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99화
자휘는 답을 하기에 앞서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혈천대주의 물음에 의아한 듯 바라보는 정파인들과,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혈천대원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설마 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신이 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대답 대신 왜 질문을 했느냐고 되물었다. 혈천대주는 자신의 가슴 부근을 가리켰다.
“처음엔 네놈을 보고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더군. 하지만 그건 내가 문제가 아니었어.”
그는 가슴팍에서 긴 목함을 꺼내었다.
목함은 기이하게도 강한 진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안에는 적미륵이 들어 있다.”
적미륵이 있다는 말에 무당구검과 모용인후가 놀란 얼굴로 목함을 바라봤다.
“적미륵은 힘을 원하는 이들에게 힘을 준다. 그리고 이렇게-”
그는 미친 듯이 진동하는 목함을 자휘에게 들어 보였다.
“천갑무신 후인의 위치를 알려주지.”
“……!”
지금까지 적미륵에 대해 겉핥기로만 알았던 모용인후와 무당구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적미륵에 그런 기능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 저 소년이 천갑무신의 후인?”
“말도 안 되는……!”
지금껏 이백 년간 나타나지 않았던 천갑무신의 후인이 어린 소년이라니.
놀람도 무리가 아니었다.
혈천 대원들은 어이없다 못해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따위 꼬맹이가 무서워서 지금껏 우리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 거야?”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웅성대는 사람들의 당혹 섞인 의문 속에서 자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천갑무신의 후인이면 어쩔 거지?”
자휘의 물음에 혈천대주가 목함을 파삭하고 부쉈다.
부서진 목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적미륵.
혈천대주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당연히 죽여야지.”
“그게 마음대로 될까.”
자휘는 재빨리 뒤로 몸을 빼냈다.
적미륵이 마력에 이상이 생기게 만들어 완전 개방으로 끌어내는 거리는 일 장.
기기긱.
일 장 밖에 있음에도 적미륵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자휘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오, 적미륵에 대해 안다 이거지?”
혈천대주는 적미륵을 꺼내자마자 바로 뒤로 물러서는 자휘를 보며 히죽댔다.
“그럼 이것에 대해서도 아는지 볼까?”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었다.
뚜껑을 열려는 찰나.
가야가 경고를 울려댔다.
[흑마석의 힘이 적에게서 느껴집니다.]
[마력을 무력화 시키는 흑마석의 특성상, 삼 장 거리 안에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마석을 무력화시키는 반(反)마석의 성질을 가지는 흑마석이라니!
‘저런 것이 있었을 줄이야!’
놈들이 천갑무신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 마력을 무효화시키는 흑마석.
어떻게 찾았는지는 몰라도 이백 년의 시간을 그들은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것은 확실했다.
기갑이 마력을 동력으로 움직이는데, 마력을 못 쓰게 만든다면 기갑화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선, 꺼내는 것을 막아야 해!’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안 봐도 알겠는걸.”
목함 안에 든 것이 뭔지 알겠다는 말에 잠시 뚜껑이 열리는 것이 멈췄다.
“한번 맞혀보지그래.”
그는 비웃음이 담긴 말투를 건넸으나.
“안에 든 것은 흑마석 아닌가?”
천천히 이어진 자휘의 예상치 못한 정답에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까지 알고 있어?”
“적미륵으로 날 찾아내고 마력을 무효화시키는 흑마석으로 천갑무신의 힘을 못 쓰게 만들려던 계획, 아니었나?”
혈천대주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안 것이지?”
자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시작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온몸으로 은은히 퍼져 나오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네놈이 흑마석에 대해 어떻게 알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적미륵을 흡수하는 것이지.”
혈천대주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킬킬대며 웃더니 적미륵의 이마에서 황금빛 마석을 뽑아냈다.
파삭.
혈천대주의 손에 황금빛 돌이 번쩍거리자, 자휘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기갑이 중급 마석을 원합니다.]
완전 기갑화가 되어 마석을 빼앗으면 되련만, 놈의 손에는 흑마석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되려 흑마석의 힘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자휘는 고개를 저었다.
반면 놈은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토록 원했던 일이 지금 벌어질 예정인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네놈 덕분에 봉인이 해제된 적미륵의 진짜 힘을 흡수하게 되었구나!”
