다행이로군. 후인이 있으니 혈천교로부터 안전할 테니 말이야.”

“반대로 혈천교의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단주의 말에 지부장이 멋지게 자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차피 혈천교와 가까운 서창지부는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후인이 있든 없든 우리는 놈들에게 공격대상이 될 확률이 높지.”

“그럴 바엔 천갑무신의 후인이 있는 게 훨씬 낫긴 하겠군요.”

“낫다 뿐일까. 우리로서는 후인의 존재가 생명줄일 수밖에 없어.”

지부장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마차를 보며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 후인이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게 하면 안 된다. 알겠나?”

무림맹 서창지부장의 말에 단주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빛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다리던 천갑무신 후인의 마차가 무림맹 서창지부 앞에 멈췄다.

모두의 기대에 찬 눈빛이 문 쪽을 향하고, 부단주가 먼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후인님, 이곳이 무림맹 서창지부입니다.”

부단주는 매우 공손히 문을 열고는 안에 있는 인물을 밖으로 인도했다.

밖으로 나온 천갑무신의 후인을 본 무인들은 놀라움을 삼켰다.

“……!”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청년을 생각했었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현무학관 생도라 듣긴 했어도 생각보다 어리구나!’

‘저런 아이가 혈천대를 막았다고?’

‘외모로 보면 무위가 높지 않을 것 같은데.’

‘신기하군.’

다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의 놀람 속에서 서창지부장이 자휘에게 다가갔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무림맹 서창지부장인 염지천이라고 합니다.”

“저는 진가장의 진자휘라고 합니다.”

지부장의 예의 바른 인사에 자휘 역시 똑같이 예의를 차렸다.

“혹시 오시는 데 불편은 없으셨습니까?”

지부장이 부단주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고, 부단주가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특별히 불편은 없었습니다.”

특별한 불편이 없었다는 말은 다른 불편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지부장의 눈길이 부단주를 찌릿하니 노려보고는 곧바로 눈을 돌려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시정하도록 하지요. 먼 길에 시장하실 텐데 먼저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녁은 이미 먹었습니다. 그보다 제 숙부에 관련한 일부터 보고자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뒤를 돌아 무림맹 서창지부 안쪽으로 들어서는 염지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림맹에 중요인사가 방문하게 될 경우 약간의 술을 곁들인 환영식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약간의 뇌물이나 원하던 선물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도무지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어려.’

그렇다고 얕잡아 볼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염지천의 눈이 자휘의 뒤를 따르는 부단주에게 향했다.

‘후인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야겠군.’

말없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서창 무림맹 지부의 지하.

“지부장님 오셨습니까?”

염지천이 들어서자, 안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부장이 그들 중 우두머리인듯한 무인에게 물었다.

“이단주. 더 발견한 것이 있나?”

“아닙니다.”

“흐음, 오늘 천갑무신의 후인님을 모셨는데 아쉽게 되었군.”

천갑무신의 후인이란 지부장의 말에 지하에 있던 무인들의 눈이 모두 자휘에게 향했다.

살짝 커지는 눈동자.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표정을 정리하고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철문을 열었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 횃불로 가득하게 밝힌 내부가 드러났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염지천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큰 집무실이 보였다.

집무실 옆엔 고문실처럼 보이는 공간과 작은 복도가 있었는데, 두꺼운 철창살로 막힌 것으로 보아 안쪽으로 감옥들이 있는 듯했다.

“이곳은 죄인을 심문하거나 조사를 하는 곳입니다. 사건에 관한 정보를 모아두는 곳이기도 하지요.”

집무실로 들어선 염지천이 한쪽을 가리키자 그곳에는 서책들이 빼곡히 찬 책장이 보였다.

“여기 앉으시지요.”

염지천이 커다란 둥근 탁자 앞에 앉기를 권유했다. 자휘가 자리에 앉자 그는 이단주에게 명령했다.

“사건 오백십이 호, 진가장 건을 가져오시게.”

“예.”

지부장의 말에 단주가 잠시 후 두 손 가득 서책과 종이 등을 가져왔다.

“시신은 훼손이 많이 된 데다가 부패해 보고서로 대체 하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인지요?”

“사지가 절단되어 있던 상태에서 짐승들이 덤벼들어 더욱 훼손되었습니다. 후인님의 가족임을 알고 시체들을 보존하고 있긴 하나…… 보신다 한들 큰 의미는 없을 듯합니다.”

염지천의 말에 자휘는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시체를 봐도 큰 소득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가야가 있지.’

기갑은 인간들의 눈이 보지 못하는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길 원합니다.”

처참한 시신임에도 후인이 보길 원하자 염지천의 눈에 의외라는 감정을 띠었다.

“정 원하신다면야.”

평소라면 시체를 보관하지도, 보여주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보길 원하는 사람이 천갑무신의 후인.

원한다면 당연히 보여드려야 했다.

“이쪽입니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집무실 밖으로 연결된 작은 창고로 향했다.

염지천은 차가운 기운이 밖까지 나오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자휘에게 말했다.

“이곳은 북해의 빙정을 사용한 창고로서 중요한 인물들의 시체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후인님을 위해 그들의 시신을 보관해 둔 것이죠.”

그는 서창지부가 이렇게 후인을 위한다는 말과 함께 철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훅 끼쳐 오는 냉기.

안에는 서랍처럼 구성된 철로 된 관들이 쌓여있었다.

<오백십이 호. 진가장>

자휘는 진가장이라 적힌 관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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