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71화
무량후가 탄 마차 안에는 왜소한 체구이긴 하나, 빛이 날 만큼 흰옷을 입은 이가 앉아 있었다.
“네놈은 출전사를 빨리 끝내서 좋군.”
앉아 있던 이가 무량후에게 먼저 격의 없이 말을 던졌다.
무량후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무림맹주처럼 한 시진 내내 말하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지.”
“그 인간은 어찌나 말이 많은지 가끔씩 입술을 꿰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무려 무림맹주의 입술을 꿰매고 싶다는 초로(初老)의 남자.
신의, 이정철이었다.
무량후는 투덜대는 그의 반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웬일로 무림맹 밖으로 나온 것이냐?”
이정철의 하나밖에 없는 친우 무량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신의 이정철은 번거로운 걸 싫어해서 어지간해서는 무림맹 밖을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겠나. 사파 쪽에서 괴의가 온다니 무림맹주가 하도 난리를 쳐대서 말이지.”
신의가 쯧 하며 혀를 찼다.
정파에 신의가 있다면, 사파에는 괴의가 있었다.
둘의 명성은 비슷했는데 이번 정사화합전에 괴의가 온다고 하자 맹주가 우리 쪽도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던 것.
“나야 자네가 오는 게 좋지. 혹시 모를 불상사가 있어도 다 해결될 것이 아닌가?”
빙그레 웃는 무량후를 보던 신의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서 안 나오려다 나온 게야. 자네에게 줄 것도 있어서 말이지.”
그는 품속에서 작은 옥색 단지 세 개를 꺼냈다. 무량후가 자휘에게 주었던 금창약이었다.
“요즘 뭐 하길래 내가 주는 금창약을 물 쓰듯 쓰는 겐가? 하도 써대길래 이번엔 세 개나 가져왔어.”
“고맙네.”
금창약을 받은 무량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죽은 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네의 금창약은 현을 살린 사람에게 줬다네. 그러니 너무 아까워하지 말아.”
현을 살린 사람이란 말을 듣자 신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량후의 절친한 친우이자 동료로서 그는 현과 홍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의는 현과 홍을 어렸을 때부터 꽤 귀여워해 주던 이였다.
“그 녀석은…… 후, 아닐세.”
신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어떤 말로도 무량후에게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았던 탓이었다.
그는 현을 살린 사람에게로 말을 돌렸다.
“현을 구해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라…….”
처음에 쉽게 답하려던 무량후의 말문이 막혔다.
막상 대답하려 하니,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도저히 모를 사람이 자휘였다.
눈만 껌뻑이는 무량후를 보고는 신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매사에 쉽게 답을 내어놓는 사람이 말을 못 해? 어떤 가문의 놈이기에 그런 건가?”
그는 궁금했다.
현의 무공 수준이 꽤 높았다. 그런 현을 구하고 무량후의 말문마저 막히게 하는 놈이라니.
최소 오대세가의 기재 정도는 되리라 생각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신의의 눈을 보고는 무량후는 헛기침을 흘렸다.
“자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으나, 그런 아이는 아니네.”
“아이?”
“음, 얼마 전 중소문파 혜택을 보고 현무학관에 들어온 진자휘란 녀석이지. 아주 똘똘해.”
“하! 지금 장난하나? 말을 들어보니 별 볼 일 없는 출신에다가 어린놈 같은데 현을 구해?”
“그러게 말일세. 그런데 그게 가능한 놈이 그놈이란 말이지.”
무량후가 말문이 막힌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자휘는 항상 예상을 깨고 무언가를 이뤄냈다. 늘 보다 보니 그러려니 하며 대단하단 생각으로 끝나는 아이인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니 영 시원치 않았던 탓이었다.
무량후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빙긋 웃고는 신의에게 말했다.
“직접 보게나.”
“보긴 뭘 봐?”
“녀석이 자네의 금창약을 써도 될 자격이 있다는 걸 말일세.”
이번에 말문이 막힌 사람은 신의였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신검이라 불리는 무량후가 이렇게까지 말한단 말인가.
그는 자휘란 소년이 무척 궁금해졌다.
“네놈이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 * *
무량후가 탄 마차를 제외하고, 다른 마차들의 정원은 네 명이었다.
자휘의 마차에는 천반의 생도들이 타고 있었는데 화산의 혜연과 천무륭, 청성의 장하준이 타고 있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명상하는 듯한 혜연과 대련에서 진 후 어딘가 멍해 보이는 천무륭.