적미륵의 봉인을 해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스스로 돌아가는 적미륵의 고개.
천갑무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으며, 봉인이 해제하지 않고 얻는 힘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혈천대주는 괴상한 주문을 외우며 황금빛 마석을 쥐었다.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스스스.
황금빛은 혈천대주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눈이 황금빛으로 변하며 온몸이 번쩍하는 혈천대주.
“크하하!”
잠시 뒤, 황금빛이 사라지자 놈은 광오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과 함께 주변으로 훅 끼치는 그의 달라진 기세에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드디어 절정을 넘어서 초절정이 되었다!”
초절정.
절정을 넘어선 단계로 현 무림에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사람은 스무 명이 채 되지 못했다.
적미륵으로 인해 한순간에 초절정에 다다른 혈천대주.
그를 보는 무인들의 시선은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적미륵에 저런 놀라운 효과가 있었단 말인가!”
이 사실이 무림에 퍼진다면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한순간에 초절정의 벽을 넘게 해주는 기물은 무인에게 그 어떤 기물보다 귀했기 때문이었다.
“괴물 같은 놈이 더 강해지다니!”
가뜩이나 강한 혈천대주가 적미륵의 힘까지 흡수하자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탄식하는 정파인들과 혈천대주가 얻은 성과에 기뻐하는 혈천대원들.
“축하드립니다!”
“이제 교내에서도 혈도부님의 위상은 훨씬 더 높아질 것입니다!”
무려 초절정이다.?
이 정도 무위라면 세 단계 승급은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혈천대주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내렸다.
“그럼,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이제 치울 건 치워야겠지.”
그의 눈이 진득한 살의를 담고 정파인들과 자휘를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찌릿한 그의 살기에 정파인들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확실히 강해졌어.’
원래도 강한 놈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자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완전 개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속성 소리와 함께 온몸을 휩싸는 차디찬 금속 느낌이 느껴졌다.
[기갑이 완전 개방됩니다.]
회오리치듯 이어지는 힘의 연결 고리 안에서 넘치는 고양감과 끓어오르는 힘.
극대화된 감각 속에 모두의 시선과 감탄이 느껴졌다.
“이럴 수가!”
경악하는 정파인들과 혈천대원들.
그리고 천갑무신의 형태로 변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혈천대주.
촤라락.
은빛의 조각들이 작은 회오리가 휘돌 듯 몸을 감쌌다.
전신에 느껴지는 극강의 힘.
마지막 은빛 조각이 완성되자, 거대했던 혈천대주의 몸이 완전 개방된 자휘보다 작게 보였다.
“이게 천갑무신의 후인인가!”
혈천대주의 눈이 황홀한 듯 빛났다.
쏟아지는 감탄.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지구나.”
그는 곧이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오늘로써 천갑무신 후인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혈천대주의 자신만만한 말에 기갑의 입에서 차디찬 답이 흘러나왔다.
“누가 사라질지는 끝을 봐야 아는 것이겠지.”
“네가 아무리 천갑무신의 후인이라 한들 흑마석을 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혈천대주가 작은 목함을 열자 작은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검은 기운들이 번졌다.
그러나.
흑마석의 기운들은 마력을 빨아들이려 기갑 쪽으로 향했으나, 기이하게도 검은 기운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
혈천대주는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왜 이러는 거지?”
흑마석의 효과는 확실했었다.
마석의 기운을 흑마석이 흡수하면서 반(反)하는 실험을 그 역시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갑으로 변한 자휘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왜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냐!”
당혹스러워하는 혈천대주를 향해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내 차례로군.”
완전 기갑화된 자휘의 몸이 거침없이 혈천대주 쪽으로 향했다.
기갑이 풍기는 엄청난 기세에 초절정이 되었음에도 기갑을 피하는 혈천대주.
그 바람에 흑마석이 땅으로 떨어졌다.
팟.
기갑의 손에서 동그랗고 푸른 기운이 번쩍이더니 땅에 떨어진 흑마석을 감쌌다.
“지금 뭐 하는……!”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퍼억!
기갑의 두터운 손바닥이 그의 뺨을 내려쳤다.
“컥!”
초절정으로 변한들 그의 몸은 인간.
어떻게 기갑에 비할까.
