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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70화 (70/200)

기갑무림 70화

코에 혈향(血香)이 풍겨왔다.

정광량은 불길함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약 이백구십 장 거리를 이동했을 즈음, 혈향은 더욱 강렬해졌다.

곧이어 정광량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잔혹한 지옥도였다.

“……!”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녹림의 칠십이채주 중 한 명인 그의 이가 덜덜 떨려왔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뭉개진 그의 부하들의 시체와 갈라진 몸에서 나오는 대량의 피들.

그리고 그 피를 마시며 광란의 종교적 행동을 하는 이들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네, 네 이놈들!”

정광량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한 불꽃이 튀었다.

위로 솟구치는 그의 신형과 함께 도끼가 퍼런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퍼억!

부하들의 피를 마시는 놈 중 하나의 머리를 그의 도끼가 갈랐다.

죽은 놈의 뇌수가 주변에서 같이 피를 마시던 놈들에게 튀었다.

“…….”

순간, 싸늘해지는 정적.

피를 마시던 놈들의 서늘한 시선이 정량광에게 모여들었다.

‘이놈들 봐라?’

정량광은 놈들의 행동에 매우 당황했다.

보통 그의 몸집이나 무위를 보면 도망가거나 두려워해야 하는데 앞의 놈들은 전혀 그런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바로 앞에서 동료가 죽었음에도 말이다.

‘이 미친놈들은 대체 뭐지?’

불길한 기운이 정량광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때, 서늘하면서도 매우 낮은 목소리가 괴이한 정적을 갈랐다.

“넌 누구기에 우리의 식사를 방해하는 거지?”

정광량 못지않게 커다란 체구를 가진 이가 천천히 일어섰다.

푸른 옷을 입은 그의 가슴에는 ‘화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화천상단?’

그는 중소규모로 이 지역을 자주 오가던 화천상단을 잘 알고 있었다.

화천상단은 늘 통행세를 내며 이곳을 지나던 작은 상단이었다.

‘이놈들은 화천상단이 아니야!’

눈앞에 보이는 피에 환장한 놈들이 화천상단일리 없었다.

진짜 화천상단은 눈앞에 보이는 부하들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정광량은 긴장된 모습으로 자신의 애병인 도끼의 자루를 꽉 쥐었다.

“너야말로 누구기에 화천상단 흉내를 내는 거지?”

정광량의 물음에 재미있다는 듯 사내의 눈이 휘었다.

“오호라, 진짜 화천상단을 알고 있는 놈이로구나.”

그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정광량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네 부하를 찾으러 온 거지?”

그는 널브러진 시체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넌 녹림의 채주인가?”

피어오르는 정광량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유만만한 자세를 유지하며 오히려 묻는 사내.

“그렇다. 내가 녹림 칠십이채 중 삼십이채의 채주 정광량이다!”

정광량은 기세 좋게 답을 했다.

그러나 앞의 남자를 보자 그의 뇌리에 불현듯 불길한 단어 하나가 스쳤다.

‘설마…….’

그는 불길함을 지우며 등을 곧게 폈다.

“아, 그래?”

정광량의 소개를 듣자마자 잘됐다는 듯 눈을 휘는 남자.

남자의 눈동자는 매우 검고 짙었는데, 순간 붉은빛이 번득였다.

“그렇다면 무위도 꽤 높겠군. 어디 보자. 절정에 조금 못 미치는 실력인가?”

부하 하나를 죽였음에도 자신을 훑어보며 여상하게 혼잣말을 하는 놈.

정광량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의 본능은 지금 도망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부하가 마흔 명이나 잔인하게 죽은 지금.

그는 도저히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망간다 한들 살 수 있을까?’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광량은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녹림 칠십이채의 주인 중 하나다.

설사 죽더라도 그만큼의 대가를 놈들은 치러야 했다.