청성의 장하준이란 생도 또한 과묵하다보니 오는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들이 입을 열게 된 것은 마차가 동정호에 다다랐을 때부터였다.
“여기가 동정호구나.”
혜연이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강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넓다.”
혜연과 천무륭은 화산과 현무학관에만 있다 보니 동정호에 처음 와본 것이다.
“이렇게 큰 강은 처음 봐.”
자휘 역시 동정호에 와본 것은 처음이라 신기한 듯 강을 바라보았다.
장하준은 말을 하지 않을 뿐, 그의 눈에도 감탄이 서렸다.
창밖으로 동정호를 구경하는 동안 마차는 관도를 따라 꽤 큰 규모의 객잔 앞에서 멈췄다.
객잔의 이름은 <삼향객잔>.
이곳은 무림맹에서 운영하는 객잔으로서 큰 수입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다.
“다들 내리거라.”
천교관의 말에 각 마차에서 생도들이 조금 들뜨면서도 긴장된 얼굴로 내렸다.
이제 이곳에서 하루 묵고 나면 내일은 정사화합전이 열리는 사협의 장원에 도착한다.
삼향객잔은 생도들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마차가 닿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들이 나와 그들을 반겼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머무시는 별채는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넓은 동정호가 한눈에 보이는 객잔의 별채는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들도 만족할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별채에 있는 여러 개의 방은 두 명에서 네 명 사이로 생도들 배정한 천교관은 생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일이면 사협의 장원에 도착한다. 저녁까지는 너희들의 마지막 자유시간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입하거나 휴식을 취하길 바란다.”
천교관의 말에 일부 생도들이 눈을 반짝였다. 동정호는 유명한 만큼 주변의 가게들도 꽤 좋은 물건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칼이 필요했는데 잘됐어.’
자휘의 경우 대련에 쓸 진짜 검이 필요했다.
생도로서 받은 것은 목검이었다.
보통의 경우 각자의 가문에서 준비된 것을 주었기에 따로 지급되지 않았다.
가문으로부터 검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이거라면 충분하겠지.’
자휘는 주머니 속의 천금패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요즘 돈을 긁어모은다는 모용세가의 천금패.
그동안 쓸 일이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쓰게 된 것이다.
‘앞으로 쓸 일이 거의 없을 테니 오늘 크게 질러도 되겠지.’
모용인후가 쓰라고 준 것이니 괜찮을 터였다.
천교관은 그 뒤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주고는 해산을 명했다.
“그럼 자기 전까지만 여기로 오면 되는 거지?”
그새 자휘 옆으로 다가온 제갈신이 조금은 신이 난 듯 말했다.
“저녁식사 전까지 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어허, 여기까지 와서 저녁까지 저 칙칙한 놈들이랑 같이 먹어야겠냐? 동정호 주변에 얼마나 맛있는 객잔들이 많은데.”
“내일부터 정사화합전 시작인데 좀 그렇지 않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오히려 맛있는 걸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라고.”
자휘는 수긍했다.
어차피 나가야 하니 나간 김에 괜찮은 저녁을 먹는다 한들, 시간이 헛되이 버리는 건 아니었다.
“어디가 맛있는지는 알고?”
“당연하지. 이 형님이 모르는 게 어디 있겠느냐?”
제갈신은 장난으로 살짝 뻐기며 말했다. 그는 제갈세가의 외동아들인 만큼 여러 군데를 많이 돌아다녔다.
동정호는 그가 자주 온 곳 중에 하나였다.
“그럼 좋은 검 파는데도 알고 있어?”
“검?”
자휘가 칼에 관해 묻자 제갈신의 눈이 허리춤에 매단 목검을 훑었다.
“하긴, 넌 검부터 사야겠구나.”
“사파 놈들 앞에서 목검을 들 수는 없잖아.”
“같은 편인 놈들도 목검가지고 지랄하는데 사파 놈들이라면…… 당연히 사야지!”
천무륭과 싸울 때, 목검가지고 어찌나 조롱하던지.
제갈신은 진짜 놈들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런데 현무학관의 대표로 나가는 자휘가 목검을 들고 나간다?
앞이 깜깜했다.
놈들의 조롱은 둘째 치고, 진짜 칼과 맞부딪혔을 때 목숨이 위험했으니까.
“괜찮은 칼을 사야겠네.”
“이왕이면 좋은 걸 사고 싶긴 해.”
현천검을 얻는 것이 목표긴 해도 그사이에 검이 필요했다.
그래도 어차피 쓸 거, 좋은 칼을 사고 싶었는데 동정호 주변을 잘 아는 제갈신이 있어 다행이었다.
