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64화
거칠게 자휘의 답안지를 집어 든 천교관의 눈이 커졌다.
‘명필이로군.’
답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들어오는 자휘의 필체는 유려하고도 정갈했다.
천무륭의 글자가 기어가는 지렁이 같다면, 자휘의 필체는 마치 고아한 검은색 학의 무리가 도열해 있는 형태.
보기만 해도 감탄을 자아내는 명필이었다.
‘왜 이런 필체를 가지고 무인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는 일순 자신의 눈을 교란했던 명필로 불릴만한 멋진 글자들의 향연을 애써 외면하고는 내용에 집중했다.
‘필체가 좋다고 꼭 내용이 좋은 것은 아니야.’
문제는 어려웠다.
시험의 질문 중 하나는 그가 고민하던 외공의 약점에 관한 문제를 담았다.
천교관은 절정고수이긴 하나, 외공이 약했다.
그러나 외공을 수련하려고 보니 약점이 너무나 선명했던 것.
[외공의 약점을 보완할 방법을 제시하라.]
천교관은 문제 중 하나를 외공에 대한 것으로 넣어봤다.
조그만 실마리라도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대 없이 넣은 질문이었는데.
자휘는 천교관이 고민하던 답을 서슴없이 적어냈다.
[외공의 단점은 약점인 조문에 있다. 피부를 단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답안지의 답을 보면 볼수록 천교관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진가장의 독문 무공인 진천기공의 방법을 응용하여, 기의 막으로 조문을 감싸는 것이다.]
가문의 독문 무공인 만큼 구결이나 중요 부분은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천교관은 눈이 번쩍 뜨였던 것이다.
진천기공과 외공의 장점을 혼합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론.
이걸 실제로 운용할 수 있다면, 외공의 약점은 사라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었다.
자휘의 답에는 약점이 되는 조문뿐만이 아니라 외공 자체에 기를 두를 방법이 적혀 있었다.
이 말대로만 할 수 있다면.
몸 자체가 기를 두른 무기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천교관은 동요하지 않으려 했으나, 남은 내용을 읽을수록 손이 떨려왔다.
자신이 낸 문제의 답을 넘어 그 이상을 말하는 내용이라니!
명필에 못지않은 현기가 가득한 답.
천교관의 입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열렸다.
“이걸…… 네가 생각해 냈단 말이냐?”
분명 자신의 눈으로 자휘가 답을 쓰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는 믿기지 않았다.
“네. 문제라도 있는지요?”
그를 바라보며 묻는 자휘의 눈은 맑았다. 천교관은 자휘의 깊고도 검은 총기 가득한 눈을 보며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니다. 잘 쓴 답이구나.”
그리고 눈을 들어 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훌륭하다.”
천교관의 말에 천무륭과 모용설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휘를 바라보았다.
자휘가 답을 너무 빨리 써내어 대충 쓰지 않았나 했는데.
진짜였다.
“정말 일각 안에 다 풀었던 거였어?”
“그것도…… 잘 쓰다 못해 훌륭하기까지 하다고?”
천교관의 칭찬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온 천무륭과 모용설화.
“시험시간에 잡담은 금물이다.”
그의 일갈에 자휘를 보던 천무륭은 재빨리 고개를 내렸다.
고개를 내리자 보이는 자신의 답.
시험지에 적힌 글자들은 마치 검은 지렁이들이 똥을 싸놓은 듯했다.
천무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용은 모르더라도, 언뜻 보았던 자휘의 필체와 한참을 봐야 겨우 알아보는 자신의 필체가 비교되었으니까.
‘저렇게 뛰어난 놈은 처음이다.’
무심하긴 해도 주변에서 그를 천재라 자주 말했기에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다.
거기에 화산파에서 오는 위명은 천무륭을 더욱 대단하게 보이게 했는데.
저 녀석은…….
중소문파 특혜로 들어와 온갖 기록을 갈아치우다 못해 자신의 가장 큰 문제까지 해결해 줬다.
향기가 없던 매화.