기갑의 완전화된 힘은 단 한방으로 혈천대주를 날려 버렸다.
펑!
수장을 날아가 제갈세가의 성벽에 부딪히는 혈천대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어, 어떻게 이런!”
천갑무신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흑마석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뿐인가?
천갑무신의 후인은 흑마석을 이상한 둥근 기운 속에 감추더니 가져가기까지 했다.
혈천대주는 이건 아니다 싶어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놈을 죽여라!”
그의 외침에 멍하니 있던 혈천대원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각자 무기를 들고 뛰어들었다.
“……죽어라!”
그러나 원래의 크기로 변한 현천검에 의해 그들은 한꺼번에 쓸려나갔다.
커다란 현천검이 횡으로 휘둘리자, 놈들이 줄줄이 밀려 버린 것.
“크아악!”
혈천대원들의 비명에 혈도부는 이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절정이 된 게 문제가 아니었어!’
과거, 이백 년 전.
무림을 제패했었던 천마가 어떻게 죽었는가?
그의 무위는 탈마를 바라볼 정도로 높았음에도 천갑무신에게 겨우 십 몇 수만에 죽었다.
“젠장할!”
그는 욕설을 내뱉고는 도망갈 태세를 취했다.
흑마석도 듣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덤벼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의 몸이 난생처음으로 공포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크어억! 대, 대주님!”
“도와주십시오!”
혈천대주는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대원들을 보고는 눈을 돌렸다.
한순간에 남은 혈천대원들 모두가 기갑화된 천갑무신의 후인에 의해 짓뭉개지고 있었다.
타앗.
그는 도망가기 위해 빠르게 발을 굴러 성곽 쪽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
어느샌가 성곽 쪽으로 날아간 천갑무신의 후인이 혈천대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빠르다 못해 한순간 이동을 했다 싶을 정도의 속도.
“말도 안 돼!”
그토록 바라던 초절정에 올라섰건만 이게 무슨 개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이를 으득 갈았다.
퍽!
성곽 위로 올라서려던 혈천대주의 가슴을 기갑화된 자휘가 발로 뻥 차버렸다.
“크억!”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혈천대주.
그를 따라 자휘 또한 같이 떨어져 내렸다.
쿠쿵.
연달아 이어진 굉음.
굉음 사이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떨어지는 혈천대주의 가슴 위로 완전 기갑화된 기갑의 발이 강하게 짓밟았다.
그러자 두꺼운 돌로 만든 바닥이 거미줄 모양으로 파열되며 혈천대주의 몸이 처박혔다.
“컥!”
뼈가 바스러지는 우두둑 소리.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혈천대주의 입에서 선혈이 솟아올랐다.
푸확.
너덜거리는 가슴팍은 짓뭉개져 형체조차 없을 정도.
혈천대주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짓뭉개는 기갑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흑마석을……?”
흑마석의 효과는 ‘그분’이 친히 신녀를 통해 알려준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흑마석은 천갑무신의 기갑화를 풀거나, 모든 힘을 빼앗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흑마석을 보고도 똑같은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혈천대주는 죽어가면서도 도무지 풀지 못한 의문을 더듬더듬 말했다.
“궁금해?”
차가운 쇠를 품을 기갑의 목소리에 혈천대주는 자존심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망(眞天網).”
“뭐……?”
자휘는 숨을 헐떡이는 혈천대주를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천갑무신의 비급에 있는 무공이지.”
“어떻게 그런 무공이……!”
혈천대주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본래는 진천망은 혈천교 놈들이 탐지목적으로 사용하는 적미륵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마했던 무공이었다.
“내가 네놈들한테 순순히 당할 줄 알았나?”
진천환을 이용해 미리 만들어 두었던 진천망을 기갑으로 변할 때 씌웠다.
그것도, 무려 세 겹을!
세 겹이나 덧씌워진 진천망은 당연히 오랜 시간 동안 흑마석의 기운을 막아주었다.
그 덕에 적들의 흉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원래의 힘으로 혈천대주를 밟을 수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혈천대주가 손을 덜덜 떨며 위로 뻗었다.
“사, 살려줘.”
그의 애원에 자휘는 아무 대답 없이 현천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현천검을 놈에게 꽂아 넣으려는 순간.
가야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