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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98화 (98/200)

기갑무림 98화

서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제갈세가인들이 보였다.

모두 흰색의 옷을 입고 있는 그들.

항복의 뜻을 나타내는 양 그들은 땅에 엎드린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일어서 있는 사람은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훈뿐.

굳어진 시선이 팔이 잘린 채 죽음을 앞둔 모용인후에게 닿았다.

“그만하시오.”

제갈훈이 어두운 음색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항복할 터이니, 우리를 도우러 온 이들은 놔주시게.”

제갈세가주의 말에 혈천대주가 혈도부를 빙글 돌렸다.

“항복한다고 네놈들을 살려두진 않을 텐데?”

“알고 있소. 하지만 저들은 제갈세가가 아니니 살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모용인후가 팔을 잃고 쓰러진 지금, 무당 구검도 밀리던 차였다.

만약 싸움이 계속 된다면 무당 구검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제갈세가주의 말에 혈천대주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싫은데?”

혈천대주의 말에 제갈세가주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놈들은 어차피 적이다.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지.”

킬킬 웃는 혈천대원들 사이에서 그는 여유롭게 말했다.

“모두 죽여라.”

“예!”

큰소리로 답하는 혈천대원들을 보며 제갈훈 또한 동시에 말했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군.”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제갈훈의 말투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슥.

말이 끝남과 함께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제갈세가인들이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작하라!”

정문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혈천대원을 향해 곧이어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펑!

항복하는 듯 엎드렸던 제갈인들의 품에는 모두 신기탄을 쏠 장비들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스물아홉 명의 제갈인들은 제갈훈이 말하는 사이 각자 한 명씩 혈천대원들을 향해 은밀히 조준하고 있었던 것.

“크악”

“컥!”

갑작스레 작은 폭약이 혈천대원들을 향해 쏘아졌다.

몸이 재빠른 이들은 피했으나 반응이 느렸던 혈천대원들의 몸에는 어김없이 신기탄이 박혔다.

펑!

그리고 조각나는 혈천대원들의 몸.

“커억!”

펑, 펑 소리와 함께 불과 눈 한 두 번 깜빡할 사이에 혈천대원 열 명이 몸이 터졌다.

“……!”

제갈훈은 놀란 정파인들을 향해 힘껏 소리쳤다.

“지금이오! 함께 싸웁시다!”

남은 혈천대원은 모두 열여덟.

혈천대주를 포함해 열아홉의 적만이 남자, 무당 구검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크악!”

혈천대원들은 앞에서 쏘아지는 신기탄과 정파의 공격을 동시에 받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펑!

또다시 쓰러지는 혈천대원들!

추가로 두 명의 몸이 터지자, 이제 혈천대의 수는 모두 열일곱만이 남았다.

“하!”

잠깐의 방심으로 무려 열두 명의 대원들을 잃은 혈천대주의 눈에 붉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파앗.

그의 발이 땅을 굴렀다.

무려 한 장 이상 솟아오른 혈천대주의 신형이 빠르게 무당 구검을 향하더니 혈도부가 횡으로 그어졌다.

“허억!”

순간, 무당 구검 둘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 이런!”

지금껏 제대로 싸우지 않았던 혈천대주가 마음먹고 혈도부를 휘두르자, 삽시간에 무당 구검 둘이 죽었다.

경악한 무당 검수들은 혈천대주를 상대로 공격하려 했으나 모두 혈도부에 막혀 버렸다.

휘익.

몸을 좌우로 휘돌며 날아드는 혈천대주의 혈도부가 또다시 그들을 갈랐다.

“으윽!”

빠르게 피한 그들은 다행히 목숨은 구했으나, 팔과 다리에 혈흔이 새겨졌다.

남은 무당 검수들은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타앗.

혈천대주는 무당구검을 처리하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려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그의 신형이 이번에는 제갈세가 안으로 쏘아졌다.

“……!”

놀란 제갈세가인들 앞에서 횡으로 번쩍하는 혈천대주의 혈도부.

