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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92화 (92/200)

기갑무림 92화

그 시각, 제갈세가에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전서구가 매단 것은 종이가 아닌 핏물이 번진 찢긴 옷이었다.

“흠, 이건 하오문의 전서구 같은데.”

하오문과 개방이 정보를 모으는 곳이라면 제갈세가는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판을 짜는 역할을 했다.

제갈세가의 담당자는 이 전서구가 하오문의 것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왜 이런 걸 보낸 거지?”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찢긴 옷을 펴자, 피로 무언가 쓴 듯한 자국들이 보였다.

그러나 비를 맞아서인지 대부분은 알 수 없는 검붉은 번짐만이 남아있었다.

딱하나 남아있는 글자는.

‘혈(血).’

이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제갈세가의 방계 혈족인 제갈춘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내용물이 피로 쓰인 옷임을 감안할 때 무언가 사달이 일어났음이 직감적으로 느꼈다.

“하오문 지부 중 문제가 생긴 곳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제갈춘은 바로 정보각으로 내려가 혹시 하오문과 관련해 연락이 온 것이 있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정보가 전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려서인지 하오문 관련 정보나 연락은 없었다.

‘하오문지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곧 연락이 올 테지.’

그러나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기에 제갈춘은 생각에 잠겨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만약…… 제갈세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경고를 보낸 것이라면?’

그러니 제갈세가에 혈서를 적어 보낸 것일 테다.

급하니 어쩔 수 없이 비가 오는 날에 보냈을 것이고.

톡톡.

탁자를 치는 그의 손가락이 늦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는 전서구가 가져온 혈흔이 묻은 옷가지를 가지고 가주에게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만에 하나라도, 이것이 정말 제갈세가에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 준비를 해야만 했으니까.

제갈춘이 중앙 전각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문 앞에 서자, 가주실을 지키는 무인들이 그를 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주님을 급히 뵈어야 해서 왔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제갈춘의 말에 무인하나가 가주실에 들어가더니 잠시 후 나왔다.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제갈춘은 옷매를 가다듬고는 가주실안에 발을 들였다.

제갈가의 가주 제갈훈은 멋들어진 소나무 분재를 다듬는 중이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는 예술작품을 다듬듯 가주실 중앙에 있는 소나무 분재를 보며 물었다.

“조금 전 하오문에서 보낸 전서구가 왔사온데, 그 내용이 마음에 걸려 가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오문 어느 지부에서 온 전서더냐?”

“그건 알지 못합니다. 어디에서 왔다는 말도 없이 혈흔으로 범벅된 옷이 전서구를 통해서 왔습니다.”

혈흔으로 범벅된 옷이 왔다는 말에 그제야 제갈훈이 고개를 들었다.

“내용은 없이 혈흔만 있었나?”

“원래 피로 글을 썼는데, 비를 맞아 내용이 번진 듯합니다. 대부분 글자는 보이지 않고 전서구의 다리 쪽에 꽉 묶여 그나마 비가 닿지 않은 글자는 혈(血)입니다.”

“혈(血)이라.”

가주는 분재를 다듬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서탁에 천천히 앉았다.

“저희에게 급히 무언가를 경고하려고 보낸 듯합니다.”

제갈춘의 말에 가주가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혈이란 말에 바로 떠오르는 위험은 혈천교다. 그러나 혈천교는 암중에서는 활약했으나 무림에 대놓고 나선 적은 없었다.

경고를 하는 것이 진짜 혈천교 때문이라면 제갈세가를 무림에서 가장 먼저 치겠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왜?

‘혈천교가 많은 문파를 놔두고 굳이 무위가 약한 제갈세가를 목표로 삼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혈천교와 제갈세가와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네 생각은?”

가주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제갈춘에게 물었다.

“제가 걱정하는 일이 기우이길 바랍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위험이 생긴다면 미리 막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혈서 하나로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피신할 수는 없으니 살진을 열 것을 건의합니다. 또한 무림맹에도 도움 요청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갈훈이 잠시 고민하고 답했다.

“일단 무림맹에는 오늘 있는 내용을 보내는 것이 낫겠지. 그러나 살진을 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살진(殺陳).

진법에 뛰어난 제갈세가가 방어와 공격을 목적으로 만든 진법이다.

매우 살상력이 높아 살진을 편다면 아무도 제갈세가에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었다.

“살진을 개진하면 제갈세가 밖으로 아무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지 않느냐? 무턱대고 펼칠 수는 없다.”

확실하지도 않은 경고에 너무 과한 대처였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살진까진 아니더라도, 제갈인들만 다닐 수 있는 진까지는 허용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팔괘미혼진은 어떻습니까?”

팔괘미혼진은 살상력은 낮으나, 적을 가두어 시간을 끄는 데 효과적인 진법이었다.

이 정도라면 제갈신도 충분히 풀 수 있는 진법.

제갈세가의 성인이라면 대부분 들고 날 수 있는 방어진이었다.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달간 팔괘미혼진을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겠다. 그 후엔 상황을 봐서 진을 해제하지. 대신.”

제갈훈은 제갈춘을 보며 씩 웃었다.

“장로들은 네가 설득하도록.”

“……알겠습니다.”

장로들을 설득하라는 말에 대답한 제갈춘의 얼굴이 똥 씹은 얼굴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로들을 설득하려면 최소 하루 이상은 그들에게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 하나 희생해서 가문의 위기를 막는다면야!’

제갈춘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가주실을 나갔다. 아마도 바로 장로들을 설득하러 가는 것일 테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훈은 씩씩하게 나가는 제갈춘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지우고는 제갈춘이 가져온 것을 바라보았다.

“혈천교가 나타났다면 무림맹에 보낼 것이지, 왜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보낸 걸까?”

