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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94화 (94/200)

기갑무림 94화

다음날.

객잔에서 나온 나는 돈을 주고 개인 마부와 마차를 빌렸다.

빌린 마차는 구할 수 있는 마차중에 가장 비싸고 빠른 마차였다.

오늘은 현무학관을 나온 지 구 일째 되는 날로써 내일이면 혈천교 놈들과 맞붙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전까지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하기 위해 돈을 들여서 개인 마차를 빌린 것이다.

모르는 길을 찾아가느니, 돈을 좀 쓰더라도 마차를 빌려 관도로 빠르게 가는 게 나았으니까.

‘돈이야 많으니 괜찮아.’

비싼 마차 한 대 빌리는 값 정도야 가진 돈의 만 분의 일도 안 되었다.

지난번 승부 내기 도박에서 번 돈과 진무양에게서 받은 최상급 묘안석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돈으로 빠르게 갈 방법과 시간을 얻은 것이었다.

덜컹!

마차 안에서도 수련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무슨 일입니까?”

창문으로 흘끗 바라보며 묻자, 마부가 당황스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마차의 바퀴가 돌에 걸려 부서져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갈아야 할 듯합니다.”

고개를 내밀고 마차의 밑을 보니 소리가 난 쪽의 바퀴의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마부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에 부딪혔다 해도 바퀴가 이렇게 부서진 적은 처음이라……. 최대한 빠르게 고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손 빠르게 망가진 바퀴를 떼어냈다.

‘탄 지 얼마나 됐다고 부서져?’

전투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예민해진 마음은 별것 아닌 일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어차피 놈들을 찾아가는 길이라 급할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서진 바퀴를 보자 마음 한쪽에서 불길한 예감이 솟아났다.

‘기다리는 동안 내공이라도 돌리자.’

마음도 안정시킬 겸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자리를 잡았다.

숲에 있는 넓적하고 큰 돌에 앉아 좌선하려 하는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혈천대는 보통 밤에 일을 저지르고 아침에는 화천상단의 가면을 두른 채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놈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았다.

‘왜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지금껏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였던 놈들이다.

이동을 멈췄다는 말을 듣자, 불안감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놈들의 위치는 하루 사이의 거리.

그 거리 안에 있는 곳이라면…….

입에서 급하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적의 현재 위치는?”

[적들이 이동을 멈춘 곳은 호북의 융중산 부근입니다.]

혈천교 놈들이 이동을 멈춘 곳이 하필이면 융중산이라니!

‘설마!’

그곳은 제갈세가가 있는 곳이었다.

불길한 의혹이 심장을 죄어오자 가슴이 요동쳤다.

이동을 멈춘 놈들의 움직임은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두고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것만 같지 않은가!

[적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이어진 가야의 말에 난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이동 방향은 제갈세가 쪽입니다.]

* * *

제갈세가의 가주실.

제갈신이 아버지와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아무런 예고 없이 가주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가, 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난리인가?”

제갈훈은 예고도 없이 문을 연 제갈훈을 바라보며 타박하듯 말했다.

제갈훈은 가주의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급하게 고했다.

“그것이…… 갑자기 적들이 난입하여 팔괘미혼진을 부수고 있습니다!”

“뭣이?”

제갈세가의 가주는 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앉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어떤 놈들이냐?”

“서장의 복식으로 만든 붉은 옷을 입은 놈들이라고 합니다.”

“붉은 옷?”

붉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서장의 옷. 그렇다면 혈천교인일 가능성이 컸다.

“허어! 진짜 혈천교 놈들이란 말인가!”

제갈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 숨기지도 않겠다는 듯 놈들은 혈천교 특유의 붉은 옷을 입고 제갈세가에 나타나 진을 부수고 있었다.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구나!’

긴박한 상황에서 최대한 냉정해지려 애쓰며 제갈춘에게 물었다.

“팔괘미혼진이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으냐?”

“길어야 일각. 아니, 곧 무너질 듯합니다!”

“뭐라?”

팔괘미혼진은 일류 무인들이 떼로 덤벼도 파훼법을 알지 않는 이상, 반 시진 정도는 잡아둘 수 있는 진법이었다.

그런데 고작 일각도 못 버틴다는 말에 제갈훈의 몸이 휘청였다.

우득.

몸을 바로잡으며 탁자를 거세게 움켜쥐는 제갈훈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젠장!”

그는 숨을 고르더니 제갈춘을 향해 빠르게 명했다.

“무림맹에 혈천교가 나타났음을 알려라! 그리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모조리 요청하라!”

“알겠습니다!”

제갈춘은 가주의 명에 따라 급한 발걸음으로 뛰어나갔다.

“하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제갈훈의 탄식을 듣던 제갈신이 무거운 음색으로 말했다.

“혈천교 놈들이 정말 제갈세가로 왔군요.”

숨기려 했음에도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는 떨려왔다.

아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제갈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히 세가로 아들을 불렀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부르지 않는 것인데!’

후회스러웠다.

제갈신이 그대로 현무학관에 있었다면 목숨이 위험할 위기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가주이기 이전에 아버지다.

어떻게든 아들을 지켜야만 했다.

제갈훈은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불안감을 지운 얼굴로 뒤돌아섰다.

“오늘 아침에 살진을 작동시켜 놨으니, 괜찮을 것이다.”

살진을 펼친 지 고작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혈천교 놈들이 쳐들어왔다.

만약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하늘이 노랬다.

“네 말을 따른 게 정말 천운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음 지으며 안심하라는 듯 아들에게 말했지만, 제갈신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살진이라 한들, 팔괘미혼진을 일각만에 파훼하는 적입니다.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반나절 아닙니까?”

“……그전에 무림맹이나 다른 무인들이 도우러 올 것이다. 그리고 살진의 위력이라면 혈천교 놈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지 않겠느냐?”