혈도부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핏물이 솟구쳤다.

“으아악!”

신기탄을 쏘던 제갈세가인 열 명의 비명이 제갈세가 안을 울렸다.

스륵.

혈도부에 의해 머리를 잃은 열 명의 흰옷이 붉게 물들어 쓰러져 내렸다.

쿵.

한순간에 무당 구검이 당하고 왼편에 서있던 제갈세가인들 열 명이 죽었다.

이 참담한 광경에 제갈훈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신기탄을 모두 발사하라!”

그의 명에 제갈세가인들은 몸을 돌려 혈천대주를 향해 남은 신기탄을 모두 쏘았다.

그를 향해 커다란 벌떼처럼 쏘아지는 신기탄들.

“흥!”

그러나 혈천대주는 빙글 몸을 돌며 도약했다.

더불어 회오리치듯 돌아가는 그의 혈도부!

타타탁!

사방으로 쏘아진 신기탄은 휘돌며 돌아가는 혈도부의 도면에 의해 밖으로 튕겨 나갔다.

퍼엉! 펑!

튕겨 올라간 신기탄은 어두운 하늘에서 화려한 불꽃을 피워냈다.

핏물을 머금은 듯 화려한 신기탄의 붉은 불꽃을 보던 제갈훈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런!”

그는 혈천대주의 말할 수 없이 강한 무력을 보며 손을 떨궜다.

‘너무 강하다!’

혈천대가 살진을 해체하는 동안 그는 신기탄의 위력을 몸소 확인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고, 제갈세가의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혈천대주의 존재 하나로 그의 계획이 모두 어긋났다.

“크하하!”

혈천대주의 강한 무력에 정파인들이 죽어나가자 혈천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감히 우리에게 잔꾀를 부리다니!”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네놈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겠다!”

그들은 살기를 뿌려대며 강한 기세로 상처 입은 무당 검수들을 몰아쳤다.

그리고 혈천대주의 혈도부가 남은 제갈세가인들을 행해 휘둘러졌다.

촤악!

이어진 공격에 힘없이 쓰러진 열 명의 제갈세가인들.

쿵.

잠깐 사이에 제갈세가의 안마당은 스무 개의 머리통이 붉은 피를 뿌리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 돼!”

제갈훈은 칼을 빼어들고 혈천대주에게 저항했으나, 그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제갈훈을 우롱했다.

“네놈은 제일 마지막에 죽여주도록 하지.”

그는 번들대는 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제갈훈을 상대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또다시 살생을 저질렀다.

“커억!”

제갈훈의 옆에서 신기탄을 쏘던 남은 제갈세가인들이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스물아홉 명이 모두 혈천대주의 손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으아아!”

제갈훈은 핏줄 터진 눈으로 비명 같은 고함을 질러댔다.

“겨우 이 정도로 뭘 그러나.”

혈천대주는 비릿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눈앞에서 그놈을 산산조각 내주지.”

“……!”

제갈훈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혈천대원들의 신형이 제갈세가 안쪽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그들의 손에 끌려 나온 젊은 청년 하나.

제갈신이었다.

“놔라! 내 발로 가겠다!”

제갈신은 혈천대원들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들이 끌려 나오던 모습을 보던 제갈훈의 몸은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그는 허망한 눈빛을 한 채 아들에게 물었다.

“왜…… 심처로 안 간 것이냐?”

제갈신은 일그러진 아버지의 눈길을 외면하지 않고 답했다.

“제갈세가는 제 모든 것입니다. 저 혼자 살자고 제갈세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의 말에 제갈훈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제갈훈의 몸이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보던 혈천대주가 킬킬대며 웃었다.

“이제 보니, 네 아들로 하여금 이곳을 폭파하려 했던 모양이구나.”

그는 땅에 떨어진 신기탄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신기한 물건이야. 이런 폭탄을 만들 정도라면 제갈세가를 날리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그는 여전히 빙글대는 얼굴로 제갈훈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어쩌나. 네놈의 아들이 그걸 방해했네?”

