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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04화 (104/200)

기갑무림 104화

제갈세가의 은인인 자휘의 정체는 이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거취는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은 상황.

그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일단 현무학관으로 가야겠지요.”

얼마 없긴 하나 짐도 있었고, 숨겨둔 영물들의 내단도 있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친우들에게 작별인사는 해야 했다.

“현무학관에는 얼마나 머무실 것인지요?”

“오래 머물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기야, 천갑무신의 후인이란 게 알려졌으니 더 이상 수업을 하시기 힘들겠지요.”

혈천교의 초절정 고수를 이긴 자휘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천갑무신의 힘을 이어받은 후인이 학생들과 어울려 수업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더 있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러나 정체를 숨겼으면 모를까.

이미 드러난 마당에 자신이 현무학관으로 가게 된다면 득보다 실이 컸다.

“사실 전 현무학관이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곳에 있다가는 피해를 줄 게 뻔해서요.”

“현무학관 자체는 천갑무신의 후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지요. 하지만 학관이다 보니 많은 사람의 관심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군요.”

제갈세가만 해도 천갑무신의 후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라면 머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혈천교와의 은원이 확실하게 생긴 지금, 현무학관의 생활은 다른 생도들에게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자휘를 원했던 문파들이야 모든 것을 감수하고 오히려 혈천교에 대한 방패로 자휘를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수련과 학업을 목적으로 현무학관에 모인 생도들에겐 자휘란 존재가 위험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무림맹은 어떠십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은인님의 무공은 단순히 학관의 생도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무림맹에 들어가셔도 될 만큼 충분합니다.”

충분할 뿐일까.

훌륭하다 못해 넘쳤다.

‘무림맹이라.’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에 들어간다면 자유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무엇을 얻든 혈천교를 위해 싸우는 하나의 도구가 돼버리지 않겠는가.

“언젠가는 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긴…… 아무래도 무림맹에 들어가게 되면 얽매이는 것이 많긴 하겠지요.”

하지만 천갑무신의 후인인 이상, 무림맹에 발을 걸쳐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가 지금이 아닐 뿐.

무림맹에서 아직 나서지 않는 것도 그들 역시 천갑무신의 후인의 존재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을 뜻했다.

“은인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제갈훈이 고개를 주억이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자휘와 제갈훈이 문 쪽을 향해 바라보자, 문이 벌컥 열리며 제갈춘이 들어섰다.

“가주님!”

제갈훈은 제갈춘을 나무라듯 바라보며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은인님이 계신 방에 버릇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그것이…….”

난감한 표정을 짓던 제갈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보각에서 급전이 왔습니다.”

“급전?”

“은인님에 관계된 급전이라…… 무례인줄 알면서도 바로 온 것입니다.”

제갈훈은 급전을 빠르게 낚아채고는 내용을 훑어보았다.

“어떻게 이런……!”

급전을 확인하는 제갈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 이 일이 터졌단 말이냐?”

“닷새 전입니다.”

“하아. 내 불찰이구나! 혈천교 놈들이 은인님의 가문을 그대로 둘 리 없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어.”

갑작스러운 급전을 가지고 온 제갈춘과 죄책감 가득한 표정의 제갈훈.

그들을 보자 심장 한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지체 없이 물었다.

“진가장에 일이 생긴 것입니까?”

“그것이…….”

잠시 머뭇대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침통한 음색으로 답했다.

“진가장의 근처에서 은인님의 숙부와 가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숙부와 가족이 죽어?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내 자리를 욕심내고 괴롭혔던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죽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분들께서 한밤중에 짐을 싸고 어디론가 도망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도망이요?”

“네. 재물을 모두 챙기고 도망치려다가 누군가의 손에 잔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천갑무신의 후인이란 소문을 듣자마자 도망치려 한 것일 테다.

진가장을 떠나면서 분명 복수한다고 했으니 무서워 벌벌 떨었겠지.

‘하……!’

어이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범인은 누구입니까?”

“지금 조사하고 있긴 하나,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잔인하게 죽은 시체를 보건대, 원한 관계가 아닐까 짐작할 따름입니다.”

숙부 가족은 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모나게 굴지 않았다.

진가장을 차지하기 위해 조카를 죽일 듯 괴롭히긴 했어도, 남들에겐 선한 가면을 썼던 그였다.

‘진가장에 관련된 사람이 범인은 아니야.’

그렇다면 범인은 역시 혈천교인 것일까?

제갈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범인이 혈천교일 수도 있겠지요. 그들은 전에도 중소문파를 도륙하면서 티 나지 않는 녹림의 수법을 썼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무림인의 시선이 쏠린 상태에서 대놓고 제 친척들을 죽이다니요.”

“흠. 혈천대주를 죽이면서 그 원한이 은인님의 혈육 쪽으로 흐르지 않았나라는 의심이 듭니다.”

누가 봐도 범인은 혈천교인 상황이었다. 놈들의 잔악한 성격상, 혈천대주가 죽자 그 보복으로 숙부와 가족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만약 혈천교가 아니라면 더욱 의문에 빠지는 상태가 된다. 단순히 도적이 죽였다고 하기엔 잔인한 살해방법이 걸렸다.

“지금 무림맹에서 조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네. 무림맹에서 조사를 하면서 제갈세가에도 급전을 보낸 것입니다.”

조용히 생각에 빠진 날 보던 제갈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은인님께서 진가장 쪽으로 가보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현무학관에서 나오게 된다면 아무래도 본가 쪽으로 가 있는 것이 나았으니까.

‘숙부와 가족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죽어버릴 줄이야.’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어딘가 찜찜했다.