매화에 향기가 나게 되자 얼마나 기뻤던지.
저 녀석으로 인해 그의 사저와 사부님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천무륭은 인정해야만 했다.
‘천재는 내가 아니라 저놈이야.’
천무륭은 고개를 젓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지렁이 똥 같은 자신의 글을 이어나갔다.
반면, 자휘를 보는 모용설화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역시 자휘야!’
그녀는 자휘가 인반에 있다가 천반으로 옮기자마자 시험을 봐서 조금은 걱정했었다.
하지만 역시 자휘는 자휘였다.
천교관에게 첫날부터 사과를 받는 것도 모자라, 시험으로도 인정받다니.
‘칭찬에 인색한 천 교관이 훌륭하다고 말한 건 처음 들어.’
자휘가 칭찬받자 제 일도 아닌데 그녀의 광대가 괜스레 치켜올라 갔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
모용설화는 남은 시험을 최선을 다해 풀어가기 시작했다.
반면, 정작 당사자인 자휘의 얼굴은 담담했다.
“이제 가도 됩니까?”
자휘가 천 교관에게 물었다.
감탄하며 넋이 빠진 채 자휘의 답안을 보고 있던 천 교관이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가도 된다.”
그러더니 또다시 답안지를 보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
저 사람이 오만한 천 교관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천 교관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휘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자휘를 부럽게 보는 두 사람.
자휘는 두 사람의 부러운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험장을 나왔다.
“드디어 일차 시험이 끝났다.”
시험은 금방 끝나긴 했지만, 일각 동안 집중해서 쓰다 보니 몸이 찌뿌둥했다.
시험장 밖에서 기지개를 피던 자휘의 눈이 수련장 쪽을 향했다.
“이럴 땐 수련이 최고지.”
시험이 끝나자마자 바로 수련을 하러 가는 자휘.
제갈신이 봤다면 역시 수련귀라며 부르며 혀를 찼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자휘의 입장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실력은 무엇보다 중독적이었다.
중독적이다 못해 느껴지는 쾌감.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혈천교가 다가오는 긴장된 상황에서, 자휘는 수련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 * *
어두운 밤.
남궁세가의 비밀스러운 내실에서 장로들과 전대 가주가 침상에 누운 남궁비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을 제대로 섭취 못 해 더욱 말라비틀어진 그는 거무튀튀한 목내처럼 보였다.
“그렇게 잘났던 내 손자가 이렇게 되다니…….”
돌아간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는 남궁비천의 비쩍 마른 손을 쥔 늙은 전대 가주, 남궁한영은 침통한 음성을 흘렸다.
“비천이를 이렇게 만든 개자식은 어떻게 하고 있지?”
짓씹듯 내뱉은 물음에 뒤에 서 있던 장로 하나가 고했다.
“총 교관이라는 작자는 현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당연하지. 개만도 못한 그놈은 더욱 고통스러워야 한다. 우리 비천이가 그랬던 것처럼!”
남궁한영의 눈에는 새파란 살의가 넘실거렸다.
처음 그가 실패한 현천단을 먹여 주화입마에 빠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방법은 있었다.
무림맹에는 신의가 있었고, 시간은 걸릴지언정 고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총 교관이란 놈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남궁비천의 혈도를 막아버렸다.
주화입마에 기혈까지 막히자 남궁비천의 몸은 신의마저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비천이가 낫는 날, 그놈을 갈가리 찢어 개의 먹이로 줄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남궁한영의 목소리가 석실 안을 으스스하게 울렸다.
장로의 말대로 이미 총 교관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처참한 상태였다.
무림맹을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감옥에 있는 총 교관을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는 한 평의 지하 감옥에서 비명을 지를 수 없도록 남궁한영에게 생으로 혀가 뽑혔다.
그럼에도 부족하다 여긴 남궁한영은 총 교관의 두 눈을 뽑고 사지가 뒤틀리는 역천혈도법을 추가로 시행했다.
