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52화
“결정은 나중에 하겠어. 안 되면 지금 말해줘.”
추가로 얻은 동화율의 사용을 굳이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말에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급박하거나 아무것도 몰라서 목소리에 끌려다녔다.
조금 전까지도 몸이 자동으로 마구석을 흡수했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은 제외하더라도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했다.
“그럼 되는 것으로 알겠어.”
어차피 추가로 올려놓은 동화율이다.
나중에 써도 괜찮으니 목소리도 답하지 않는 것일 테다.
‘필요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대응해야 해.’
내공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기갑의 기능을 얻어야 할 때가 있다.
때에 따라서 적절히 쓰는 게 최선이다.
이제 동화율은 해결됐으니, 적미륵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네 개의 기다란 목함.
적미륵과의 거리는 한 장 반이었다.
‘조금만 가까이 가면 완전 개방이야.’
네 개의 목함 중 하나라도 마석이 있는 적미륵이 있다면…….
상자가 부서지는 동시에 완전 개방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적미륵 앞을 아주 빠르게 스치듯 지나가도 완전 개방이 이루어질까?’
아무리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해도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적미륵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생긴 지금 궁금증을 확인해 봐야 했다.
만약 완전 개방이 된다 해도 이곳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해.’
네 개의 목함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는 온몸에 진천기공을 둘렀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진천비를 펼치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형.
탓.
눈 깜짝할 사이에 첫 번째 목함에 다가섰다.
재빨리 목함의 뚜껑을 열고는 뒤로 물러나는 순간.
네 개의 목함 중 마지막 목함이 아주 잠깐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딱 걸렸어.”
나는 네 번째 목함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찰나의 움직임에도 적미륵은 반응을 보였다. 다만 너무 순식간이라 완전 개방을 끌어내지 못했을 뿐.
이것으로 적미륵에 대한 궁금증 하나가 풀렸다.
아주 잠깐은 다가서도 완전 개방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
뚜껑이 열려있는 첫 번째 목함은 예상대로 이마에 마석이 없었다.
아마도 네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개의 목함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나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진동이 있었던 네 번째 목함의 문을 열어젖혔다.
부르르 떨리는 목함.
목함 안의 적미륵이 빛을 발하려는 찰나, 최대한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적미륵의 고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기긱-
적미륵의 고개가 돌아간 방향은 내가 서 있던 쪽이었다.
짧은 시간으로는 완전 개방은 못 시키더라도 천갑무신의 기운을 감지하는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방향을 알려준단 말이지?”
어디까지 잡아낼 수 있는 걸까.
혈천교인들이 금방 날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략적인 방향만을 제시해 주는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상자에 꺼내지 않는 이상 고개의 방향을 알 수도 없고.
연구실의 크기라 봐야 열다섯 장 정도의 넓이였다.
큰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적미륵의 유효거리를 확인하기는 부족했다.
‘근처에 있는 내 위치는 감지할 수 있다고 봐야겠지.’
적미륵을 가지고 있는 혈천교인은 내가 근처에만 있어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그사이 적미륵의 힘을 흡수해서 완전 개방된 내게 대항할 힘을 갖추는 것일 테다.
‘천갑무신의 후인을 만나야지만 적미륵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건가?’
추측해 보건대, 적미륵 또한 천갑무신으로 인해 봉인이 풀려야만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적미륵의 힘을 흡수하면 탐지 능력이 사라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 추측이 맞다 할지라도 혈천교는 내가 없이도 적미륵의 힘을 흡수하는 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니 무림맹에서도 적미륵을 몰래 찾으려는 것이겠지.
적미륵에 대한 의문을 떨쳐낸 나는 앞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이번엔 완전 개방이다.”
뚜껑도 열렸겠다, 완전 개방이 되어도 상자가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완전한 요새.
무량후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있는지도 모르는 장소였다.
나는 천천히 흰 마석을 이마에 지닌 적미륵을 향해 다가섰다.
[이상 발생.]
[알 수 없는 마력이 개입합니다.]
여지없이 들리는 목소리의 경고.
“완전 개방.”
내 입에서 허락이 나오자 바로 가슴 쪽에서 차가운 금속성이 번지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경쾌하고 차가운 금속성이 회오리치듯 나를 감쌌다.