입술을 짓씹던 정광량은 사내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날 죽이려 그런 질문을 한 것이라면, 한번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왜지?”

“나는 녹림의 채주 중 하나다. 날 죽인다면, 네놈들은 녹림의 추격을 받을 것이다!”

녹림의 추격을 받는다는 말에 갑자기 주변의 놈들이 와하하 하며 웃었다.

앞의 사내 또한 정광량의 말에 오히려 즐겁다는 듯 말했다.

“녹림의 추적이라. 제발 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군.”

“……뭐?”

어이없이 되묻는 정광량의 질문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 우리가 혈천교인 거 눈치 챘잖아. 아니야?”

화천상단의 표두 옷을 입은 혈천대의 대주 혈도부는 정광량을 보며 입술을 찢으며 웃었다.

“네놈들의 피를 스스로 갖다 바치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지.”

그는 한쪽 손을 들었다.

“절정을 바라보는 무인이다. 그에 맞춰 사냥을 시작하도록.”

혈천대주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물여덟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정광량에게 꽂혔다.

처음으로 동료 하나를 잃은 혈천대의 눈빛은 꽤 거칠게 일렁였다.

“제기랄!”

정광량은 마지막 욕설을 내뱉고는 승냥이 같은 놈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스물여덟 개의 검이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정광량을 향해 일제히 내리꽂혔다.

일명, 혈천진(血天陳).

절정급 무인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살진(殺陳)이었다.

정광량이 혈천진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비명이 산속을 스산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에 놀란 새들이 후두둑 숲을 날아올랐다.

* * *

[적이 무한으로 오기까지 오십일 정도가 남았습니다.]

정사화합전에 출전하기 위해 나가려는 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십일이라면, 더 빨라졌는데.’

혈천대는 지금 산을 타고 무한으로 빠르게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며칠이 더 빨라진 것.

가야의 경고를 들은 자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 모습에 제갈신이 이상하다는 듯 자휘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자휘는 굳은 표정을 풀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놈들이 온다는 것을 알아도 지금으로서는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현천검을 얻는 수밖에 없어.’

가야에게 물어보니, 천갑무신의 능력은 현천검이 있어야만 완전히 발휘할 수 있다고 들었다.

무인도 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천양지차인데 기갑은 어떻겠나.

무기를 얻는다면 훨씬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

‘혹시 몰라서 동화율을 남겨 두었는데 잘됐어.’

남겨 두었던 동화율은 이제 검을 얻을 때 써야 했다.

기능을 얻을 때는 보통 많은 동화율의 개방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동화율은 30.

그 정도면 많지는 않으나 최소한의 기능은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하후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자휘야. 잘 다녀와.”

잘 다녀오라는 하후홍의 인사에, 자휘는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하후홍을 향해 웃었다.

“그래. 제갈신이랑 잘 다녀올게.”

“으응.”

그동안 늘 붙어 다녔는데 이번 정사화합전에 자휘와 제갈신이 출전하면서 최소 한 달간은 하후홍은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

하후홍이 설령 이번 재시험을 잘 봤다 한들 그로서는 낄 수 없는 자리였다.

“다치지…… 말고.”

“너도 잘 있어.”

“으응. 제갈신, 너도 잘 다녀와.”

하후홍은 인반 숙소를 나서는 자휘와 제갈신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다치지 않고, 좋은 결과 가지고 돌아올 테니 나중에 봐.”

“……알았어.”

자휘와 제갈신은 하후홍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인반 숙소를 나서려는데, 멀리서 모용설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휘야!”

급하게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

자휘는 잠깐 서서 모용설화가 오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경공까지 이용하며 빠르게 자휘 앞에선 모용설화는 숨차 보였다.

“잘 갔다 와!”

그러더니 잘 다녀오란 말을 전하는 그녀. 이 말 한마디를 해주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모용설화는 인반에 온 것이었다.

“그래. 고마워.”

