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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68화 (68/200)

기갑무림 68화

하얀 매화가 허공에 나부꼈다.

천무륭의 검기가 흩뿌려지며 산개한 매화는 아름다웠다.

“저게 그 유명한 매화검법……?”

생도들은 천무륭의 검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매화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날카로운 기세를 머금고 있는 수많은 매화들.

자휘는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저걸 맞으면 끝이다!’

날카로운 검만 피하면 좋을 텐데.

저 녀석의 검은 허공에 검기로 만든 매화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검뿐만이 아니라 허공에 뜬 수많은 매화마저 조심해야 할 상황.

타탓!

떨어지는 매화를 목검으로 쳐내었음에도 계속 만들어지는 매화는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휘익.

잠시 머뭇거린 순간, 천무륭의 목검이 자휘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공격을 빠르게 피했음에도 목검이 자휘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으윽!”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신음.

천무륭은 곧바로 같은 곳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막히는 천무륭의 검.

타타탓!

이어진 몇 번의 공방에 주변에서 감탄사가 들려왔다.

“우와! 역시 천무륭이네!”

“끝내준다!”

“자휘라는 녀석도 꽤하는걸?”

연신 감탄을 내뱉는 생도들.

허공에 만개한 매화 사이로 보이는 둘의 격돌은 멋진 검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끝에 감도는 매화 향.

화산의 혜연은 짙은 매화 향을 맡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전보다…… 향이 더 짙어졌어.”

매화검법의 성취도가 높을수록 매화 향은 진해진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옅게 났던 매화 향이 이토록 짙어지다니.

그만큼 자신의 사제가 앞의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혜연은 자휘라는 소년을 다시 보았다.

늘 무심하고, 오만하기까지 했던 천재는 지금 자휘라는 아이로 인해 한 단계 도약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놀란 그녀와 다른 생도들이 감탄을 날리고 있을 때.

‘환장하겠네.’

정작 자휘는 속으로 욕설을 날리는 중이었다.

매사 무심한 놈이 오늘따라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게다가 지난번 대련 때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놈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매화 향 따위 못 맡게 해주는 건데!

그놈의 은혜가 뭐라고 갚겠다고 했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자휘는 눈을 번득이며 매화를 흩뿌리고 있는 천무륭을 노려보았다.

‘해보자 이거지?’

천무륭의 검은 날카로웠고, 떨어지는 매화는 주변을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만개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이를 악다무는데, 가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눈을 발동하시겠습니까?]

녀석에게 화산파의 매화검법이 있다면 내겐 기갑이 있다.

‘좋아!’

승낙을 외치자마자,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극대화된 감각으로 인해 선연하게 보이는 녀석의 얼굴과 검.

허공의 매화는 형체만 진짜 같을 뿐 흐릿한 환상으로 보이고, 기겁할 만큼 빨랐던 놈의 검이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리게 보였다.

문제는 느려진 생체의 시간에 맞춰 내 몸 역시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

완전 기갑 상태라면, 이 상황에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타아아─

나는 매우 느려진 몸으로 매화를 하나하나 쳐내고 놈의 검을 막았다.

고작 눈 한 번 깜빡일 동안 일어난 일이었기에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마치 물속에서 거대한 수압을 겨우 뚫고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

“흐으윽.”

느려진 신음이 튀어나온다.

신의 눈으로 느려진 시간을 인지하며 싸우는 것은 사실상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건 엄청난 시공간의 압력을 뚫고 나가야만 가능했다.

깊은 물속에서 엄청난 물의 무게를 견뎌내고 헤쳐 나가는 느낌이었다.

“제엔장하알─!”

욕설마저 느리게 터져 나왔다.

핏발이 선 눈.

신의 눈을 사용하며 싸움까지 하는 것은 몸에 극도의 피로감을 주고 있었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한계에 다다른 듯한 몸.

놈의 매화를 얼마 쳐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러다니.

싸우지 않을 때라면 모를까, 오래 사용하기엔 몸의 부담이 오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진천기공을 두른다면?

진천기공 특유의 매끄러운 기운으로 하여금 시공간과의 마찰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시도해 보자!’

