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67화
천무륭의 검이 옆으로 나붓이 흘렀다.
“매화접무(梅花蝶舞).”
생각보다 강맹한 모용설화의 공격을 그는 오히려 부드럽게 풀어내고 있었다.
나비처럼 춤추는 매화처럼.
매화검법 이초식이었다.
“와아! 매화검법이다!”
천무륭의 검이 매화검법을 시전하자 구경하고 있던 생도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화산의 매화검법은 쉽게 볼 수 없었기에 그들의 눈은 천무륭의 검 끝을 따라가며 연신 입을 벌렸다.
챙!
모용설화의 검은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화산의 천재 검수, 천무륭.
몇 번을 천무륭의 검과 마주한 그녀의 검이 떨어졌다.
여기까진 모두 예상한 결과였다.
“어……?”
그러나 모용설화가 보인 다음 공격에 생도들의 입이 벌어졌다.
“저건, 연검?”
검을 떨어뜨린 모용설화가 허리의 요대에서 기다란 연검을 빠르게 꺼내 든 것이다.
취리릭.
얇은 검집에 싸인 연검은 마치 뱀처럼 천무륭의 검을 휘감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주 잠깐 그의 눈이 커졌다.
“……!”
그리고 바로 앞에서 구경하던 자휘또한 속으로 조금 놀랐다.
‘무기의 개수에 대한 제한은 없지만, 의외인걸?’
자휘가 알던 모용설화는 착하기만 했던 소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현무학관에 들어오게 되면서 변했다.
변칙을 사용하더라도, 어떻게든 대련을 이어나가려는 의지가 읽혔다.
‘천무륭을 이기지 못하리란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포기보다는 도전을 택한 그녀의 선택에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탁!
모용설화의 연검이 천무륭의 검에서 튕겨 나갔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되돌아오는 그녀의 연검이 어지럽게 천무륭의 시야를 가렸다.
천무륭이 모용설화의 연검을 모두 쳐내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순간, 천무륭의 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자하검기.
검기를 피워낸 그의 검 끝이 모용설화의 연검을 갈라냈다.
천무륭의 마지막 수법에 모용설화의 연검이 두 동강 났다.
검집으로 내려쳤음에도 날카로운 자하검기가 그녀의 연검을 갈라 버린 것이다.
강한 힘을 실은 그의 공격에 모용설화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그녀의 턱밑으로 다가온 천무륭의 칼.
“아…….”
모용설화는 자신이 졌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화산의 천재라 불리는 천무륭을 상대로 최선을 다했으므로.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천 교관이 소리쳤다.
“천무륭 승!”
천무륭의 승리를 알림과 동시에 생도들이 와아 하는 소리를 질렀다.
“화산의 천재 천무륭 멋지다!”
“역시 매화검법이야!”
승자만을 환호하는 생도들의 함성 속에서 천무륭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을 위해 승자 천무륭은 잠시 휴식하고, 옆 대련장에서 이 년 차 생도들의 대련을 곧 시작한다.”
천교관의 말에 생도들은 다음 대결이 벌어지는 대련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빨리 끝나긴 했지만 일 년 차 생도들의 대결도 이렇게 흥미진진했는데 이 년 차 생도들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졌네.”
대련장에 홀로 남은 모용설화는 왠지 시원한 표정을 짓고 대련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다음 대련 순서가 하연이구나.’
원래대로라면 절친인 당하연이 옆에 와줬겠으나, 그녀는 곧 이어지는 다음 대련을 위해 다른 대련장에 있었다.
그녀가 떨어졌던 검을 줍기 위해 앞을 보는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자.”
고개를 들어보니 자휘가 자신이 떨어뜨렸던 백검을 주워 그녀에게 건네고 있었다.
“너 오늘, 멋있더라.”
“나는…….”
자휘의 말에 검을 받아드는 그녀의 손이 살짝 떨렸다.
“최선을 다했어.”
“알아.”
안다는 말에 고개 숙인 모용설화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고마워.”
그녀는 나직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검을 받았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응…….”
그녀는 살짝 손을 들어 눈에 있는 물기를 닦아내고는 환하게 웃었다.
면사에 가려졌음에도 웃는 그녀의 모습은 한순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어여뻤다.
“자휘 넌 꼭 이기길 바라.”
“그래.”
자휘의 즉답에 모용설화가 피식하고 웃었다.
“천무륭의 검. 생각보다 세더라.”
“그렇긴 하지?”
화산의 천재와 싸운다는 데도 별다른 걱정을 비추지 않는 자휘.
모용설화는 자휘의 답에 자신도 모르게 졌던 승부에 조금은 우울했던 감정이 날아감을 느꼈다.
그때, 하후홍의 목소리가 자휘를 찾았다.
“자, 자휘야! 이 년 차 생도들의 대결이 시작됐어. 어서 가자!”
“알았어. 곧 갈게.”
자휘는 하후홍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모용설화에게 물었다.
“너도 같이 갈래?”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조금 있다 갈게.”
“그럼 이따가 봐.”
“응.”