자휘는 모용설화를 향해 정말 고맙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하후홍이 말을 잘랐다.

“너, 늦은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조급해진 제갈신이 말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빨리 가면 돼. 얼른 가자.”

“알았어.”

자휘는 모용설화를 돌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나 먼저 갈게!”

“응…… 조심히 잘 다녀와.”

모용설화는 자휘의 등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자휘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후홍은 왠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흥 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등을 돌렸다.

정사화합전에 출전하는 생도들은 이른 아침부터 현무학관 앞에 모였다.

자휘와 제갈신이 오고 난 후 잠시 뒤 교관들과 무량후 학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여행을 가기 알맞은 복장.

무량후는 늘어서 있는 열두 명의 생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사화합전에 출전하는 너희는 단순한 현무학관의 생도가 아니다.”

그는 인반을 시작으로 천반까지 한 명 한 명의 생도를 바라보았다.

“정파를 대표하는 무인으로서 사파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

일순 엄숙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무량후는 말을 이었다.

“너희 한 명의 잘못은 곧 정파 무림의 잘못이 된다. 그러니 행동을 조심할 것이며,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무량후의 물음에 생도들이 한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답하는 생도들을 보며 무량후는 만족스러운 듯 흰 수염을 매만졌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다툼이 일어났을 경우는 대련으로 풀어라. 어차피 너희들은 싸우러 가는 길. 분하고 억울하다면 정당한 싸움을 하면 될 것이다.”

무량후의 말에 생도들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나쁜 사파인과의 만남에서 마찰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량후는 정 참기 힘들면 대련으로 풀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싸움이 아닌, 합법적인 싸움을 하라고 말하는 그는 생도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를 위해 신의를 데려갈 생각이니, 다칠 것은 걱정 말고 최선을 다해서 싸워라.”

신의까지 온다는 말에 생도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죽지 않는 이상 싸움으로 생긴 상처는 신의로 인해 나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파인들의 잔악한 손속을 걱정했던 생도들에겐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운하룡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무량후에게 물었다.

“진짜로 무림맹주님께서도 오시는 겁니까?”

“그렇다.”

“……!”

듣긴 했지만 실제로 무림맹주를 본다는 말에 생도들의 얼굴에는 기대가 어렸다.

그도 그럴 것이, 현 무림맹주 진무양이 자타공인 정도 무림의 최고 고수였기 때문이었다.

화경을 바라보는 무림 삼원(三元).

셋에 둘은 은거 중이니, 오직 한 명 진무양만이 남아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천검 때문에 오는 것이겠지.’

굳이 오지 않아도 될 무림맹주가 오는 이유는 뻔했다.

현천검의 숨겨진 이름은 대천검.

무려 천갑무신의 검을 내놓는 자리이니 그로서는 당연히 참석해야 해야 했다. 사마련주 역시 무림맹주가 검을 잘 내놓을지 확인해야 했을 테고.

‘어쨌든 현무학관이 아니라면 평생 한 번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을 만나는 거네.’

현 정파무림의 일인자와 사파무림의 일인자.

그리고 쟁쟁한 주변 인물들까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인물들이 자신의 싸움을 보러 오는 중이었다.

“너희들의 건투를 빈다.”

건투를 빈다는 무량후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말은 끝났다.

무량후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현무학관 생도들의 대표, 운하룡이 나섰다.

“최선을 다해서 싸우겠습니다.”

운하룡이 무량후와 교관들을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서 싸우겠습니다!”

남은 생도들 역시 고개를 숙이며 각오를 다졌다.

“그럼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마차에 타도록. 짐은 탄 마차의 짐칸에 놓으면 된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생도들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총 여섯 대.

각반의 인원이 세 대의 마차를 탔고 교관들은 두 대의 마차에 나눠 탔다.

그리고 나머지 한 대에는 얼핏 보기에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 하나가 타고 있었다.

무량후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이 타고 있는 마차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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