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무림-53화 (53/200)

기갑무림 53화

동시에 기갑의 목소리가 울렸다.

[적미륵의 마석을 흡수하시겠습니까?]

대답 대신 손을 마석 쪽으로 더 가까이 뻗자, 목소리는 알아들었다는 듯 곧바로 마석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하급 마석을 흡수합니다.]

흡수한다는 말과 함께 남자가 소중하게 껴안은 상자 안에서 흰빛들이 흘러나왔다.

스륵.

빛은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찰나의 시간이 빛과 함께 느려진 듯했다.

느려진 시간만큼 앞에 있는 이의 얼굴에 솜털마저 보일 정도로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진 순간.

스슷─

쏘아진 빛들은 마치 작은 번개처럼 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읍!’

짜릿한 힘이 순간 온몸으로 번졌다.

손바닥에서 팔로, 팔에서 또다시 온몸으로.

마구석으로 30이나 높은 동화율에 또다시 10이 더 차올랐다.

엄청난 포만감이 느껴지는 찰나.

[동화율 100이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동화율 100을 알려왔다.

그러나 이 빛과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리고 보이는 것.

마석의 힘을 흡수하자, 다시금 시간이 빨라졌다.

바로 뒤에서 당하면서도 남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무림맹에서 봐.”

“그래.”

그들은 곧바로 문을 열고 다른 방향을 향해 경공을 전개했다.

혹시라도 혈천교가 추적할까 봐 둘로 나뉘어 무림맹으로 향한 것이다.

한순간에 밖으로 쏘아져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잠시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저릿한 손의 감촉.

무량후의 연구실에서 무려 40의 동화율을 추가로 얻었다.

[동화율을 지금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전처럼 사용을 보류하시겠습니까?]

목소리의 물음에 난 잠시 생각했다.

“일단 보류하도록 하지.”

내 대답에 기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남녀가 나가기 전 손댔던 책장을 바라보았다.

나가면서 연구실 문 왼쪽의 붉은 책 하나를 꺼내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은 기갑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망설임 없이 붉은 책을 꺼냈다.

그그긍.

그러자 처음처럼 열리는 문.

문이 열림과 동시에 투명화가 된 몸이 밖으로 발을 디뎠다.

몸이 빠져나가자 문은 전처럼 자동으로 닫혔다.

탓.

완전 기갑화가 된 내 몸은 아주 가뿐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뒷마무리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 * *

적미륵을 가지고 무림맹으로 향하던 남자, 현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현무학관을 나오자마자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꼈던 것.

‘한둘이 아니야!’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여러 명이 자신을 쫓고 있었다.

꽤 빠른 경공을 전개함에도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과의 거리는 줄지 않았다.

‘저들은 아마도…….’

혈천교인일 것이다.

현의 이마에서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적미륵이다 보니, 사람이 많은 쪽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쫓는다는 것은 사전에 정보가 샜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팔 사이에 낀 적미륵을 꽉 잡은 채 힘껏 경공을 전개하는데, 앞쪽에 검은 복장을 한 이들이 보였다.

“……!”

자신이 가려는 곳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검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이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제길!’

현은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도 검은 복장을 한 사람은 다섯.

앞뒤에 무려 열 명이 자신을 쫓고 있었다.

‘홍은 괜찮을까?’

자신이 이런데, 홍이 멀쩡할 리 없다.

그녀도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

현은 경공을 멈추고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적미륵을 한 번 더 몸에 동여맸다.

그가 경공을 멈추자 검은 복장을 한 이들 역시 포위하듯 천천히 현에게 다가섰다.

“너희는 누구지?”

현의 물음에 검은 복장을 한 이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혹시…… 혈천교인이냐?”

혈천교인이냐는 물음에 잠시 발을 멈춘 그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게 답은 없었다.

전해 오는 것은 피부를 에일 듯한 살기.

검은 복면인들은 지금 현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죽여라.”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손짓하자, 남은 아홉 명이 칼을 뽑아 들었다.

