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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97화 (97/200)

기갑무림 97화

남은 기둥은 두 개.

제갈세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진이었다.

한 시진이 지난다면 혈천교 놈들이 제갈세가의 정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잔혹한 살인을 벌이리란 것은 자명했다.

언덕 위에서 제갈세가의 상황을 바라보던 모용인후는 난감한 기색으로 한숨을 흘렸다.

“아직도 다른 지원은 안 온 것인가?”

고작 시간이 한 시진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직 다른 문파의 지원은 오지 않았다.

‘우리라도 제갈세가를 도와줘야겠지.’

모용인후가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무당 구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공이 변변치 못한 다른 이들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아무래도 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들이 없다 해도 상황은 별다른 차이가 없기에 모용인후는 가라앉은 음색으로 답했다.

“그러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들은 미안한 기색으로 조금 머뭇대는가 싶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저들로서는 자신들이 있어 봐야 목숨만 잃는다고 생각했겠지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파가 왜 사파나 마도와 다르겠는가?

의와 협이 살아 있어서가 아닌가.

모용인후는 도망가는 무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오지 않는 무인들.

이제 남은 이라곤 무위가 약한 제갈세가인들과 자신, 그리고 무당에서 온 아홉 명밖에 없었다.

고작 열 명.

이 작은 인원으로 무엇을 할까.

‘허어, 영웅은 다시 생기지 않음인가?’

모용인후는 옛날, 무림이 어지러웠던 시기에 나타났던 천갑무신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 * *

허벅지의 핏줄이 터졌다.

네 시진 째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경공을 전개하다 보니 체력과 내공이 바닥나고 있었다.

[몸에서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연속으로 가야가 경고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 잠깐의 쉼으로 제갈신이 목숨을 잃는다면?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무거워진 몸을 계속 움직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가야가 저녁이 지나 밤이 됨을 알려왔다. 깊은 산은 더 진한 어두움으로 물들고, 도약 삼아 밟는 나무는 시커먼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민가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반 시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말에야 내 발은 잠깐 멈췄다.

뜨겁게 달아오른 종아리와 허벅지.

고통이 훅 솟아올랐다.

그러나 내 눈은 아픈 다리보다 검게 변한 하늘로 향했다.

“어두워졌으니 상관없겠지.”

진천비를 사용함에도 줄인 시간은 삼분지 일.

원래대로라면 최소 사분지 일로 줄어들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진천비를 사용해서 관도나 민가의 길의 이용할 수는 없었다.

이젠 밤이 되어 사람들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진천비를 사용해도 될 터.

“민가 쪽으로 갔을 때 제갈세가에 도착하는 시간은?”

[한 시진 반 후로 예상됩니다.]

반 시진이 줄어들어 두 시진이 한 시진 반으로 변했다.

나는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의 불빛을 바라보며 품속에서 작은 목함 두 개를 꺼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허투루 쓸 수는 없기에, 멈추는 시간 동안 영단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백영단 두 개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하루에 완전 기갑화되는 시간은 반 시진.

오 년의 내공이면 되었다.

영단을 흡수하려 앉으려 하자, 뻣뻣해진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억지로 좌선을 하고 앉자 급격히 밀려들어오는 피로감.

백영단 두 개를 꺼낸 나는 망설임 없이 백영단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스르륵.

넣자마자 청량한 향을 뿜어내며 백영단 두 개가 입안에서 삽시간에 녹았다.

‘세 개째부터 효과가 반으로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원래 오 년의 내공 증진 효과를 주는 백영단이다. 두 개라면 십 년을 주어야 했으나, 반으로 줄어 오 년의 내공이 늘어나야 했다.

[영약 흡수기능으로 내공이 십 년이 늘어납니다.]

[현재 내공의 총량은 오십오 년입니다.]

내공이 십 년이나 늘어났다.

모두 합해서 한 갑자의 내공에서 오 년이 모자라는 양.

‘어차피 오 년은 곧 없어질 테지만, 많이 모으긴 했네.’

오십 년이면 이제 진천 기공 5성과 진천비급 5장을 열어도 될 내공이었다.

십 년의 내공이 단시간에 늘자 단전이 꽉 찼는지 뻐근해졌다.

