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83화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이기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정사화합전의 최고 볼거리이자 최종 대결.
시작 전 곳곳을 맴돌던 함성은 긴장감에 수그러들고 있었다.
자휘와 사마혁이 서로를 탐색하는 잠시 동안 대련장 주변은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사마혁의 전음이었다.
[아까 했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뭐가 유효하다는 거지?]
사마혁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난 적이 될 사람이 성장하게 냅둘 정도로 자비롭지 않아.]
거만할 정도로 자신에 찬 말에 자휘가 코웃음 쳤다.
[네 쪽으로 가지 않으면 날 짓뭉개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맞다.]
서늘한 얼굴로 말하는 사마혁을 보며 자휘는 여유롭게 답했다.
[너야말로 지금이라도 내 쪽으로 오는 건 어때? 그럼 최소한 망신은 당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데.]
사마혁은 피식 웃었다.
[역시 넌 재미있어. 하지만 내가 망신당할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아.]
[그거야 결과를 까보면 알 일 아닌가?]
자휘의 답에 사마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과의 대련을 앞두고 있음에도 덤덤한 모습엔 뭔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휘라는 녀석은 무공이 뛰어난 것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생도였다.
사마혁은 자휘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네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는 검을 빼 들었다.
패도훈처럼 먼저 공격을 허용해준다는 그런 쓸데없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후회는 누가 할지 봐야 알겠지.”
자휘 역시 등 뒤에 맨 커다란 검을 천천히 꺼냈다.
“역시 쉽게는 안 넘어오는군.”
사마혁은 검을 든 채 자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개를 길들이려면 몽둥이가 최고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휘에게 몸을 날리는 사마혁.
“맞는 건 네가 될 거야.”
자휘 또한 검을 위로 치들며 사마혁을 향해 도약했다.
챙!
서로 온 힘을 다해 맞부딪치는 검은 지직 하는 마찰음을 냈다.
굳건히 버티는 자휘를 보며 사마혁의 눈이 의외라는 듯 빛났다.
되레, 검을 쥔 손에 힘줄이 돋아난 것은 그였다.
“보기보다 강한 개라는 건가?”
“개는 아니지만 네 목 따윈 한 번에 따버릴 정도로 강한 이를 가지고 있긴 하지.”
이미 팔에 부분 기갑을 작동시킨 자휘가 진천기공을 이용해 검을 옆으로 빠르게 흘려냈다.
미끄러지는 사마혁의 검.
그는 아래로 미끄러지는 검을 그대로 위로 회전시켜 자휘에게 휘둘렀다.
휘릭.
자휘는 주저앉듯 재빨리 몸을 숙이고 발을 사용해 놈의 발목 부근을 노렸다.
탓.
가볍게 피하는 사마혁.
공격을 피하며 위로 솟아오르는 그를 자휘는 노렸다는 듯 큰 칼로 횡으로 그었다.
그리고 오른 다리를 위로 치들어 놈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사마혁은 자휘의 칼을 막은 채, 각법을 전개하는 자휘의 공격을 왼 다리를 사용해 막았다.
퍽!
이어진 강한 타격에 사마혁이 눈을 크게 떴다.
“……!”
단단한 기갑에 부딪히자 사마혁이 격통을 느낀 것이다.
그는 자휘가 옷 안에 무언가를 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꽤 좋은 보호갑을 가지고 있나 보군.”
사마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을 뱉었다.
“아무리 좋은 보호갑을 입었다 한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돼지 목에 진주일 뿐이지!”
그는 한 발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온몸의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기운이 사마혁의 온몸을 감싸는 듯한 현상이 벌어지고, 주변의 공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설마, 패왕지세(敗王之勢)?”
사마혁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를 보던 사마윤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패왕지세는 사마가의 가주나, 가주가 될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패왕지세를 펼칠 수 있다니!”
“이제 고작 스물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군!”
사람들 또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걸 익히려면 40년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내공이 얼마기에 저런 기세를 내는 거지?”