혀라도 있다면 자결이라도 하건만, 자결조차 하지 못한 채 총교관은 지옥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이 남궁비천을 이렇게 만든 벌이었다.
“하, 하라…… 버지.”
남궁비천이 삐뚤어진 입으로 침을 흘리며 남궁한영을 불렀다.
남궁한영은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자신을 찾자 분노를 애써 지우고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버…… 지는, 요?”
남궁비천은 힘들게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밤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날인데, 가주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아비는 지금 무림맹에 있다.”
“왜 무림맹에……?”
“혹시라도 오늘 문제가 생긴다면 네 아비라도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남궁한영이 메마른 손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답에 남궁비천이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들킨다 해도 남궁세가의 가주가 빠져나간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남궁비천은 지금 남궁세가가 해서는 안 될 일까지 벌이며 자신을 낫게 하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궁비천은 할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다.
살고 싶었으니까.
살다 뿐인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적미륵을 가지고 오너라.”
적미륵을 가져오란 남궁한영의 말에 지하석실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여기 있습니다.”
남궁한영의 말에 장로 하나가 긴 목함을 그에게 건넸다.
말없이 목함을 보던 그는 눈을 감았다.
이 목함을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감았던 눈을 뜨는 그의 눈빛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겼다.
오늘의 일로 설사 남궁세가가 봉문을 할지언정 그는 할 일을 해야 했다.
그것이 남궁세가를 지키는 일이었으므로.
달칵.
목함을 열자 서늘한 요기를 뿌리는 피와 같은 색의 적미륵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요기에 장로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머뭇거리던 장로 중, 곧은 심성을 지닌 유장로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태상가주님. 아무래도 이 일은 재고하심이 어떠십니까? 생각보다 적미륵의 요기가 너무 강합니다. 문제가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남궁한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써낸 장로를 쏘아보았다.
“적미륵을 얻기 위해 두 명을 죽였다.”
가뜩이나 좁은 석실은 남궁한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또한, 무림맹에서 적미륵까지 훔쳤지. 그것도 대 남궁세가인 우리가 말이다.”
장로들을 하나하나 비틀어진 눈길로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남궁비천에게 향했다.
“어차피 이 아이가 잘못되면 남궁의 핏줄은 끊어진다. 남궁세가는 이번 가주를 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지. 그런데도 멈추라는 말이냐?”
굳게 결심한 남궁한영을 보며 장로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의 말대로 지금 멈춘다고 할지라도 세가는 끝난다.
이미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남궁한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했다.
“적미륵을 꺼내거라.”
적미륵을 들고 있던 장로가 남궁비천의 앞에 적미륵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러자 비틀린 채로 누워 있던 남궁비천의 눈이 데굴 구르더니 적미륵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저, 적미륵…….”
남궁한영은 정도의 떠오르는 해였던 손자가 혈천교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적미륵을 보고 눈을 빛내자 가슴이 쓰라렸다.
‘그 개자식이 기혈을 막지만 않았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텐데.’
남궁비천을 고칠 마지막 방법은 적미륵뿐.
그의 노회한 눈이 요기를 뿌리는 적미륵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죽어서 지옥에 갈지라도, 너만은 살려놓고 말리라.’
적미륵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그가 다 뒤집어쓸 생각이었다.
그것이 설사, 죽음일지라도.
남궁한영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시작하라.”
시작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붉은 종이를 들고 있던 장로가 남궁비천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남궁한영은 자신의 앞에 놓은 적미륵의 황금빛 돌을 망설임 없이 뽑았다.
화악.
순간, 대낮처럼 밝아지는 석실 안.
붉은 요기들이 밝게 빛나며 석실 안을 가득 채웠다.
“받거라.”
남궁한영은 황금빛이 나는 돌을 남궁비천의 손에 재빨리 쥐여 주었다.
동시에 붉은 종이를 남궁비천이 읽을 수 있도록 눈앞으로 내미는 장로.
붉은 종이 안에 담긴 것은 괴상한 언어로 된 주문이었다.
남궁비천은 붉은 종이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주문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