그와 동시에 손끝과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상쾌함.

힘이 넘치고 있었다.

[영단의 기운으로 몸의 피로감이 사라집니다.]

[일부의 상처가 낫습니다.]

영단을 먹자, 부어올랐던 다리와 터졌던 핏줄이 스르륵 제 모습을 찾아갔다.

‘영약흡수의 기능으로 더욱 효과가 좋아진 것이겠지.’

이번이 세 개째니, 두 개를 먹어도 5년의 내공만이 늘어나야 했으나 흡수기능으로 원래의 효과를 준 것.

게다가 예전이었다면 영단을 흡수하는 데에만 한 시진 이상 소요되었다면, 지금은 숨을 열 번 쉴 정도의 시간이었다.

엄청나게 빨라진 시간임에도 영단의 효능은 훨씬 좋아지고 몸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흐읍.”

기운을 갈무리하며 숨을 들이쉬자,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손을 오므렸다가 펴자, 손가락에도 힘이 넘쳐났다.

“그럼 이제 다시 가 볼까.”

영단도 흡수했겠다, 이제 완전 기갑화가 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나는 전보다 훨씬 활기찬 몸짓으로 민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사라진 신형은 곧 어둠 속에 잠겼다.

* * *

한 시진 뒤.

살진을 이루는 열 번째 기둥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이 기둥이 무너진다면, 제갈세가는 보호막을 잃게 된다.

금이 간 기둥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살진의 위력 안에서 혈천대원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살진 속에서 놈들의 기운이라도 빠지길 바랐건만, 놈들은 마지막 기둥 앞에서도 힘이 넘쳤다.

제갈세가에서 설치한 살진은 그저 시간 벌이만 해줬을 뿐.

구긍-

흔들리던 기둥이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쿠웅!

마지막 기둥이 쓰러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 모습에 혈천대원들이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크하하! 제갈세가의 살진도 별것 아니구만!”

“이제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

살기로 두 눈을 번들거리는 혈천대원들의 눈에 제갈세가의 굳게 잠겨진 정문이 들어왔다.

이제, 저 문만 부수면 끝인 것이다.

혈천대가 제갈세가의 문을 부수려는 순간.

열 명의 무인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다!”

호기롭게 외치는 열 명의 무인들.

제갈세가의 정문 앞에서 가로막힌 혈천대원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열 명?”

“크큭, 정파 놈들 그렇게 정의를 외치더니 정작 위험에 빠지니까 꼬리를 빼고 도망을 갔나 보군.”

대원들의 비아냥을 뒤로하고 혈천대주가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다른 문파 일에 왜 간섭이지?”

혈천대 앞에 선 무인들은 무당 구검과 모용세가의 모용인후였다.

열 명밖에 안 되지만, 하나하나는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는 무인들.

“가만히 있었으면 살 것을, 죽으려고 찾아온 것인가?”

쟁쟁한 정파의 무인들을 앞에 두고도 혈천대주의 음성은 광오했다.

광오함 속에는 혈천대 앞에 선 자는 모두 죽는다는 당연한 전제가 깔려 있었다.

오만한 자신감이 두려울 만큼 잘 어울리는 혈천대주를 향해 모용인후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누가 죽는지는 해봐야 아는 것이다!”

“제 묏자리 보고 온 늙은이야 목숨이 아까울 것 없다만, 무당에서 온 너희들은 왜 굳이 여기서 있는 거지?”

무당 구검을 바라보는 혈천대주의 시릴 듯한 살기가 그들의 등줄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갈세가는 우리의 동맹이다. 당연히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일검이 검을 잡은 손잡이에 힘을 주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혈천대주가 픽하니 비웃었다.

“진짜 동맹이라면 무당의 대부분이 달려왔어야지. 간 보듯 꼴랑 아홉 명만 보내놓고는 웃기는군.”

“그건……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일검의 답에 혈천대원들이 어이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정말 너희만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건가?”

“정파 놈들이 미쳤구만.”

“호북에는 제갈세가와 무당밖에 없으니 같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일 텐데, 고작 몇 명 보내놓고 잘난 척이라니.”

“약한 놈들 잡을 땐 그렇게 잘만 모이더니 혈천교라 하니까 겁쟁이들처럼 숨었구나!”

