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57화
“얼마 전부터 작은 문파들이 멸문을 당했거든. 방향은 서장에서부터 청해까지 무려 4개의 문파가 사라졌어.”
서장은 혈천교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서장에서부터 청해라니.
‘무한으로 오는 길과 같다.’
내 얼굴과 제갈신의 얼굴이 동시에 심각해졌다.
“문제는 그게 혈천교의 소행같다는 거야. 문파들을 살해한 수법은 녹림과 비슷한데, 녹림이 그런 무리수를 둘 리 없다는 거지.”
제갈신의 이야기를 듣고 심장이 뚝 떨어져 내렸다.
만일, 4개의 문파에 혈천교가 관계되어 있다면 그들은 날 찾으러 오는 길에 살상을 저지른 것일 테니.
“숙부가 그러는데 만약 그들이 진짜 혈천교가 맞다면 마치 뭔가를 찾는 느낌이라고 그러더라.”
“……!”
목소리가 알려온 시간은 칠십 일.
그들은 백일에서 삼십 일간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 위치가 네 개의 문파가 멸문한 곳이었다.
게다가 무림맹에서 그런 말까지 했다면.
‘혈천교는 날 찾으러 오는 길에 살생을 저지른 거야!’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나 이미 멸문해 버린 그들을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그들이 가는 길에 멸문한 문파들이 있었던 거지. 혈천교라는 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야.”
“……재해라고?”
“그래. 힘이 넘친 혈천교라는 물에 잠겨 버린 희생양이지.”
제갈신은 이번 혈사에 대해 안타깝다는 얼굴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오랜 시간 힘을 갖춘 혈천교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생긴 일인 듯해.”
“하지만 혈천교는 녹림으로 위장했을 만큼 정체를 숨기려 했잖아.”
“내 생각인데, 전면에 나서기 전에 무언가가 필요해서 다른 집단으로 위장하고 찾는 느낌이 들어.”
제갈신은 혈천교가 무림에 나서기 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나는 그에게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들은 지금껏 숨어 있었잖아. 힘이 얼마나 되길래 전면으로 나설 정도가 되는 거지?”
혈천교의 힘은 숨겨져 있기에 내가 알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정도 무림 또한 약하지 않았다.
마교에서 갈라져 나와 사술집단처럼 보이는 혈천교가 무림의 전면에 나서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
‘천갑무신의 후인이야, 그들에게 원수나 다름없으니 죽이려 한다 쳐도 전면에 나서다니.’
이건 무림을 지배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 하지 못할 행보였다.
“혈천교 놈들이 강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규모가 큰 집단이 아닌 것도 사실이야. 네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가. 하지만…….”
제갈신은 자휘를 보며 혈천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혈천교의 혈천마공은 피를 흡수해 단시간에 고수로 만들어주는 마공이야. 이 마공에 당한 무림인만 해도 상당하지. 과거 무림맹이 혈천교를 없애려 수많은 고수를 보냈지만 모두 돌아오지 못했어. 그만큼 혈천교 놈들은 강해.”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 사건으로 인해 무림맹은 고수를 많이 잃었어. 각 문파도 마찬가지고. 그 후로 무림맹은 몸을 사리게 됐지.”
천갑무신 덕에 정신을 어느 정도 차렸던 무림맹과 정파는 스스로의 힘으로 과거 혈천교를 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
기껏 나섰다가 귀한 고수들만 잃는 사태가 되어버리자, 그들은 혈천교의 일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갖지 못했다.
가져봐야 그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이니까.
“과거에도 그 정도였는데, 지금은 어떻겠어.”
제갈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힘이 넘치다 못해 무림을 지배하려는 욕심까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지.”
제갈신이 말에 나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힘은 거대했고, 혈천마공이라는 무공은 잔인한 만큼 힘을 키울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거기에 적미륵까지 더한다면…….
무림은 혈천교 밑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혈천교의 야욕을 막을 유일한 존재가 천갑무신의 후인밖에 없다니.’
알고 있었지만, 혈천교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더욱 와닿았다.
제갈신의 말에 수긍하고 있는데 그가 아쉽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들이 뭘 찾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괜히 심장이 뜨끔한 내가 물었다.
“왜지?”
“그걸 우리가 먼저 찾아서 혈천교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제갈신은 혈천교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건이라면 우리가 먼저 찾는 거고, 사람이라면 무림맹에서 보호하는 거지.”
“만약 그들이 찾는 게 사람이라면 무림맹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오히려 싸움을 앞당기는 결과가 될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사람이라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
나는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제갈신답게 그는 금방 결론을 도출해 냈다.
“설마, 천갑무신의 후인은 아니겠지?”
내가 가만히 있자 제갈신은 벌떡 일어서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며 주변을 서성였다.
“그래. 혈천교가 잔인한 일을 벌이는 건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 하지만 이렇게 문파들을 유희 삼듯 멸문시키진 않았어. 그렇다면…….”
그는 손가락을 딱하고 부딪혔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천갑무신 후인의 자취를 발견한 거야!”
제갈신은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후인이 아직은 힘이 없는 거지. 그래서 후인이 나서지 못하는 동안 놈들이 없애려 하는 거고. 그래서 놈들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손바닥까지 '탁' 치며 말하는 제갈신의 입에서 꽤 정확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난 제갈신의 추측에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제갈신이 눈을 빛내며 묻자, 나는 최대한 동요를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천갑무신의 후인이 정말 있어서 스스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의 힘을 각성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각성한 정도가 일류 무인 정도라면?”