“그뿐인가. 사마가의 모든 무공을 10성 이상 완성해야만 하는데, 지금 그걸 다 해냈구먼!”
패왕지세는 사마혁의 가문인 사마가(邪魔家)의 대표적인 독문무공이다.
사파 쪽이 인물들은 대부분 패왕지세에 대해 알았기에 연신 감탄을 흘리고 있었다.
‘조심해야겠어.’
자휘는 검은 기운을 내뿜는 사마혁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온몸의 피부가 살기에 맞은 듯 따끔거리며 느껴지는 무거운 압박감.
마치 물에 들어간 듯 온몸을 짓눌렀다.
반면 사마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휘를 향해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패왕지세는 왕의 기세.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간 사람은 평소의 무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기 힘들다.’
놈의 말대로 검은 기운이 잠식한 곳은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약 이 할 정도 느려진 몸.
모든 힘을 다 쏟아도 부족한 판에 이 할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큰 손해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천기공을 사용하면 돼.’
곧바로 진천기공을 몸 위로 둘렀다.
진천기공을 이용해 이화접목의 수로 놈의 기운을 흘려보내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걸 견뎌?”
패왕지세의 기운을 모두 흘려보낸 것은 아니나, 기운을 최소 반 이상 상쇄시키자 사마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런 쓸데없는 데 기운을 소모하지 말고 직접 싸우지?”
분명 압박하는 기운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닐 텐데 자휘의 말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큭, 패왕지세를 쓸데없다고 말하다니. 역시 넌 재미있는 놈이야.”
그는 자신의 영역 속에서 몸을 풀더니 말했다.
“이제 진짜로 시작해 볼까.”
마치 그동안의 격돌은 몸풀기였다는 듯 그의 기운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그와 함께 일렁이는 패왕지세.
구경하는 곳에서는 못 느낄지 몰라도 자휘는 또다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때, 가야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분 기갑 기능을 한 부위에 더 추가할 수 있습니다.]
[동화율 80에서 개방되는 능력입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
위험에 빠지자 목소리는 이 상황에 맞는 최적의 기능을 골라서 말해주었다.
‘추가 기능을 쓰겠어.’
승낙하자마자 두 다리에 나에게만 들리는 경쾌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촤라락 소리와 함께 가벼워지는 다리!
퍽!
사마혁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려쳤으나,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고 그의 검이 친 곳은 바닥이었다.
“이 상태에서 빨라?”
공격을 피한 자휘를 보며 그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곤 바로 검을 쏘아붙이는 사마혁.
채챙!
검이 빛의 충돌을 내며 부딪쳤다.
신기하게도 하나 더 개방된 부분 기갑은 필요할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다리와 팔을 옮겨 다녔다.
아무리 놈이 공격한들, 기갑에 막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자휘가 생각보다 잘 싸우자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패왕지세를 펼쳤는데도 저렇게 잘 싸우다니!”
“이름 모를 정파 놈이 사마혁보다 강하다는 말인가?”
“패왕지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전자보다 내공이 높거나, 압도적인 무위를 가졌을 때만 가능한데.”
“피하는 것도 모자라 공격까지 해?”
“정파지만 굉장한 놈이군!”
기갑의 힘과 진천기공으로 패왕지세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휘에 대해, 관중석에서 놀라운 감탄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사마혁을 보며 나오던 찬탄이 자휘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바뀐 분위기 속에서 계속 경합을 벌이는 두 사람.
워낙 빠른 공격과 방어에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으나 볼 수가 없었다.
둘의 공격을 볼 수 있는 이들은 무위가 높은 이들뿐.
유명한 사마혁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우는 자휘를 보던 진무양 또한 탄성을 흘렸다.
“저 아이가 저렇게 잘 싸웠던가?”
그의 질문에 옆에 있던 무량후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처음 현무학관에 올 때만 해도 삼류의 실력을 갖춘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무학관에 올 때 삼류였단 말인가?”
“그것도 중소문파 특혜로 온 아이였지요.”