제갈신은 아버지를 보며 더 이상 반문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가주는 괜찮다는 듯 아들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럼 나는 상황을 보러 가야겠구나.”

“……알겠습니다.”

제갈훈은 문밖으로 나가기에 앞서,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넌 세가의 심처 근처에 있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그 안으로 들어가거라.”

“심처라니요?”

심처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갈신이 강하게 반발했다.

“말도 안 됩니다!”

심처(深處)가 어떤 곳인가.

혹시 모를 세가의 멸족을 막기 위해 설계한 곳이자, 적을 죽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이백 년 전 마교의 난 이후로 제갈세가는 은밀히 지하에 만근의 폭약을 설치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적 또한 죽이겠다는 독심으로 설치한 폭약이었다.

‘심처에 들어서는 순간, 진이 발동되면서 제갈세가는 통째로 폭파되고 만다!’

강한 보호막과 사방이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심처에 들어선 단 한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죽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이자, 적을 죽이는 덫.

적을 죽임과 동시에 모든 제갈세가의 사람들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제갈신으로서는 이름만 들어도 몸이 떨릴 만큼의 장소였다.

아들의 강한 반발에 제갈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천교 놈들의 잔악함은 너도 익히 알지 않느냐? 놈들은 우리 모두를 죽여 무림에 본보기로 삼을 것이 뻔하다.”

왜 제갈세가를 첫 제물로 삼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무림맹에 연락을 했지만, 과연 반나절 안에 몇 명의 무인이 올 수 있을까.

설사 온다 한들, 저리 강한 적들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적었다.

그 결과, 무위가 약한 제갈세가로서는 살진이 마지막 남은 방어막이었다.

살진마저 부서진다면, 남는 건 죽음밖에 없었다.

“우리가 죽을 가능성은 구 할이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 살아날 가능성은 잘 봐야 일 할.

“다 죽을 바엔 놈들도 죽이라는 것이다. 네 손으로 복수를 하고, 살아남아서 세가를 이어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처를 작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갈세가의 가주와 적장자뿐.

지금 제갈훈은 아들에게 적들을 죽이고 너라도 살아남으라 말하고 있었다.

제갈신은 울 듯한 얼굴로 간청했다.

“저 혼자 심처에 갈 수는 없습니다. 저도 아버님과 함께하고 싶으니 제발 그런 말은 거두어 주십시오.”

“안 된다. 제갈세가가 잘못된다면 너라도 살아서 가문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세가가 없어지는데 저 혼자 살아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죽더라도 제갈세가인으로서 죽고 싶습니다.”

제갈훈은 비장하게 말하는 자기 아들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심처를 여는 것은 정말 최후에 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 반나절의 여유가 있느니만큼, 그 후에 다시 제갈신에게 말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는 잠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급박하니 일단 위로 같이 가자꾸나. 그러나 정말 위험해지면 심처로 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제갈신은 알겠다고 답했으나 심처로 갈 생각이 없었다.

‘절대 나 혼자 심처로 가지 않아.’

거짓된 답에 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밖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려는 곳은 제갈세가의 가장 높은 곳.

망루의 주변으로는 세가의 주변 지형과 세가내의 건물들까지 볼 수 있었다.

제갈신은 아버지를 따라 제갈세가의 망루 위로 올라섰다.

사방이 약 다섯 장 넓이로 지어진 망루에는 제갈춘과 세 명의 장로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제갈춘이 그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 오셨습니까.”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상황은?”

“지금 팔괘미혼진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적들의 거리는 십 장. 살진을 앞에 둔 상태입니다.”

제갈춘의 말에 가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물아홉의 붉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제갈세가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겨우 서른 가까이 되는 인원으로 팔괘미혼진을 일각도 안되어 파괴하다니. 놈들 중에 절정급 인물이 있는가?”

“네. 가장 앞에선 남자가 절정급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절정급 남자를 따르는 놈 역시 높은 무위를 가진 듯합니다.”

“이상하구나. 팔괘미혼진은 절정급 무인이 최소 넷은 있어야 파훼가 빠르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제대로 된 절정급은 하나지 않느냐?”

“그 이유는 남은 놈들 네 명마다 합격진을 펼치는데, 그 위력이 절정급 무위에 버금갑니다.”

제갈춘의 말에 가주가 굳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절정급 무인이 여덟 명이나 있는 것과 다름없겠구나.”

십장앞에 설치된 살진이 작동한다 해도, 여덟의 절정급 무인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일 장마다 견디는 시간은 반 시진.

십 장이니, 다섯 시진이 지나면 살진은 깨져 버린다.

“무림맹과 다른 문파들에게 도움 요청을 보냈느냐?”

“예. 우선 급전으로 보내긴 했으나, 적이 혈천교이다 보니 얼마나 무인들을 보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제갈훈이 깊은 탄식을 삼켰다. 제갈세가만 하더라도 타 문파가 같은 위험에 처했다면 과연 제대로 된 무인을 내줄 수 있을까?

단순히 강하기만 한 무림공적 하나라면 몇이라도 내줄 테지만, 상대는 혈천교다.

‘죽을 자리에 누가 오려 하겠나.’

그저 예의상 몇이야 보내겠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무림맹의 경우는 혈천교를 어떻게든 잡아야만 했기에 적극적일 가능성이 그나마 컸다.

“문제는 시간이로군.”

이제 남은 시간은 다섯 시진.

이 안에 무림맹에서 제대로 된 무인이 파견된다면 제갈세가가 살아날 확률이 삼 할로 올라간다.

그렇지 않다면.

‘남은 것은 모두의 죽음뿐이다.’

어두운 제갈세가주의 시선이 높은 망루 위를 여유만만하게 바라보는 혈천대주와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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