차오르는 거대한 해방감.
[기갑이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희뿌연 연기 속에서 완전한 기갑이 형태를 드러냈다.
손끝까지 몰려드는 짜릿한 쾌감.
“후우.”
나는 기갑의 손을 폈다가 다시 쥐었다.
전류가 찌릿하게 흐르는 느낌.
천천히 눈을 들어 적미륵을 보자, 목소리가 마석의 흡수 여부를 알려왔다.
[적미륵의 마석을 흡수하시겠습니까?]
무척 공손한 목소리.
전에는 흡수부터 했던 목소리가 이제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웬일로 공손하게 허락을 구하는 거지?”
입에서 나오는 차가운 내 질문에 목소리가 답했다.
[저는 기갑에 귀속된 존재입니다.]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기갑의 주인에 대한 순응도가 높아집니다.]
목소리의 대답에 큭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복종을 한다라.”
불친절하다 못해 제멋대로였던 목소리가 저렇게 자신을 낮추다니.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참으로 영악하지 않은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목소리의 태도 변화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완전 기갑화가 되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
이 자신감의 근원은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목소리가 다시금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 적미륵의 마석을 흡수하면 동화율 100이 됩니다.]
[흡수를 원하십니까?]
“아니.”
적미륵을 보던 내 입에서 거절의 답이 흘러나왔다.
저것은 무량후의 것.
마석을 가진 적미륵이 사라졌을 때 그 여파는 클 것이 자명했다.
진짜 필요할 때 얻으면 모를까, 굳이 지금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내게 복종하는 지금, 정보를 최대한 뜯어내야 했다.
“적미륵이 어떤 방법으로 날 발견하는지 알려줘.”
질문에 목소리가 답했다.
[적미륵에는 마력 회로가 있습니다.]
[마력 회로는 마석과 연결되어 진천의 핏줄을 찾아냅니다.]
진천의 핏줄을 찾아낸다?
‘진천의 피에는 무엇이 있기에 적미륵이 탐지를 한단 말이지?’
목소리는 묻지 않았음에도 친절하게 다음 설명을 이었다.
[진천의 피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닙니다. 마력을 품은 진천의 피는 마석과 반응합니다.]
[적미륵은 마력과 마석의 반응을 감지해서 이곳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나는 진천의 피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말에 경악했다.
그렇다면, 선조들은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내 피에 마력이 있다니!
“기갑을 만나기 전 내 몸이 약했던 것이 마력 때문인가?”
[맞습니다.]
[이 세계는 순수한 마력이 없는 세계. 진천의 피는 마력이 있어야만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마력이 없는 진천의 피는 서서히 굳어 절맥이 막히는 현상을 초래합니다.]
이런 미친!
진천의 피를 지닌 핏줄들이 빨리 죽은 것도 다 마력이 부족해서였다.
만약 기갑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꽤 흥분할 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침착하게 물었다.
“마석을 제외하고 마력을 얻을 방법은?”
[이곳에서 내공으로 불리는 기는 ?마력과 비슷합니다.]
[보유 내공이 많아지면 변환능력을 사용해 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치환 조건은 동화율 90입니다.]
지금껏 진천의 피를 가진 이들은 동화율이 부족해 마력을 얻지 못했다.
남아 있는 몇 개의 마석으로 90이 넘는 동화율을 여러 명이 얻는다는 건 어림없었을 테니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기갑은 또다시 엄청난 말들을 뱉어냈다.
[특히, 기갑의 주인이 되신 자휘 님의 경우 신의 육체를 지니셨기에 다른 진천의 핏줄보다 약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가 신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긴 했다.
그런데 신의 육체라니?
[신의 육체는 본래의 세계에서조차 매우 귀하고 특별한 신체입니다.]
[유독 높은 마력을 지닌 신체이기에 자휘 님께서는 다른 진천의 핏줄보다 훨씬 빠르게 절맥이 온 것입니다.]
다른 진천의 가주나 아버지만 봐도 중년의 나이까지는 살아계셨다.
그러나 난, 열 살이 넘었을 때부터 죽음의 생사에서 헤매야 했다.
“특별한 이유가 대체 뭐지?”
내 의문에 목소리는 답을 내놓았다.
[신체 마력 등급에 따라 기갑의 동화율은 높아집니다.]