무량후의 대답에 진무양이 입을 벌렸다.
“중소문파 특혜라면 올해 적용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 고작 몇 개월에 저렇게 발전한 것이라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진무양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사마혁과 싸우는 자휘를 내려다보았다.
“늘 안 될 것 같은 일을 해내는 아이가 바로 자휘입니다. 보고 있자면 저도 이 나이에 무언가 해보고 싶은 의지가 들게 만드는 신기한 놈이죠.”
옆에서 본 그조차 중소문파 특혜로 온 아이가 저토록 단시간에 발전할 줄 몰랐는데 진무양은 오죽할까.
“중소문파 특혜로 왔다면 가문이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꽤 흥미로운 아이군.”
“녀석을 보고 있으면 그저 감탄밖에 안 나올 정도입니다.”
칭찬에 인색한 무량후의 입에서 극찬이 이어졌다.
“자네가 그토록 칭찬하는 아이라면 결승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겠군.”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워낙 사마혁이 강하다 보니 결과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량후의 말에 진무양의 시선이 자휘에게로 꽂혔다.
무림맹주인 그는 사실 이번 최종 결승자가 사마혁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처음 보는 자휘라는 생도는 사마혁에 뒤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정사화합전을 시작으로 파란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저 아이가 사마혁을 이기게 된다면.
정사화합전의 우승을 시작으로 정, 사의 연합의 기세가 정파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자휘를 바라보는 진무양의 두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자휘와 사마혁은 연달아 공격과 방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수백 합의 공방이 지나자 사마혁은 이제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온몸의 기운을 모았다.
“이제 여기까지다.”
그의 검에 어리는 붉은 기운.
십 성의 패도지검(敗道之劍)이었다.
보기 쉽지 않은 십 성의 패도지검을 보자 사파 쪽 관중석이 술렁였다.
“패왕지세와 패도지검이라니!”
“저렇게 붉은색이면 십 성이지? 까면 깔수록 대단하네.”
“오늘 눈이 호강하는구먼!”
사마혁은 붉은 기운을 머금은 검을 서서히 들더니, 마치 불덩이를 쏘아내듯 자휘에게 검을 찔러왔다.
취릿!
그의 검을 피하지 못한다면 최소 중상을 입을 정도의 공격.
자휘는 검을 들어 몸을 보호하고는 신속하게 몸을 돌렸다.
텅!
다행히 빗나간 공격.
사마혁의 공격이 실패함과 동시에 자휘의 몸이 사마혁의 중심으로 빙그르르 돌며 검을 치들었다.
[신의 눈을 발동합니다.]
순간, 신의 눈이 발동되면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놈의 검을 덮은 붉은 기운 중에 가느다랗게 보이는 검은 실금.
‘저거다!’
자휘는 진천기공을 두른 손으로 검을 잡고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있는 힘껏 검은 실금을 향해 내리쳤다.
채앵―
느리게 울려 퍼지는 검의 비명소리.
촤아악.
실금이 약점인 듯 사마혁의 검이 천천히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검의 파편의 튀는 순간, 몸을 숙인 자휘의 검면이 사마혁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안-돼─!”
그는 어떻게든 방어하려 했으나, 원래도 빨랐던 자휘가 시간까지 느리게 만들며 하는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퍼억.
옆구리를 강타한 검면의 후속타로 자휘는 기갑을 두른 반대편 팔꿈치를 사용해 놈의 명치끝을 강하게 올려쳤다.
“크어억!”
느린 동작으로 사마혁의 몸이 뒤로 훅 밀려났다.
그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찰나.
[신의 눈을 해제합니다.]
위험이 사라지자 신의 눈이 해제되었다.
쿵!
다시 원래대로 빠르게 흐르는 시간.
사마혁은 있는 힘껏 올려친 자휘의 힘에 삼 장 밖으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사마혁은 자신의 조각난 검들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욱.”
명치끝을 세게 얻어맞은 터라, 그의 입에서는 구역질이 나왔다.
자휘는 경악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사마혁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