달빛에 비치는 날카로운 칼의 검면이 현을 향해 쏟아졌다.

현 또한 급히 칼을 꺼내어 검은 복면을 한 이들의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현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여덟의 합공을 막아내긴 무리.

“크윽!”

열 합이 지나자 현의 몸에 자상이 생겼다. 급히 막아보았으나, 또 다른 곳에서 찔러오는 칼.

이번에는 현의 등을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찔렀다.

아찔한 고통.

현은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왜…… 나를 공격하는 거지?”

현이 바닥에 고꾸라지자 여덟의 칼이 일제히 현을 향했다.

“그건 네가 지닌 물건 때문이다.”

지금껏 현과의 싸움을 보고 있던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어떤 물건인 줄 알고 내놓으라는 거지?”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현은 계속 이상함을 지울 수 없었다.

적미륵을 탐내는 무리는 혈천교다.

그런데 지금 싸우는 무리는 아무리 봐도 혈천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이건…….’

정도의 초식 같았다.

하지만 정도가 왜 자신을 죽이고 적미륵을 탈취하려고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현의 눈 속에 담겼다.

그리고 그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어두운 음색으로 말했다.

“네게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구나.”

그는 손을 천천히 올렸다.

“이놈을 죽이고 물건을 가지고 간다.”

현은 자신을 죽이라는 말에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남은 힘을 다해 일어섰다.

“날 죽이려면 너희들도 죽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순간, 현의 기세가 달라졌다.

목숨까지 도외시하자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살기에 여덟 명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뭐 하는가! 어서 놈을 죽이지 않고!”

검은 옷의 우두머리가 노성을 지르자, 여덟 명이 정신을 차린 듯 현에게 덤벼들었다.

챙!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칼.

그 사이로 현은 몸을 낮추며 적을 베었다.

“컥!”

한 놈이 쓰러졌다.

현은 이 기세를 몰아 다른 한 놈에게도 칼을 내질렀다.

그러자 뒤에서 공격하는 또 다른 복면인.

휘익.

몸을 돌며 피하는 현의 뒤꿈치가 복면인의 명치를 강하게 타격했다.

“큭!”

뒤로 나자빠지는 복면인.

그러나 현 또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으윽!”

이번에는 허벅지에 칼을 맞은 것이다.

그를 보던 우두머리가 혀를 찼다.

“쯧, 곱게 죽을 것이지 마지막까지 발악이라니.”

몇 번의 칼에 더 당한 현이 입에서 울컥하고 선혈을 내뱉었다.

털썩.

결국 쓰러지고 마는 현.

그가 쓰러지자 우두머리인 남자가 손짓했다.

손짓을 기점으로 현을 공격하던 이들이 물러섰다.

“귀한 물건이 너희들의 칼질에 당했지 않느냐?”

그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복면인들을 둘러보고는 현의 몸에 묶인 봇짐을 풀어냈다.

안을 열자, 나타난 것은 두 개의 기다란 목함이었다.

방금 전의 싸움으로 인해 목함은 약간 망가져 있었다.

그는 목함을 옆의 복면인에게 넘기고는 안타깝다는 듯 쓰러져 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기를 가득 담은 손을 치켜들었다.

“죽더라도 원망은 말아라. 원래 무림이란 곳이 이런 곳이 아니더냐.”

그는 현의 머리를 향해 강력한 권장을 내리꽂으려 했으나.

펑!

내리치는 순간 오히려 그가 밀려났다.

투명한 무엇인가가 현을 방어하고 있었고 그 반발력에 그의 몸이 되레 밀린 것이다.

그의 노회한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기이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현의 몸이 혼자서 스르륵 뜨는 것이 아닌가?

“마, 막아!”

놀란 그가 소리쳤으나, 현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두 개의 목함 중 하나가 그의 눈앞에서 없어졌다.

“사술이다!”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인 하나가 소리쳤다.

휘릭!

