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78화
그의 웃음소리에 사마련주가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고 있음에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
첫 대결에서 제갈신이 아슬아슬하게 이긴 이후로 계속 지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런데 기대조차 하지 않은 아이가 압도적인 실력 차로 재수 없는 놈의 자식을 날려 버리다니.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진무양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자신에게 즐거움을 준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은 이런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했다.
‘저놈, 물건이구먼.’
진무양은 진자휘라는 이름을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윤이가 아직도 못 일어나지 않느냐? 어서 괴의를 불러라!”
“네, 알겠습니다!”
반대로 사마련주는 죽일 듯 자휘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괴의를 부르고 있었다.
아직도 사마윤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자빠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파 쪽이 당황한 사이, 정파 쪽은 아직도 자휘를 연호하고 있었다.
“이대로 쭉 우승까지 가자!”
“진자휘 힘내라!”
자휘의 이름을 연호하는 정파 쪽을 보는 사마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이복동생이 쓰러진 것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 모습.
오히려 고작 한 대 맞은 거로 저리 호들갑을 떠는 사마련주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마혁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다.
‘나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
공격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러나 너무 빨랐던 움직임.
아직 후기지수임에도 벌써 사황이라는 별호를 가진 그도 전부 보지 못했을 정도의 빠름이었다.
그런 벼락같은 공격을 사마윤은 피할 수 없었을 터.
이름 없는 장원 출신이 쟁쟁한 현무학관의 생도들을 제치고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놈은 역시 강했다.
자휘를 바라보는 사마혁의 한쪽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저런 놈이 사파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지.’
사마혁의 눈이 이번엔 중간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협 이재한에게 닿았다.
‘사협에게 쓴 방법이라면, 저놈도 이쪽에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 보물은 인재.
자휘라는 보석을 발견한 이상, 뺏을 수 있다면 빼앗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못 일어설 정도로 밟아 버리거나.
머릿속을 굴리는 사마혁의 입술이 차가운 호선을 그렸다.
* * *
이어진 대결에서 수 백합의 격돌 끝에 화산의 혜연이 적마녀, 정유란을 이겼다.
연이은 승리에 이어진 환호는 잠시.
마지막 대결에서 천반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였던 연운이 패도훈에게 져버렸다.
‘연운 선배가 질 줄이야!’
현무학관의 생도들은 그의 패배에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기대주였던 연운 선배마저 져버렸으니 이제 어쩌지?”
“삼 일간의 정사화합전 중 오늘은 첫날일 뿐이야. 아직 이틀이나 남았으니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라.”
“하! 진짜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네.”
첫날 아홉 번의 대결 결과는 삼 승 육 패였다.
여섯 번이나 사도전에게 진 것이다.
이기리라 생각했던 생도들은 거의 지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제갈신이나 자휘가 승리를 거머쥔 상황이었다.
내일 오전부터 이어질 남은 1차 대결은 세 번.
현무학관의 강자들의 대결이 남아있긴 했지만…….
“내일 전부 다 이긴다 한들, 우리 쪽 여섯에 저쪽도 여섯이야.”
“사실상 모두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 아무래도 우리 편이 불리하겠네.”
“그러게 누가 지래?”
“넌? 고작 몇 십 수만에 져놓고서는?”
별채로 들어와 이야기하던 지반의 소후와 지엽이 서로를 탓하며 티격태격 싸워댔다.
“그래도 너보단 내가 낫거든!”
“어이가 없네. 지면 진 거지 누가 나은 게 어딨냐?”
지엽이 소후를 타박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천 교관님 오신다!”
천 교관이 온다는 말에 생도들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싸우고 있던 소후와 지엽 또한 서로를 한번 노려본 후 정렬 자세를 취했다.
“천 교관님 오셨습니까?”
도준의 인사에 천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운과 천무륭은 어디로 간 거지?”
“아마도…… 사도전에 진 충격으로 인해 어딘가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도준의 말에 천교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졌으니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혜연과 진자휘는 앞으로 나오거라.”