생각과 동시에 진천기공을 펼쳤다.

가슴 부근을 시작으로 한 회오리치는 듯한 투명한 빛의 장막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스륵─

생각은 옳았다.

진천기공을 두르자 몸은 시공간이 주는 압력을 피해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진천망처럼 완전하지는 않아도, 시간의 압력을 비켜나가기엔 충분했으니까.

‘이 정도만 돼도 괜찮아!’

훨씬 편했다.

신의 눈으로 보는 외부는 매우 느리게 보이나, 정작 몸은 실제의 시간에 맞춰 움직였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진천기공을 두름으로써 몸의 제약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좋아!’

아까보다 손이 빨라진다.

투 투툭.

빠르게 소멸되어가는 천무륭의 매화들.

사라지는 매화를 보는 그의 눈이 서서히 커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길 수도 있겠다.’

나는 놀라는 놈을 보며 히죽였다.

그러나 천무륭이란 놈은 단순한 천재가 아닌 미친 괴물이었다.

휘이익.

순간, 더욱 빨라지는 그의 목검!

신의 눈을 가지고 진천기공을 두른 채 시간의 흐름을 어긋나는 나를 놈은 따라잡으려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미친……!’

나는 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놈은 경쟁자가 없고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던 상태에서도 불세출의 천재라 불렸다.

그런 놈을 괴물로 각성시키는 사람이 내가 될 줄이야.

‘괴물 같은 새끼!’

놈이 진짜 작정하고 덤비니 손이 빨라지고 있었다.

실제 시간으로 보면 빠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일 정도.

타악!

부딪히는 두 개의 목검.

목검에서 파직 하고 불꽃이 튀었다.

진천기공을 둘렀다 한들, 시간의 압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한계가 있었다.

이 괴물 새끼는 그런 나에게 거의 맞먹는 속도로 공격한 것이다.

나조차도 감탄이 나오는 천고의 재능을 가진 놈이었다.

후우웅.

놈이 검을 또다시 휘둘렀다.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오직 나.

천무륭은 마치 싸움에 빠져 무아지경이 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태에서 무아지경이라니!’

참으로 가지가지 하는 놈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몸을 뒤로 훅 꺾으며 놈의 검을 피하는데.

이번에는 천무륭이 바닥을 차고 튀어 놀랐다.

타앗.

높아지는 그의 신형의 끝에서 보이는 은은한 자색 기운!

놈은 목검에 모든 힘을 담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검을 들어 방어하려 했으나 그만, 허공의 매화에 가까이 닿고 말았다.

괴물 놈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린 탓이었다.

“허억!”

순간의 실수로 천무륭이 깔아놓은 매화란 덫에 걸리는 순간.

기를 품은 매화가 폭발했다.

[신의 눈이 해제됩니다.]

충격과 함께 해제되는 신의 눈.

신의 눈의 기능과 진천기공을 함께 쓴 상황에서 매화에 당하자, 그만 능력이 풀려 버린 것이다.

“……!”

시간은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급하게 돌변해 버리는 상황.

느린 시간 속에서도 빨랐던 놈의 공격은 제시간이 되자 훨씬 더 빨라 보였다.

“제길!”

빨라진 시간 속에서 나는 놈을 피하고자 몸을 최대한 신속하게 돌렸다.

원래 강했던 놈이 무아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지금 상태로는 천무륭에게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다고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야.’

최악인 상황에서도 굴러가는 머리.

분명 놈을 이길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시선은 우연히 어느 한 곳에 닿았다.

‘저걸 이용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하는 와중에도 놈의 공격은 이어졌다.

이제는 숫제 굴러가듯 놈을 피하는 나를 천무륭은 두더지 잡듯 계속 목검을 찍어댔다.

퍼퍼 퍽!

간발의 차로 빗나가는 공격.

나는 놈을 피하고자 옆으로 빠르게 굴렀고, 천무륭은 연달아 바닥을 찍으며 뒤쫓았다.

‘저기까지만 가면 돼!’

목표했던 일장 앞의 거리까지 몸을 최대한 빠르게 계속 굴렸다.