게다가 그들에 대한 복수가 내 손이 아닌 남의 손에 이뤄진 상태.

돌아가면 내가 받았던 것만큼 그대로 베풀어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죽이지는 않아도 그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주려 했는데.’

그리고 보란 듯 그들 앞에서 내 자리를 거머쥘 생각이었건만…….

그들은 이미 죽어 버렸다.

“진가장으로 빨리 가 봐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현무학관 쪽에는 제가 전서구를 보낼 테니 걱정 마시고 진가장에 잘 다녀오십시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제갈훈이 제갈춘과 함께 방을 나가고 홀로 남게 되자 알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천애 고아가 된 느낌이야.’

거지같았어도 나름 피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마저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자 정말 홀로 된듯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혼자였잖아?’

그들이 죽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혈연의 애틋함이 느껴진다면 거짓이었다.

그러기엔 그들이 한 패악질들은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내 손으로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핏줄에 대한 성의는 모두 보인 셈이었다.

“오히려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 다행인 걸까?”

그들의 더러운 피를 내 손에 묻히지 않은 것도.

처치 곤란한 그들에 관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도.

날 따라다니던 머리 아픈 혹 하나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었다.

다만.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어쨌든 그들은 내 친족.

벌을 내려도 내가 내려야 했으며, 쫓아내도 내가 해야 했다.

누군지도 모를 놈들이 천갑무신의 친족임을 알면서도 숙부와 가족을 죽였다면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무림맹이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는 언제가 되는 나올 터.

우선해야 할 일은 빈집이 되어버린 진가장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냥 두기에는 진가장의 지하 비고가 마음에 걸리니까.”

어차피 진천의 피가 아닌 이상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이지만 방문을 훤히 열어둔 채 둘 수는 없는 곳 아닌가.

나는 빠르게 진가장으로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진가장으로 가기 위해 짐을 말에 실어놓는 사이, 제갈신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휘야!”

그는 아버지에게 말을 듣자마자 뛰어온 듯했다.

“벌써 떠나다니…….”

숨을 고르는 제갈신의 표정이 무척 아쉬워 보였다.

“진가장으로 떠나면 현무학관에는 당분간 못 오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진가장을 정리해야 하니까.”

진가장을 정리한 후에 현무학관에 간들,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제갈신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무학관에 네가 없을 걸 생각하니 상상이 안 돼.”

“나도 그래. 하지만 진가장 일이 아니어도 현무학관은 떠나야 했어.”

짧은 시간 동안 현무학관에 바람을 일으키며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자휘였다.

자휘가 곁에 있기에 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언제 만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무학관을 떠나게 된 이유가 다 제갈세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제갈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덕분에 제갈세가는 살았지만 넌 현무학관에서 나가게 되었구나. 이 빚을 어떻게 갚지?”

“혈천교 놈들은 내 적이야. 내가 적을 해치웠는데 제갈세가가 빚을 갚을 게 뭐가 있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래도 우리로서는 네가 은인이니까…… 네가 무엇을 하든 제갈세가는 널 지지할 거야.”

제갈세가는 은혜를 갚는다.

세가의 멸문을 막아준 자휘에게 제갈세가가 못 해줄 것은 없었다.

“이거 받아.”

제갈신이 자휘에게 작은 피리를 주었다.

“이건 전서구를 부르는 피리잖아?”

“맞아. 전에 주었던 건 현무학관에서 쓰던 전서구용 피리고 이건 진가장용이야.”

“진가장용?”

“내가 보름에 한 번씩 네게 전서구를 보낼게. 그곳에 혼자 있다 보면 아무래도 정보에 민감하지 못하게 되니까.”

정보란 곧 돈이었다.

개방이나 하오문에 원하는 정보를 듣기 위해서는 거금을 줄 정도로 정보는 귀했다.

지금 제갈신은 자휘에게 제갈세가가 가진 정보를 아낌없이 준다는 말이었다.

“만약 네가 나에게 보낼 일이 있으면 피리를 짧게 세 번 불면 돼. 그러면 전서구가 네가 있는 곳을 찾아갈 거야.”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제갈세가의 피해는 나를 찾기 위해 나온 혈천교 놈들이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놈들은 언젠간 무림에 나와 혈사를 벌였겠지.’

그나마 천갑무신의 후인인 내가 있어 늦춰진 것일 테다.

그러나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제갈신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을 테니.

“고맙다.”

제갈신은 고맙다는 내 말에 싱긋 웃었다.

“만약 진가장에서 머물지 않게 되면 언제든 제갈세가로 와. 이곳의 문은 언제든 네게 활짝 열려 있을 거야.”

“그래.”

“네 마지막 배웅을 못 한다고 아버지께서 많이 아쉬워하시더라. 잘 가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나는 제갈신의 말에 웃었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몰래 빠져나가려고 그랬지. 가주님까지 계시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더 몰려들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진가장 일이 정리되는 대로 현무학관 쪽으로 갈 거야. 그럼 그때 보자.”

“응. 네가 속가제자로 등록된 문파들에서 온 연락들은 적당히 정리해서 보낼게. 전서구 오면 꼭 확인해 봐.”

“알았어.”

“잘 가라.”

“너도 잘 있어.”

제갈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일 년도 안 되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고 진가장에서 살아왔던 시간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냈다.

‘친우들이 없는 진가장은 적막하겠지.’

제갈신, 하후홍, 모용설화, 천무륭…….?

수많은 이들과 함께했던 현무학관의 생활은 사실상 끝이었다.

그러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나는 멀어져가는 제갈신을 흘깃 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진가장으로 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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