그의 말에 혜연과 자휘가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자, 받거라.”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었다.
목함의 정체는 백영단.
무림맹주가 한 번이라도 이기는 생도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포상이었다.
백영단을 보는 생도들의 눈이 커졌다.
“백영단을 받다니 좋겠다.”
“저걸 먹으면 더 잘 싸우는 건가?”
“당연하지 않냐? 백영단 하나에 무려 오 년의 내공이 늘어나는데. 안 먹는 것보단 낫지.”
사도전과의 싸움에서 져버린 지반생도들의 눈에 질투와 부러움이 담겼다.
천교관은 자휘와 혜연에게 백영단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아닌 무림맹주님께 해야 할 것 이다.”
그는 감사 인사를 무림맹주 진무양에게 돌리고는 자휘와 혜연에게 말했다.
“백영단을 흡수하는 걸 도와주마.”
“지금 말입니까?”
“그렇다. 지금 흡수를 해야 내일 있을 대결에서 백영단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영약을 흡수하더라도 대결 바로 전에 하는 것보다 하루 전에 하는 것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알겠습니다. 천 교관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좋죠.”
“저 역시 좋습니다.”
자휘와 혜연이 승낙하자, 천교관은 제갈신과 도준을 향해 말했다.
“제갈신은 도준과 함께 주변을 지키도록.”
“예.”
이미 천교관의 도움 아래 백영단을 흡수한 제갈신은 그들을 보호하듯 앞에 진법을 깔았다.
도준 또한 진법 앞을 호위하듯 서자, 천교관은 가부좌 자세를 취한 혜연의 등 뒤로 그의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스스.
좌선한 혜연의 전신에서 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잠시 뒤, 그녀의 내공이 백영단으로 인해 오 년이 추가되자 얼굴에 기쁨의 빛이 피어올랐다.
가벼워진 몸이 된 혜연이 천교관에게 포권을 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천교관은 이번에는 자휘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휘의 등 뒤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백영단을 먹거라.”
“알겠습니다.”
가부좌를 튼 채 백영단을 입에 넣자,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영약이 녹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었기에 자휘는 자신의 뒤에 있는 천 교관에게 전음을 날렸다.
[왜 저를 정사화합전에 추천하신 것입니까?]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전음으로 자휘가 속내를 묻자, 천교관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저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약함을 싫어할 뿐,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천교관은 자휘의 등을 통해 천천히 내기를 보내면서 말을 이었다.
[넌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곧 강해질 놈이지. 그런 네게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강해질 내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니.
‘참 한결같네.’
사실 자휘 입장에서는 속을 모르는 다른 교관보다 천 교관처럼 투명한 사람이 더 나았다.
강함에 집착하다 보니, 나아지지 않는 생도들에겐 거만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노력하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감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최대한 교관님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전음을 들은 천교관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나 뒤돌아 앉아 있는 자휘는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스스슷.
잠시 뒤, 등에 손을 댄 그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영단의 기운은 한층 몸속에 잘 녹아 세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동화율이 높아지는 만큼이나 짜릿한 쾌감을 주는 영약.
천교관의 도움을 받고 나자, 자휘의 몸에는 벌써 추가로 오 년 치의 내공이 쌓였다.
‘삼십칠 년의 내공인가?’
그동안 작게 수련했던 내공과 제갈신이 건네주었던 공청석유로 만들었던 술.
그리고 오늘의 백영단까지.
자휘에게는 근 사십 년 가까운 내공이 쌓여 있었다.
“후─”
숨을 내쉬자, 한층 단전의 내공이 단단해지는 느낌.
몸에 활력이 넘쳤다.
‘이제 진천기공 사 단계로 들어서도 아무도 의심은 않겠구나.’ 내공이 사십 년이 되어야지만 진천기공 사 단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갑자기 내공을 늘릴 수 없어 무량후가 준 백영단도 쓰지 못하던 참이었는데.
이제는 가능했다.