원했던 곳에 몸이 다다르자, 나는 급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신속하게 반대편으로 몸을 움츠렸다.

천무륭은 내가 멈추는 것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놈의 목검이 높이 치솟았다.

나는 놈의 공격을 막기 위해 움츠린 상태에서 검을 들었다.

부딪히는 목검!

그러나 내 목검은 온 힘을 다해 위에서 내려치는 천무륭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으윽.”

손목의 화끈한 통증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는 목검.

파직!

천무륭은 내 검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허공에서 자신의 검으로 갈라 버렸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쾌검이었다.

“와아!”

“천무륭이 이겼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생도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천무륭이 나를 이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천무륭은 완전히 박살 난 내 검을 한번 흘낏 보았다.

그러더니 쓰러져 있는 내게 놈이 천천히 다가왔다.

놈의 목검이 서늘함을 품은 채 내 목에 닿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천무륭.

“내가 이긴 건가?”

내게 묻는 천무륭의 얼굴은 무심함은 없고 오로지 흥분과 기쁨만이 담겼다.

마치, 처음 이긴 꼬마처럼.

그러나 그의 승리를 인정해야 할 앞의 상대는 수긍 대신 피식 웃었다.

“아니. 넌 졌어.”

“……뭐?”

졌다는 말에 천무륭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우기지 마. 누가 봐도 내가 이겼어.”

말도 안 된다는 놈의 표정.

천무륭의 으르렁대는 말투에 나는 턱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저 금, 안 보여?”

“금?”

그의 시선이 내가 가리킨 턱의 방향으로 천천히 향했다.

그러자 보이는 기다란 선.

내가 저놈을 여기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굴렀던가.

그러나 노력의 대가로 천무륭의 발하나가 대련 가능한 선 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옆으로 구르기를 멈췄을 때 천무륭은 금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놈은 장외 패가 된 것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 금 넘었거든?”

“말도…… 안 돼.”

천무륭의 얼굴이 파삭하고 구겨졌다.

놈은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한쪽 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봐도 장외 패.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집념으로 어디로 도망가는지 확인도 안 한 놈의 패착이었다.

“그러게 잘 봤어야지.”

놈은 지금껏 제대로 승부를 본 적도, 진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런 작은 계략에도 넘어가 버린 것이다.

천무륭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천 교관을 바라보았으나 천 교관은 고개를 저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교관들 역시 혀를 찼다.

“천무륭 장외 실격, 진자휘 승!”

확인 사살하는 천교관의 외침에 천무륭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난생처음 겪는 패배의 충격.

멍해진 천무륭의 손에서 목검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툭.

반면, 장내는 인반의 함성으로 인해 떠나갈 듯 울렸다.

극적인 승리에 자휘를 응원했던 인반 생도들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자휘가 이겼다!”

“천무륭을 장외 패로 끌어내다니!”

“화산의 천재 천무륭을 이겼어!”

“역시 자휘야!”

처음에는 천무륭이 이긴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승리는 자휘가 거머쥐자 다른 반 생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짜 자휘라는 놈이 이긴 거야?”

“응. 마지막에 잔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잘 싸우긴 했지.”

“머리를 쓰는 것도 실력이야.”

“맞아, 기껏 잘 싸우면 뭘 해? 순간의 방심으로 저세상 가는 게 이 바닥인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는 천무륭의 장외 패였다.

천무륭이 강한 것은 누가 봐도 확실했으나, 무림은 강한 것만이 다가 아니다.

더욱이 자휘는 규칙을 어긴 것도, 불법적인 무기를 쓴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임기응변으로 화산의 천재를 이겨 버린 것.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잔악하다는 혈천교와 전투가 있을지도 몰랐다.

정파에게는 무위만 높고 순진한 천무륭보다 자휘처럼 상황을 능수능란하게 장악하는 인재가 더 필요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저런 수를 짜낼 줄은 몰랐어. 그것도 천무륭이란 천재 앞에서 말이야.”

“저놈 밑에 있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겠네.”

“어쨌든 마지막에 살아남는 놈이 제일 강한 거야.”

생도 하나가 여전히 자휘를 바라보며 홀린 듯 말했다.

“저놈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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