현이 사라진 곳에 꽂히는 검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 그들의 칼은 허공을 휘두르다가 바닥을 굴렀다.

“장로님! 보이지 않습니다!”

놀란 나머지 장로라 말한 이가 입을 턱하고 막았다.

“머저리 같은 놈!”

우두머리가 자신을 장로라 말한 복면인을 쏘아보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주변.

누군가가 목함을 가져온 놈을 구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남은 하나의 목함을 손에 쥐고는 소리쳤다.

“일단 목적은 완수했으니 철수한다!”

그의 말에 복면인들이 쓰러져 있는 동료를 데리고 어디론가 급히 경공을 전개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얼마 후.

근처의 나무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허억…….”

한 사람은 자휘요, 또 한 사람은 현이었다. 자휘는 완전 개방과 투명화가 동시에 풀리자 극심한 탈력감에 털썩 쓰러졌다.

“헉, 헉.”

한참을 숨을 고르던 자휘가 몸을 추스른 후 현에게 다가갔다.

출혈이 많아 창백해진 얼굴의 현.

자휘의 손이 신의의 금창약을 꺼내고는 다급하게 현의 몸에 약을 발랐다.

찌익.

그리고 현의 옷을 찢어내어 급한 대로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응급처치를 마친 자휘가 다시 숨을 몰아쉬며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댔다.

‘완전 개방이 되면 강해져서 좋긴 한데 뒤끝이 영 안 좋단 말이지.’

그나마 동화율이 100이라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일 테다.

자휘는 이제는 괜찮아진 숨을 한 번 더 들이쉰 후, 죽은 듯 누워 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까 이상하더니만.”

자휘는 남녀가 적미륵을 가지고 떠날 때, 밖에서 마석을 잃어버린 것처럼 만들기 위해 남자를 따라갔다.

나중에 마석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현무학관 내의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되니까.

그러나 목소리가 근처에 이상한 무리가 있다는 경고를 날리는 것이 아닌가?

찜찜한 마음에 계속 따라갔더니 수상한 놈들이 남자를 쫓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적미륵을 뺏고 살인 멸구까지 하려는 상황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마석의 힘을 흡수해서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적미륵을 가져갔네.’

그리고 마지막에 복면인이 말한 ‘장로님’이라는 단어를 자휘는 똑똑히 들었다.

물론, 정파가 아닌 사파나 마교도 장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사파나 마교의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파가 살인 멸구 하면서까지 적미륵을 탐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휘가 고민하고 있는데 현의 신음을 흘렸다.

“응급처치 효과가 있긴 하나 보네.”

자휘는 그를 들쳐메고는 근처의 의방 앞에 데려다 놓았다.

괜히 자신을 보았다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목숨만 살려 놓은 것이다.

‘그래도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

자휘는 자신의 손에 있는 적미륵을 바라보았다. 이마의 마석이 없는 적미륵이긴 하나 이것이 어딘가.

자휘는 무량후를 생각하며 말했다.

“부하의 목숨값이라 생각하면 아깝진 않을 겁니다.”

이번 일로 무량후는 적미륵 네 개와 부하 둘을 잃을 뻔했다.

남자는 자신이 살리긴 했지만, 여자는……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무림맹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자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맹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까만 해도 무림맹에 적미륵 네 개 모두를 가져다줘야 한다며 투덜대던 두 남녀.

그들이 현무학관을 나서자마자 복면인들이 추격했다.

그것도 적미륵이 있는 것을 안 상태로 말이다.

이 말은 무림맹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마음을 품은 내부자가 생겼거나.

자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됐든, 저 사람은 살았으니 이번 일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지.”

* * *

다음날.

무림맹 집행부로 불려온 무량후는 당혹스럽고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으로 온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적미륵을 가지러 간 그의 충실한 제자 중 하나의 시신이었기 때문이다.

“홍아, 왜 이런 모습으로 온 게냐.”

무량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그는 참혹하게 죽은 여인의 시신 앞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무량후를 보며 부학장이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