제갈신은 잠시 생각하더니 냉정하게 답변했다.
“그렇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고 되물었다.
“왜지?”
“지금껏 혈천교가 서장에서 머물러 있는 이유는 천갑무신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야. 그런데 기껏 나타난 후인이 고작 일류 무인이라니.”
제갈신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약한 후인은 그들의 제물이 되어 무림을 침략하는 계기가 되겠지.”
“……후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후인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모르기 때문에 경거망동하지 못할 거야. 지금도 그들이 후인을 찾는다 쳐도 처음에만 살생을 저질렀을 뿐, 조심하고 있거든.”
제갈신은 무언가를 계산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짜 천갑무신의 후인이 있다면, 그가 나타날 시점은 온전한 천갑무신의 힘을 이어받은 때여야 해.”
“그 이유는?”
“그래야만 혈천교 놈들의 야욕도 막을 수 있을뿐더러 정파 무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천갑무신의 도움으로 무림은 기사회생했지만, 그것은 과거.
후인이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 봐야 되레 짐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천갑무신의 후인이면 먼저 발견하는 편이 낫다고 하지 않았어?”
내 질문에 제갈신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 발견해서 꼭꼭 숨겨두겠지. 아무도 못 찾을 곳에 말이야.”
아예 찾지 못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면 모를까, 약한 천갑무신의 후인은 그들에게 하나의 장기 말에 불과했다.
제갈신의 냉철한 말에 잠시라도 정체를 밝힐까 고민했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결론은 믿을 사람 없고, 나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거네.’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무얼 하겠나.
제갈신의 말에 서운할 필요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무림맹의 행태도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아직 천갑무신의 온전한 힘을 갖지 못한 게 아쉬울 뿐.
제갈신의 말대로 내가 나타날 시점은 천갑무신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시점이어야 했다.
‘현재 동화율은 100.’
목소리에 의하면 이 정도만 해도 일반 진천인의 최대 동화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천갑무신의 동화율은 대체 얼마였던 걸까?
기갑의 말을 들어보면 신의 육체란 것이 매우 귀한 듯했는데.
천갑무신이 일반인이거나, 마력으로 판단하는 육체의 등급이 낮다면 동화율은 그렇게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백 년 전 천마를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것은, 기갑과 연동된 진천비급의 영향이 컸다는 방증이었다.
‘해법은 진천비급이다.’
남은 동화율의 사용처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커다랗고 화려한 전각 안.
무량후에게서 적미륵을 탈취한 집단의 수장에게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분명 완전한 적미륵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모두 껍데기만 있는 것이냐?”
그는 분노한 나머지 세 개의 목함을 앞에 있는 사람에게 던졌다.
퍽!
그러자 목함이 깨지며 속에 있던 적미륵이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이마의 돌이 사라진 적미륵들.
아무 쓸모가 없게 된 것들이었다.
“……죄송합니다.”
꽤 세게 맞아 이마에 피가 흐르는데도 맞은 이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원래 네 개의 적미륵을 구해야 했지만, 현이란 놈이 사라지는 바람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뭐라? 현이란 놈이 사라져? 너희는 그것도 막지 못하고 뭘 했단 말이냐!”
수장의 고성에 청색 옷을 입은 이들은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 갑자기 놈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말한단 말인가.
말해봐야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을 알기에 사라진 현이란 남자에 대해서 청색 옷을 입은 남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책임자는 그 행방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그놈과 함께 사라진 나머지 하나가 완전한 적미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놈을 놓친 데다가 적미륵 까지 잃어버려? 이런 무능한 놈들 같으니라고!”
집단의 수장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걸 구하기 위해 무량후의 제자나 다름없는 여인을 죽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다니!”
“죄송합니다.”
복면인으로부터 장로라 불렸던 남자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허, 이를 어떻게 한다?”
수장은 장로인 남자의 뒤통수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쌌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청색 복장을 한 중년인에게 물었다.
“적미륵을 다시 구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무림맹에 있는 적미륵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쯧,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느냐? 다른 방법은 전혀 없고?”
“서장에 있는 혈천교에게서 가져오는 방법 외에는 없는 거로 압니다.”
남자의 답에 수장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기껏 무량후를 무림맹으로 불러 함정을 파놨건만.’
원하던 적미륵을 얻지 못했다.
증인이 될 수 있는 홍이라는 여인을 죽인 순간부터, 무량후와 대척점에 섰다.
안타깝지만 가져오지 못한 적미륵이 있는 그의 연구실은 포기해야 했다.
‘아마도 덫을 준비해 놨을 터.’
다시 갔다가 걸린다면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정체를 들킨다면…….
가문의 망신을 떠나서 봉문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가문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는 큰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수장은 적미륵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가의 하나뿐인 손자가 주화입마에 걸려 반병신이 되어버리다니.’
어차피 손자가 낫지 않는다면 가문의 맥은 끊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손자를 낫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적미륵.
주름이 깊게 팬 수장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내 손자를 낫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적미륵뿐이다.”
그는 또다시 해서 안 될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무슨 수를 쓰든 무림맹에 있는 적미륵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그의 명에 따라 수십의 청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