[일반 신체를 가진 진천인의 최대 동화율은 100입니다.]
[신의 육체는 마력 등급 최상위급으로, 동화율 100을 넘어 최대치까지 뚫을 수 있습니다.]
“최대치까지 뚫을 수 있다는 건 어떤 뜻이지?”
[기갑의 진화를 한계치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직 신의 육체만이 한계를 넘어 진화하는 기갑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갑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다 쓸 수 있는 사기적인 신체를 가졌단 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진천인들이 없는 세계.
비교를 할 수 없으니, 신의 육체가 가지는 대단함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미륵이 날 탐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었다.
“그럼 적미륵이 날 탐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
물음에 목소리가 답했다.
[방법은 마력 회로에 이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력 회로에 이상을 일으킨다는 거지?”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동화율이 200이 되면 마력 회로를 파괴하는 기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육체를 지닌 자휘 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신의 육체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적을 무력화시키려 얻어야 하는 동화율은 무려 200이었다.
‘현재 동화율은 90.’
마구석을 그렇게 쓸어 모았는데도 고작 30의 동화율이 올랐다.
그나마 내공을 마력으로 바꿀 수 있는 동화율이란 게 다행이긴 했지만, 얼마나 모아야 200이 될까.
적미륵의 탐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하나 지금으로서는 요원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가능하다니 됐어.’
전혀 방법이 없으면 모를까.
힘들긴 해도 가능하다고 하지 않나.
그리고 마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고 목소리는 알려주고 있었다.
기갑이 되니 일렁였던 감정은 절제되면서 차가운 이성이 머리를 지배했다.
다른 것을 물으려는 데, 기갑이 경고를 보내왔다.
[높은 무위를 지닌 자가 근처에 오고 있습니다.]
무량후는 지금 무림맹에 가 있을 시간이다.
그런데 다른 이가 이곳으로 오다니?
뭔가 문제가 생겼다.
[완전 개방상태로 투명화 기능을 펼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투명화 기능을 펼치시겠습니까?]
목소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빠르게 열렸던 마구석 상자와 적미륵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츠츳.
기갑은 연구실의 내부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잠시 후, 연구실 문이 열리며 남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두 남녀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갑자기 무림맹에서 적미륵을 가져오라고 시키다니 너무한 것 아니야?”
“하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전과는 달리 무척 잘 보이는 시야.
개방화가 된 상태가 아닐 땐 일렁이듯 보였던 주변이 확연히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아까 죽엽림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네.’
무림맹에서 급하게 적미륵을 요구했고 무량후 대신 저 사람들이 온 듯했다.
그들은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을 주고받았다.
“적미륵 네 개 모두 가져가면 되는 건가?”
“무량후 님이 다 가져오라고 전서구로 보내셨어.”
“우리도 힘들게 모은 적미륵인데 몽땅 무림맹에서 가져오라고 하다니.”
“어쩔 수 없지 뭐. 적미륵의 연구를 시작하게 만든 것도 그들이잖아.”
“그래도. 적미륵이 없으면 무량후 님이 연구를 못 하실까 봐 그렇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무림맹에서 무량후의 적미륵을 요구한 듯했다.
남자는 과한 요구라며 불만을 쏟아냈고, 여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저들이 적미륵을 가져가게 된다면 마석 흡수를 못 하는데.’
아까와 상황이 다르게 변했다.
저 마석이면 동화율이 10이 오른다.
다음번에도 다시 올 가능성이 있기에 흡수를 하지 않은 것인데.
저들이 무림맹으로 가져가게 된다면 기회는 사라진다.
“두 개는 네가 가져가고 남은 두 개는 내가 가져가지.”
그들은 뚜껑을 열어 네 개의 적미륵을 확인했다. 그리곤 적미륵을 둘로 나누어 큰 주머니에 넣은 후, 둘러멨다.
“네가 가진 적미륵이 제일 중요하니까 잘 챙기고.”
“당연하지.”
남자는 마석이 있는 적미륵을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단단히 잡은 것을 보여주었다.
“설마 혈천교인들에게 정보가 새진 않았겠지?”
“조심은 해야겠지.”
적미륵을 가져가는 그들의 얼굴엔 긴장이 서렸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뒤쪽에서 투명화된 손이 적미륵을 향해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