모용설화도 자휘 옆에 서서 당하연의 대련을 보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깨진 연검도 정리할 겸 조금 있다 간다고 말한 것이다.
그녀는 덩치가 큰 소년과 함께 옆 대련장으로 향하는 자휘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후홍이라고 했던가?”
느낌이 묘한 생도였다.
모용설화는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살짝 젓고는 잡생각을 털어냈다.
* * *
일차로 벌어진 대결에서 이긴 사람은 네 명이었다.
일 년 차 생도 화산파의 천무륭.
이 년 차 생도 종남파의 서지후.
삼 년 차 생도 화산파의 혜연.
사 년 차 생도 소림의 운하룡.
학년당 인원이 세 명이었기에 이긴 사람들은 부전승으로 올라온 생도와 맞붙었다.
일차 대련이 오전이었다면, 이차 대련은 오후.
휴식을 취한 생도들이 또다시 대련장으로 몰려들었다.
“이야, 역시 운하룡이야!”
“소림이 최고라니까.”
“난 소림보다 화산파가 더 좋던데.”
“맞아, 이번 천반 승부에서 화산파 출신이 두 명이나 있잖아.”
“저력은 소림이 더 세긴 하지만 요새 대세는 화산이긴 해.”
“소림과 화산이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당연히 소림이 이기지!”
“왜?”
“생각해 봐. 소림의 운하룡은 사 년 차 생도고 화산의 혜연은 삼 년 차잖아. 어떻게 이기냐?”
“하긴.”
대결을 구경하기 위해 좋은 자리를 잡은 그들은 이번 대련에서 누가 정사화합전에 뽑힐지 궁금해했다.
“넌 누가 될 것 같아?”
“삼, 사 년 차 생도들이 되겠지.”
“사파 쪽에서도 반을 골고루 섞어서 보내긴 하겠지만, 윗반을 최대한 많이 데려가려 할 거야.”
“맞아. 듣기로는 열두 명 중 반만 아랫반이면 상관없다더라.”
“아, 그래서 천반에서 여섯 명을 뽑는 거구나.”
대결에서 이긴다 한들, 가장 강한 이들을 뽑아 가야 하는 정사 화합전에서 데려갈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 년 차 생도인 천검문의 도준은 제외하고 남은 다섯 자리는 삼, 사 년 차 생도들이 차지할 가능성이 컸다.
“소림의 운하룡과 무당파의 연운, 청성파의 장하준하고 화산파의 혜연이 뽑히겠네.”
사 년 차 생도는 세 명.
삼 년 차 역시 세 명이었으나, 황보인후의 경우 지난 현무대전 때 지반과 개떼 싸움을 벌인 후로 몸을 다쳤다.
이번 대결에서는 아예 참석하지 못한 상태.
황보인후가 빠짐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사화합전은 혜연이 참석하게 될 것이다.
“그럼, 천 교관의 추천은 누가 받을까?”
“글쎄.”
“아마도 천무륭이나 종남의 서지후가 받지 않겠어?”
“그렇겠지.”
생도들이 정사화합전에 가는 생도들을 맞히는 사이, 자휘와 천무륭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일 년 차 생도 천무륭과 진자휘는 나와라.”
천교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천무륭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고다, 천무륭!”
“이겨라, 천무륭!”
그러자 반대편 쪽에서 인반 생도들의 소리가 커졌다.
“승리는 자휘의 것!”
“이겨라 진자휘!”
인반 생도들이 목이 터져라 자휘를 연호하자 다른 반 생도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자휘?”
“아, 전에 현천관 12관을 최단 시간에 돌파했다는 그 신입생도?”
“맞아. 게다가 인반에서 천반까지 승급을 한 번에 했다지?”
“휘유, 난 놈이군.”
구경하던 생도들의 눈이 천무륭을 보다가 자휘에게 향했다.
“그래도 천무륭한테는 못 비비지.”
“당연한 거 아니야. 어떻게 중소문파 특혜로 들어와 운 좋게 천반으로 승급한 녀석을 화산의 천재라 불리는 천무륭한테 갖다 대냐?”
생도들은 대부분 이번 대결의 승자가 천무륭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자휘가 이겼으면 좋긴 하겠지만, 안 되겠지?”
“이번에 맞붙는 생도가 화산에서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는 애래. 어떻게 이겨.”
“그래도 자휘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자휘는 항상 우리의 기대를 어긋난 적이 없잖아.”
“그래도 이번은 너무 세.”
“……이기진 못해도 금방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 땐 지더라도 모용설화란 생도처럼 뭐라도 해보고 졌으면 좋겠어.”
인반 생도들조차 자휘의 패배를 결정짓고 있는데, 옆에서 하후홍이 말했다.
“자휘는…… 이겨.”
그의 말에 다른 인반 생도들이 비웃었다.
“네가 자휘와 같은 방을 써서 그런지 객관적이지 못하구나. 어떻게 자휘가 이겨.”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제갈신이 반박했다.
“그거 알아? 자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에? 정말?”