“음, 어디 보자. 근처에 현철방이 있어. 거기 칼이 좋다고 하더라. 지금 가볼래?”
“응.”
둘은 삼향객잔을 나섰다.
워낙 동정호 주변의 큰 객잔이다 보니 근처에 큰 점포들도 많았다.
제갈신은 여러 곳을 지나치더니, 유독 휘황찬란한 점포 앞에서 발을 멈췄다.
“여기가 칼 종류도 많고 질도 좋아. 그런데 좀 비싸긴 해. 만약 돈이 모자라면 내가 보태줄 테니 좋은 걸 사.”
“아니야. 나도 그 정도 돈은 있어.”
돈이 있다는 자휘의 말에 제갈신의 작은 눈에 의문이 서렸다.
왜냐하면, 자휘의 사정을 잘 알던 그였기 때문이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
자휘는 천금패를 슬쩍 보여주었다.
제갈신은 천금패를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이거 천금패잖아! 이거면 충분하고도 남지. 그런데 이 귀한 걸 어떻게 얻은 거야?”
“어쩌다 보니 모용인후님께 얻었어.”
제갈신은 자휘를 새삼스레 다시 바라보았다.
금패에도 다섯 개의 급이 있었는데, 천금패라면 최상위 금패였다.
자휘는 알지 못했지만, 모용인후는 자휘에게 백지수표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휘유, 역시 능력이 좋네.”
제갈신은 자휘가 어떻게 천금패를 얻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동안 자휘가 해온 일을 보면 묻는 게 불필요 했으니 말이다.
받을 만하니 받았을 터였다.
“그럼 들어가 볼까?”
제갈신은 자휘을 데리고 현철방에 당당히 들어섰다.
들어서자 보이는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실내가 보였다.
사면의 벽이 온갖 병기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중앙에는 화려한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제갈신과 자휘를 본 점원이 다가왔다.
“몇 층을 보시겠습니까?”
현천방은 총 삼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 층이 일반적인 무기라면, 이 층이나 삼 층으로 갈수록 더욱 고가의 무기가 있었다.
제갈신은 자신의 명패를 보여주며 말했다.
“삼 층을 보고 싶은데.”
“아, 제갈세가의 귀한 손님이셨군요. 당연히 삼 층으로 모여야지요.”
점원은 처음 봤을 때 보다 더욱 고개를 숙이며 제갈신을 안내했다.
‘여기 삼 층은 돈이 있다고 해서 들어가는 곳은 아닌가 보네.’
현철방은 진귀한 무기를 팔다 보니, 자연스레 급을 나눠 대접했다.
일종의 고급화 전략으로서, 일반인들의 경우 이 층까지는 허용하되 삼층은 출입조차 못 했던 것이다.
삼 층에 올라가자, 문 앞을 지키는 고수 두 명이 보였다.
‘꽤 값이 나가는 무기인가 보지? 저런 고수들이 지키는 걸 보니 말이야.’
고수들은 점원을 보자 공손히 인사를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생각보다 점원의 지위가 높은 듯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고급스럽게 꾸민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일 층처럼 종류나 가짓수는 많지 않아도 하나하나 예기가 흐르는 무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중 자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면이 넓고 큰 칼이었다.
사선으로 음각된 무늬는 왠지 기갑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칼.
“이걸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자휘의 물음에 점원은 즉시 자휘가 고른 칼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 칼은 인야라는 명장이 만든 칼로서, 내기를 담는 데 탁월합니다. 보기와 달리 무겁지도 않고요.”
그의 말처럼 자휘가 잡은 칼은 크기에 비해서 가벼웠다.
휙휙 휘두르는데 손에 착 감기는 느낌.
“칼이 좀 크지 않아?”
“크긴 한데 마음에 드네.”
“뭐, 네가 마음에 드는 거로 사는 게 제일 좋긴 하지.”
“그럼 이 칼로 하시겠습니까?”
“네.”
자휘가 가격을 물으려는데, 삼 층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거 내가 찜한 거야. 내려놔!”
뒤를 돌아보니, 자신들과 같은 또래의 소년이 손가락질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왜 내려놔야 하지?”
어이없는 말투로 묻자 소년이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저 검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 검을 먼저 집은 건 나야.”
“그 검을 먼저 봤던 건 나라고. 당장 못 놔?”
소년은 자휘의 허리춤에 있는 목검을 보며 비웃었다.
“야, 이 거지새끼야. 이게 얼마짜리인지나 알아? 너 따위가 살 물건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