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60화
돌아본 하후홍의 얼굴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아니, 당황스럽기보다는 표정이 일순간 깨져 보였달까.
그러나 그런 표정은 아주 찰나였다. 곧바로 평소의 표정으로 하후홍의 얼굴이 돌아온 것이다.
‘잘못 본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 녀석도 남자니 예쁜 모용설화의 얼굴을 보고 반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앞으로 나를 끌고 가는 모용설화를 잡아 잠시 멈추었다.
“설화야, 이 친구는 하후홍이라고 해.”
“안녕? 난 모용설화라고 해. 네가 자휘와 같은 방을 쓰는 친구구나.”
“어.”
그녀의 상냥한 말에 왜인지 모르게 하후홍이 뚱하게 답했다.
‘여자와 말하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건가?’
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후홍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수업 잘 듣고, 나중에 봐.”
“……응.”
내가 말을 걸자 조금은 풀어진 하후홍의 표정.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모용설화가 자휘를 잡아끌었다.
“우리 늦었어. 빨리 가야 해.”
“이렇게 이른 아침인데?”
“이른 시간이긴 해도 선배들보다 먼저 가야 하니까. 너라면 선배들보다 신입이 늦게 도착하면 좋겠어?”
그건 싫었다.
처음부터 밉보일 필요는 없었으니.
모용설화가 이끄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나는 하후홍이 우리의 뒷모습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알지 못했다.
* * *
“다행이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어.”
천반 전용 수련장에 도착한 모용설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면사를 꺼내 쓰는 그녀.
“아깐 면사를 쓰지 않아서 안 가져온 줄 알았는데?”
“그거야…….”
그녀가 말을 얼버무리다가 앞을 보며 재빨리 말했다.
“어? 천무륭이 웬일로 일찍 왔지?”
천무륭은 항상 조금 늦곤 했었는데 오늘은 자휘가 있어서 그런지 일찍 나온 듯했다.
그러나 고개만 살짝 까딱하고는 구석으로 가버리는 그.
‘여전하군, 여전해.’
자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천반 선배 생도들이 한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림맹으로 실습을 나간 오 년 차 생도를 제외하면 천반의 선배 생도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사 년 차 생도인 소림의 운하룡과 무당파의 연운, 그리고 청성파의 장하준.
삼 년 차 생도는 당문의 당가룡, 황보세가의 황보인후, 화산파의 혜연.
당문의 당하연과 형산파의 하지룡, 종남의 서지후는 이 년 차 생도였다.
신입생도인 자휘와 모용설화, 그리고 천무륭까지 모두 합해도 고작 열두 명이 전부 다인 천반.
그러나 기세만큼은 대단해서, 인반의 몇십 명을 모아놓은 것 이상의 존재감들을 발휘하고 있었다.
‘선배들일수록 늦게 오네.’
바꿔 말하면 개인적인 성향의 천반이야말로 상하 관계가 뚜렷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새벽부터 모용설화가 자휘를 찾아가 데려온 것.
자휘가 처음부터 선배들에게 미운털이 박힐까 봐서 나름의 배려를 한 그녀였다.
나는 모용설화를 흘끗 바라보았다.
사람이 많아지자 그녀가 냉담한 얼굴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익숙한 듯 바라보는 선배 생도들.
아마도 모용설화는 오직 내 앞에서만 상냥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면사도 아까만 벗은 것이구나.’
하기야, 그녀와 나는 현무학관에 올 때부터 만났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가깝긴 했다.
‘모용설화가 낯을 많이 가리나 보네.’
별다른 생각 없이 가만히 서 있는데, 멀리서 교관 하나가 이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처음 현무학관에 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천 교관을 알아?”
자휘의 말에 모용설화가 나직이 물었다.
“저 사람, 처음 반을 배정해 줬던 교관이잖아.”
내 답에 그녀가 아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여긴 왜 오는 거야?”
“천 교관은 천반을 맡은 교관이야. 교관 중 가장 강해.”