“그래. 옛날부터 훨씬 강한 생도들을 상대로 싸웠음에도 진 적이 없었지. 그러니까…….”
제갈신의 가느다란 눈이 수련장에 당당히 선 자휘에게 향했다.
“자휘는 이길 거야.”
생도들이 기대 속에서 대련장에 마주 선 자휘와 천무륭은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땐 무승부였지.”
“그래.”
“오늘은 내가 이기고 말겠어.”
천무륭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늘 무심함을 겉으로 두르고 살았던 그의 입에서 이긴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만큼 천무륭이 자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말까지 하다니. 꽤 긴장되나 봐?”
“……아니야.”
“그게 긴장하는 거야.”
자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천무륭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대련 시작!”
천 교관의 외침과 동시에 자휘와 천무륭은 서로 멀찍하게 떨어졌다.
그 모습에 구경을 하던 생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공격해서 이기면 되는데 왜 탐색을 하는 거지?”
“그거야 같은 반생도니까 바로 탈락시키기 미안해서가 아닐까?”
“저 천무륭이……?”
“음, 생각해 보니 아니네. 그런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둘은 벌써 숫자를 백을 넘게 셀 정도의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약점을 찾는 듯한 그들의 눈빛.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싸워라! 싸워라!”
“천무륭은 뭐 하냐?”
“중소문파 특혜로 운 좋게 들어온 놈을 밟아버려!”
천무륭이 빨리 싸우길 바라는 일부의 입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가만히 서 있던 천무륭이 입을 열었다.
“너 먼저 와.”
자신의 검을 빼내어 드는 그.
천무륭이 검을 빼 들자 자휘 또한 검집에서 목검을 꺼내었다.
그러자 생도들이 와하하 웃어댔다.
“쟨 뭐냐?”
“얼마나 돈이 없는 거지 문파면 검 하나 없어?”
“푸하하! 목검으로 감히 매화 검수를 이기겠다고? 꿈도 크시네.”
“웃겨서 미치겠다.”
쏟아지는 조롱.
정작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천무륭은 자휘의 검이 목검인 것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네놈이 목검을 쓰니까 내가 더 유리해 보이잖아.”
그러더니 천 교관을 향해 손을 드는 그.
“왜 멈추려는 것이지?”
천 교관이 의아하게 물었다.
“검을 바꾸려 합니다.”
“검을 바꿔?”
“예. 제 검을 자휘가 쓰는 것과 똑같은 목검을 주십시오.”
어차피 자하기검을 쓰는 그에겐 검집이 있는 검이든 목검이든 상관없었다.
천 교관은 알았다고 말한 후, 자휘가 쓰는 목검과 똑같은 것을 가져왔다.
“이제 마음에 드나?”
“네.”
천무륭의 답에 뒤로 물러난 천 교관이 다시 시합의 재개를 알렸다.
“왜 검을 바꾼 거지?”
검을 바꾸는 천무륭의 돌발행동에 자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유를 짐작 못 한 바는 아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까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긴 왜야. 너와 공정하게 대결하려는 거지.”
지난번 자휘의 개인 연무실에서 있었던 대련은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대련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들고 있는 무기가 다르다면 싸움의 재미도 반감될 것이 분명했다.
“나야 뭐 상관없는데.”
자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리의 두 번째 대련을 시작해 볼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미 진천비를 발밑에 두르고 있던 자휘의 몸이 사라졌다.
“……!”
너무 빠른 자휘의 신형에 생도들은 눈을 쫓지를 못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
오직 천무륭만이 눈을 빛내며 자휘의 빠른 경공을 쫓았다.
탁!
천무륭의 검과 자휘의 검이 부딪쳤다.
곧바로 연달아 쏟아지는 타격들.
타타타탁!
분명 둘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건만, 너무 빨라 생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나만 안 보이는 거 아니지?”
당황한 생도들 사이로 천반 생도들과 교관들의 눈에는 이채가 스쳤다.
‘천무륭이야 원래 잘하는 놈이지만, 자휘라는 놈도 상당한걸?’
한치의 밀림도 없이 둘의 검은 서로를 타격하며 부딪히고 있었다.
순간, 몸을 휘도는 천무륭.
그의 목검이 수십 개로 변하며 매화의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었다.
“매화점개(梅花漸開)!”
매화검법 십이 초식이자 매화를 피우려는 천무륭을 보자 혜연의 눈이 커졌다.
‘저 녀석이 다른 생도를 상대로 매화점개를 펼친다고?’
자휘 덕분에 천무륭이 매화의 향기를 내게 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휘가 천무륭과 같은 급의 무위를 지녀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우연히 천무륭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깨졌다.
‘저 녀석, 진심이야!’
화산에서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이나 최선을 다해 덤비지 않았던 천무륭.
“매화점점(梅花漸漸)!”
그의 목검이 휘둘러지면 질수록 매화의 개수가 더해갔다.
수련장을 가득 채울 만큼.
‘천무륭이 십삼 초식까지 쓰다니!’
허공을 수 놓은 수많은 매화에 생도들과 혜연은 일순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