남은 삼 년의 내공이야 동화율에서 쓰면 되는 일이었으니.
“이제 흡수가 다 되었다.”
등에서 손을 천천히 떼는 천교관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됐다는 듯 손을 들고는 천천히 일어선 천교관이 생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처럼 앞으로 한 번이라도 이긴 생도들에겐 백영단이 지급되며, 흡수까지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내일 있을 대련에 최선을 다하거라.”
“알겠습니다!”
내일은 천반의 장하준과, 운하룡, 도준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셋의 눈에는 내일 반드시 이기리라는 각오가 맴돌았다.
그 시각.
무림맹주 진무양과 사마련주 사마혁은 화려한 전각 안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은 현천검.
현천검 너머로 서로를 쏘아보는 그들은 사뭇 살벌했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마현이었다.
“흥, 그렇게 대단하다던 놈들이 막상 까보니 별것 아니던데?”
“별것 아닌 놈한테 네놈 아들이 한방에 나가떨어지나?”
“그건 우리 윤이가 방심한 것이네! 어떻게 애를 잔인하게 기절할 정도로 패나?”
“딱 한 방 맞고 기절한 게 뭐가 그렇게 잔인하다고 난리인가?”
“녀석은 내가 힘들게 얻은 놈이란 말일세. 귀한 아들이 그리 다친 게 잔인하지 않으면 뭐가 잔인해?”
사마현의 말에 진무양이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봐도 큰아들 사마혁이 훨씬 낫건만 왜 그리 망나니 같은 작은 놈을 싸고도는 게야?”
“그건…….”
사마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개인 사정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게. 하긴, 혼인도 못 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드려나?”
“뭐라?”
비죽이며 말하는 꼴이 제 아들 사마윤과 판박이였다.
“에휴, 내가 말을 말지. 그나저나 네놈은 왜 여기까지 와서 속을 뒤집는 게냐?”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나?”
그의 눈이 흘깃 가운데 있는 현천검으로 향했다.
“네놈이 현천검에 무슨 짓을 할 줄 어찌 알고 그냥 두겠나? 내가 바로 옆에서 감시해야지.”
“내가 무슨 짓을 왜 해?”
황당해하며 묻는 진무양의 얼굴을 사마현은 뾰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몰라서 묻나? 오늘만 해도 현무학관 놈들은 육 대 삼으로 졌어. 현천검을 가져갈 확률이 확 줄어든 것이지. 반면 우리 생도들이 우승할 확률은 높아진 것이고.”
“그래서 너희 쪽 생도들이 우승해서 현천검을 가지고 가야겠는데, 혹시라도 내가 이상한 짓거리를 해놓을까 봐 걱정된다는 뜻이냐?”
“맞네.”
너무도 당연하게 하는 대답에 진무양이 어이없는 한숨을 뱉었다.
“내가 무림맹주일세. 그런 내 말을 못 믿는다고?”
“무림맹주가 별건가? 깜빡 잊었나 본데 우리 바로 며칠 전까지 적이었어. 적을 못 믿는 건 당연한 게 아니겠나?”
“하, 이 사람 참.”
진무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나 사마현의 마음도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무려 오십 년간 현천검이 무림맹에 있었고, 이제 현천검을 가져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이자 조급해지는 것일 테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있으려고?”
“어차피 이틀 밤만 자면 정사화합전이 끝나는데, 이틀 밤을 새우는 게 뭐가 대수라고. 내 걱정은 하지 마시게나.”
사마현은 사파 최고의 고수였다.
진무양에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그 역시 웅혼한 내공을 가지고 있기에 삼 일 정도는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다.
그는 가운데 있는 현천검을 조심히 들어서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오십 년 전 네놈들이 눈앞에서 현천검을 가지고 갈 때,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이제 조금 있으면 이 검이 우리의 품으로 오겠구나!”
그런데…… 사마현이 현천검을 보며 감격하는 도중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스스.
사마현이 손을 대기 전까지 멀쩡했던 현천검이 먼지처럼 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