모용설화의 말을 듣고 보니 무위가 가장 강한 교관이라서 첫날부터 날 그렇게 대한 건가 싶었다.
‘그때 시험조차 치르지 않고 날 인반으로 배정했지.’
시험은 둘째 치고, 그는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중소문파의 특혜로 온 데다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나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래서 오기가 치밀어 올라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다.
일 년 안에 지반으로 승급하겠다는 말.
내 말을 듣고 무척 어이없다는 듯 웃었던 그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에 그가 왜 그렇게 웃었는지 알겠지만, 당시에는 그 웃음이 꼭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내가 지반으로 승급하면 내게 사과하겠다고 약속했었지.’
그리고 난 그 말을 지켰다.
아니, 지켰다 뿐인가.
일 년 안에 지반으로 승급하겠다는 말을 넘어 난 삼 개월 만에 천반으로 승급했다.
하후홍의 말대로 전무후무한 일을 현무학관에서 이뤄낸 것이다.
‘천 교관은 내게 사과를 할까?’
워낙 바빠 보였으니 그때의 일은 잊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천 교관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그가 천반 생도들 앞으로 다가왔다.
다부진 체격에, 큰 키.
약간은 사나운 눈빛을 가진 그는 수련장의 앞쪽에 서서 도열한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천 교관님, 안녕하십니까?”
사 년 차 생도인 소림의 운하룡이 크게 인사했다.
그러자 운하룡을 따라서 다른 생도들 역시 천 교관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천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 얼굴을 들었다.
“한 달 만이군. 잘 지냈나?”
그의 물음에 제일 먼저 답한 사람은 역시 운하룡이었다.
“저희야 늘 같습니다만.”
운하룡은 신입들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무대전에서 신입 지호연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다른 신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새로운 신입 생도 진자휘입니다.”
얼마 안 되는 천반인지라, 내 모습은 누군가에 가려짐 없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날 보는 선배 생도들의 눈빛은 약간의 호기심 또는 무감함이었다.
“새로운 신입이라.”
천 교관의 시선이 내게 찌를 듯 닿았다.
“너는 얼마 전까지 인반에 있던 녀석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의 말에 담담하게 대꾸하자 천 교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불과 삼 개월 만에 인반에서 천반으로 승급하다니 대단하군.”
그는 마치 나를 모른다는 듯 말했다.
하긴, 이 자리에서 전의 일을 말하기란 쉽지 않을 테다.
게다가 사과라니.
나는 속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그는 잠시 나를 더 바라보더니 생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무대전이 그렇게 끝나서 본관도 무척 아쉽다. 만일 혈천교인이 현무도에 오지 않았다면 현천단은 너희들 중 하나가 가져갔을 테니 말이다.”
현무대전에서 승자에게 주는 현천단은 대부분 천반 소유가 되었기에 당연하게 하는 말이었다.
설사 지반이 현천단을 차지하더라도, 그는 승급대상이 되었고 곧 천반이 되었다.
이는 어찌 되었건 현천단이 곧 천반의 소유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또다시 현천단을 얻을 기회가 생겼다.”
다시 현천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천 교관을 보며 천반 생도들은 두 눈을 빛냈다.
“다시 치러지는 재시험의 일등에게 현천단을 주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재시험이 치러진다는 말에 생도들이 수군댔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던 현무대전이 중지되자 교관들은 의논 끝에 재시험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무대전 형식이 아닌 봄에 보았던 시험처럼 재시험을 보는 것입니까?”
운하룡의 물음에 천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봄에 있었던 방식대로 일차는 시험을 보고 이차로 대련점수를 매기지. 일차와 이차의 점수가 가장 높은 이에게 현천단이 지급된다.”
재시험이 시작된다면, 천 교관의 말마따나 역시 천반 생도 중 하나가 가져갈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 있는 열두 명 중 하나가 현천단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시험 결과에 따라 반의 구별 없이 총 열두 명이 정사화합전에 출전하게 될 것이다.”
정사화합전이라는 말에 생도들의 눈이 커졌다.