혈천대원들의 비아냥에 무당 일검이 소리를 질렀다.

“문파간의 거리가 멀어 지원군이 오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러셔? 그런데 어쩌나?”

혈천대주가 차갑게 웃으며 무당 일검에게 일갈했다.

“지원군이 오기 전에 네놈들은 모두 뒈질 텐데.”

“……!”

분명 지원군은 올 것이다.

그러나 혈천대주의 말대로 그 전에 자신들은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죽더라도 그냥 죽지는 않는다.”

무당 일검이 손짓하자 양옆으로 네 명의 무당검수들이 합진을 만들었다.

제갈세가의 정문 앞에서 스물아홉 명의 혈천대를 향해 검을 겨누는 무당 구검.

그들의 뒤에는 모용인후가 자신의 절기인 권장을 날릴 태세를 취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혈천대주가 손을 짓쳐 들자, 스물아홉의 혈천대원들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죽여라!”

혈천대와 무당 구검, 모용인후가 한꺼번에 맞붙었다.

촤창!

대주와 부대주를 뺀 혈천대 개개인은 무당 구검이나 모용인후보다 무위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네 명이 모인 그들의 합격진은 능히 절정 무인을 상대할 수 있는 무공!

당연히 무당 검수들과 백염천수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연결되는 틈을 노리십시오!”

백염천수는 혈천교인들이 살진을 부수며 싸울 때 이미 네 명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하는가를 눈으로 익혔다.

“약점은 놈들의 발에 있습니다!”

백염천수의 말에 놀란 혈천대원들이 자신의 발을 바라보는 순간.

무당 구검의 날카로운 검기가 그들을 꿰뚫었다.

“으악!”

합격진을 이루던 한 명이 떨어져 나가자 나머지 셋의 공격에 구멍이 생겼다.

무당일검은 그들의 발 부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자 당황하여 물러나는 놈들.

일곱 개의 작은 합격진들은 열 명의 정파인들과의 싸움에서 처음엔 승기를 점했으나, 한번 약점이 뚫려 버리자 승기를 서서히 잃어갔다.

“제법인걸?”

자신이 수하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혈천대주의 목소리가 가라앉더니 시선이 모용인후를 향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혈도부를 꺼내 들었다.

“비켜라.”

그의 말에 모용인후와 싸우던 혈천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뒤로 물러섰다.

모용인후는 혈천대원들이 갑자기 싸움에서 물러나자 뒤를 돌아보았다.

맹수 같은 혈천대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등에 돋아나는 소름.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한 것도 아님에도 주변 십장의 공간은 마치 혈천대주에게 잠식된 것처럼 무거운 공기가 짓눌렀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모용인후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평소 그의 신념대로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니!

모용인후가 먼저 백염천수(白髥千手)라는 별호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권장을 혈천대주에게 전개했다.

그러나 모두 막히는 그의 공격.

여유만만한 혈천대주는 모용인후의 공격을 혈도부로 모두 쳐냈다.

“으윽!”

단지 몇 번을 휘둘렀을 뿐인데도 워낙 강력한 힘에 모용인후가 뒤로 튕겨나갔다.

“노인네가 방구석에나 있을 것이지, 왜 나서서는.”

혈도부는 튕겨 나가쓰러진 모용인후를 향해 손을 올렸다.

콰득.

모용인후의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이 솟구쳤다.

“으아악! 내 팔!”

동시에 튀어오른 모용인후의 왼팔!

혈천대주가 모용인후의 팔을 혈도부로 잘라 버린 것이다.

“크으윽.”

모용인후는 불에 덴 듯한 어깨의 고통을 애써 참으며 어깨에 점혈을 했다.

점혈하자 줄어드는 피.

그러나 모용인후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모용인후 님!”

무당 구검은 모용인후의 왼쪽 팔이 잘려 버리자 당황했다.

여기서 가장 강한 사람은 모용인후와 무당 일검.

그런 무인이 몇 수만에 혈천대주에게 당하자 당혹스러웠다.

혈천대주는 무당 구검과 고통을 애써 참는 모용인후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번 혈도부를 치켜들었을 때.

그그긍.

제갈세가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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