혈천대주는 피로 점철된 자신의 혈도부를 들어 제갈신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살짝 가져다대었음에도 핏빛 실금이 가는 제갈신이 목.

“아, 안 돼!”

혈천대원들에게 막혀 허우적대는 제갈훈의 애끓는 눈이 담담하게 서 있는 제갈신을 바라보았다.

힘이 들어간 제갈신의 주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갈신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자신과 제갈세가는 하나이므로.

“제갈세가를 시작으로 혈천교의 힘을 사방에 알릴 것이다!”

혈천교를 위해 제물의 목을 자르려는 듯 혈천대주의 혈도부가 높이 치솟았다.

“혈천하 만만세!”

“혈천하여 영원하라!”

혈천대원들의 광기 서린 외침이 제갈세가안에 가득 찼다.

응답하듯 혈도부가 제갈신의 목을 치려는 찰나.

“멈춰.”

나직하지만 제갈세가 안을 서늘하게 울리는 음성이 그의 귀에 꽂혔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뭐지?”

그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소리가 난 곳은 오른 쪽 위.

고개를 들자, 제갈세가의 성곽 위에 소년의 모습 하나가 보였다.

‘소년……?’

지금 어린 핏덩이 하나가 자신의 행사를 막은 것인가?

혈천대주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갑자기 뛰는 심장은 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상하군.”

그는 아직도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을 한번 움켜쥐었다.

격하게 뛰다 못해 온몸이 떨리는 것 같은 쾌감을 주는 긴장감.

혈도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넌 누구지?”

그는 제갈신의 목을 치려는 것을 잊었던 것처럼 몸을 돌려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소년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높은 성곽 위에서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얼마나 경공법에 대한 조예가 높은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음에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

소년의 정체를 알아본 이는 다름 아닌 제갈신이었다.

그의 당혹스러운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자휘가 왜 이곳에?’

자휘를 보자 알 수 없는 반가움과 죽을 줄 알면서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의문이 들었다.

‘설마, 날 구하려고?’

그럴 리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자휘가 홀로 자신들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왜 네가…….”

뭐라 말을 하려는데 목이 메어왔다.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제갈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누구길래 이곳에 들어왔단 말이냐? 어서 도망가거라!”

제갈훈의 다급한 말에 혈천대주가 웃었다.

“도망? 지금 이 상황에서 저런 핏덩이 놈이 도망갈 수 있다고 보느냐?”

난데없이 호랑이 굴에 스스로 나타난 소년.

혈천대원들은 재미있어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구먼.”

“이런 어린놈이 제갈세가를 구하겠다고 홀로 뛰어든 걸 보면 말이지.”

“크큭, 정파 놈들이 이 꼬맹이 녀석보다도 못한 증거인 건가?”

“아니면 이 녀석이 미쳤거나.”

살의로 번들대는 그들의 눈이 모두 자휘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제갈신에게 다가가는 소년, 진자휘.

자휘는 이미 죽어버린 스물아홉의 제갈세가인과 한쪽 팔을 잃은 모용인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무당 검수 둘과, 다쳐서 혈천교 놈들에게 잡혀있는 무당의 인물들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터벅.

자휘는 걸음을 멈추고 정중하게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자휘가 포권을 취한 채 침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혈천대원들이 크게 웃었다.

“죄송? 크하하! 생긴 건 멀쩡한 놈이 돌았구먼!”

“보니까 정의감 불타는 어린놈이 아니라 미친놈이었어!”

자휘를 보며 별놈 다 본다는 듯 우하하 웃는 대원들과는 달리 혈천대주의 얼굴 표정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대주님. 저런 꼬맹이 따윈 빨리 치워버리고 제갈세가를 지워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대주가 유독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혈천대주를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채근했다.

채근하는 부대주의 말에도 아무런 답 없이 있던 혈천대주가 자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혹시.”

시퍼렇게 빛나는 혈천대주의 눈빛이 자휘에게 향했다.

“천갑무신의 후인인가?”

그의 물음에 순간 주변이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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