혈천교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림맹이 더 적격임을 하오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제갈세가로 보냈다는 것은.

무림맹보다 제갈세가가 관련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흠. 제갈신이 올 때까지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얼마 전 제갈신으로부터 현무학관에서 출발했다는 전서구를 받은 그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괜히 빨리 오라고 했나?”

제갈훈은 하필이면 그의 외동아들이 올 시기에 이런 일이 터지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현무학관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제갈신은 일찌감치 제갈세가로 떠났고, 하후홍과 모용설화 역시 각자의 가문으로 출발했다.

다른 생도들 또한 전부 각자의 본가로 간 상태.

현무학관에는 무량후와 자휘, 그리고 몇 명의 사용인들만이 남았다.

“넌 네 집으로 안 갈 생각이더냐?”

홀로 남은 자휘와 같이 식사를 하며 무량후가 물었다.

“원래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한 번쯤 가 보는 것도 좋을 테지.”

사실 진짜로 진가장에 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혈천교인을 찾아 나서려면 학관에 목적지를 이야기 해야만 했다.

자휘는 거짓을 무량후에게 고했다.

“언제쯤 갈 생각이냐?”

“내일 출발할 생각입니다.”

가야가 알려주는 혈천교 놈들이 무한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이십 일.

내일 출발한다면 최대 십일 이내에 놈들을 마주할 것이다.

혈천교 놈들을 만날 생각을 하자,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되느냐?”

무량후는 진가장에 가는 것을 긴장한다고 생각했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긴장됩니다.”

“호랑이 간덩이를 삶아 먹은 것만 같은 네놈이 긴장되다니, 재밌구나.”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힘들거나 두려운 일에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자휘의 말에 무량후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지.”

얼마나 집에서 녀석을 구박하거나 싫어했으면 저놈이 긴장을 하는 것일까.

무량후는 노회한 눈으로 자휘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굳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 가지 말고 현무학관에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네 편한대로 하거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묶은 매듭을 풀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그 매듭이 절 옭아맬 것입니다.”

그것이 진가장이든, 혈천교든 간에 어차피 풀 매듭이라면 피하거나 숨어서만은 안됐다.

“…….”

무량후는 자휘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래. 매듭은 푸는 것이 옳다. 다만 그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매듭을 칼로 잘라내어도 되고, 천천히 풀어도 된다.

어쨌든 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무량후는 앞에 앉은 자휘라는 소년이 굳이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내가 해줄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합니다.”

무량후는 자휘가 금의환향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나 자휘는 거절했다.

언젠가는 진가장에 진짜로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므로.

“네가 없는 현무학관은 무척 썰렁하겠구나.”

무량후는 정말로 아쉬운 눈을 하고 자휘를 바라보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히 지내십시오.”

“잘 다녀오거라.”

“예.”

식사는 이미 끝났기에 자휘는 무량후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방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나는 간단히 짐을 챙기고는 서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밤에야 진천비를 사용한다 쳐도, 낮부터 경공을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공용 마차를 이용했다.

[적이 서북쪽 방향에 있습니다.]

[적의 예상 이동 경로를 예측했을 때, 이대로 간다면 5일 안에 마주칠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로써 현무학관에 나온 지 오 일째였다.

마차에 내려 객잔에서 잠시 쉬는 동안 가야는 적들의 위치와 만나게 될 시간을 말해주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오 일.

절반을 온 셈이었다.

“시간은 충분해.”

객잔에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진천기공 3성을 마무리 지었다.

혈천교 놈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내 시간은 오직 수련, 또 수련이었다.

그 결과로 그동안 꽤 힘들게 연성했던 진천망을 이제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촘촘하게 몸을 감싸는 건 아주 잠시 동안만 가능하지만 성공했다.’

이 정도라면 놈들이 가진 적미륵의 탐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테다.

“진천망을 만들었으니 이제 사 성으로 넘어가 볼까.”

진천기공을 삼 성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사 성을 열었다.

내공 40년이 필요했으나 내 지금 내공은 45년.

충분했다.

“진천기공 사 성, 금화(金化).”

금화란 말 그대로 삼성인 석화 때보다 훨씬 강한 쇠 강도의 기공이 몸에 둘러졌다.

‘뭔가 전보다 한결 발전한 느낌인걸?’

사성이 되자 안정된 진천기공은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했다.

단단해진 진천기공과 안정된 숙련도는 더욱 강한 효과를 끌어냈던 것이다.

“진천비급 4장과 연동해 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야가 진천비급과의 연동을 알려왔다.

[진천비급 4장과 연동합니다.]

[진천환(眞天環)을 엽니다.]

진천비급 4장 진천환은 진천기공을 축약한 구체 모양의 기의 응집체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진천망을 미리 만들어 둔 뒤, 진천환을 이용해 응집해 두면 된다.’

자휘의 손바닥 위로 푸른빛을 내는 작은 주먹만 한 구가 둥실 떠올랐다.

스슷.

떠오른 작고 푸른 빛덩어리는 손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동안 몇 번의 실험을 통해 진천환으로 변형한 진천망은 약 삼 일 정도 그 효능을 유지 했다.

사흘이 지나면 진천망은 그냥 기의 응집체로만 존재했는데, 이건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내 몸에 흡수되었다.

‘이걸 흡수시키지 않고 모아 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보이지 않는 무기를 얻는 것과 같았다.

“진천망을 이용하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진천망을 응집해 구로 만든 것을 또 다른 진천기공으로 감쌀 수는 없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흠. 일단은 진천환부터 열심히 연습해야겠지.’

진천망을 만드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던 것처럼 진천환 또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진천환을 잘만 운용한다면 그 효과는 무궁무진했기에 나는 마차 안에서도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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