“정사화합전이라면 정파와 사파가 십 년에 한 번씩 서로의 무위를 겨루는 대회 아닙니까?”
“맞다.”
천 교관이 긍정하자 생도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말이 십 년이지, 거의 오십 년간 정사화합전은 열리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백 년 전 마교의 강한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던 정과 사는 십 년에 한 번씩 정사화합전을 열기로 했다.
그러나 천갑무신이 천마를 없앤 이후 마교의 힘이 줄어들자, 자연히 정사화합전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간간히 이어지던 정사화합전은 오십 년 전부터 사라졌던 것.
“정사화합전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혈천교가 점차 힘을 키워가는 지금, 정과 사는 다시 손을 잡을 필요성을 느낀 것이지.”
정사화합전은 정과 사의 후기지수들의 무위를 알 겸, 서로의 힘을 파악하는 자리였다.
신경 쓰이는 대회였으나, 그만큼 큰 상이 있는 대회가 정사화합전이었다.
“이번 정사화합전의 일등의 포상은 현천검(炫天劍)이다.”
현천검이라는 말에 생도들이 입을 떡 벌렸다.
무림의 십 대 명검에 이름을 올린 현천검이라니!
현천단보다 훨씬 가치 있는 보물이 현천검이었다.
“재시험에서 일등을 하고 현천단을 흡수한다면, 현천검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지. 나는 너희들이 현천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 교관의 말에 천반 생도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돈으로 구할 수 없는 현천검은 말만 들어도 탐이 나는 보물이었다.
“너희들에게 전할 말은 끝났다.”
그는 생도들을 보며 말을 끝맺었다.
천 교관이 전할 내용을 다 전했다고 생각한 운하룡이 다시 인사를 하려는데, 돌연 그가 입을 열었다.
“진자휘.”
그가 갑자기 자휘를 부르자 생도들의 시선이 자휘에게 쏠렸다.
“네게 할 말은 남았군.”
대체 신입생도에게 천 교관이 할 말이 무엇일까.
천 교관은 생도들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학 당시, 너를 무시해서 미안하다.”
천 교관은 교관 중에서 가장 강했던 만큼 자존심 또한 강했다.
그런 교관이 천반 신입 생도에게 사과라니……!
생도들의 표정이 아연하게 변했다.
“그리고 천반 승급을 축하한다.”
그는 자휘에게 승급을 축하한다는 말까지 남겼다.
천 교관이 모두의 앞에서 설마 사과할 줄 몰랐던 자휘는 당황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사과할 줄이야!’
놀란 자휘의 표정을 보던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는 강한 생도는 언제든 환영한다. 네가 더 강해지게 된다면 이런 사과 따위 천 번이라도 더 해주지.”
그는 참 앞뒤가 같은 사람이었다.
강한 자만이 대우받는 곳이 현무학관이라더니, 정말 강해지자마자 바로 사과를 날리고 더 강해지라고 하지 않나.
자휘는 그를 보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사과는 받도록 하겠습니다.”
천 교관의 사과를 받는다 말하는 자휘를 보던 생도들이 또다시 입을 벌렸다.
저 오만한 천 교관에게 사과를 받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다니.
그것도 신입 생도가 쟁쟁한 선배 생도들 앞에서 말이다.
자휘의 배짱에 선배 생도들이 혀를 내둘렀다.
자휘의 말에 천 교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입학 당시 느꼈던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자휘로 인해 현무학관이 한동안 꽤 흥미롭게 흘러갔으니.
지금까지 자휘라 한 일을 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조차도 놀랄 따름이었다.
그는 이제 정말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생도들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바로 등을 돌렸다.
인사할 순간을 놓친 운하룡이 그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하연이 슬며시 자휘 곁으로 다가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천 교관이 네게 사과를 다 하고.”
호기심 어린 당하연의 눈빛에 자휘는 뭐라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이번엔 모용설화가 살짝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입학 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궁금하긴 하나 차마 묻지 못하는 다른 생도들이 자휘를 향해 귀를 쫑긋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