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49화
사실, 싸웠던 자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도 격식 없이 마구 내질렀던 싸움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옷을 털며 일어섰다.
“싸움에 미친 놈 같으니라고.”
그는 수련실 문을 열고 나가며 흘리듯 말했다.
“이번엔 내가 방심했을 뿐이다. 다음번 얄짤없을 줄 알아!”
문을 쾅 닫고 가버리는 하지룡.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자휘는 한 번 웃고는 다시금 내공 수련에 빠져들었다.
하지룡과의 대련 이후 자휘는 개인 수련실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천반 수련 자체가 각자의 무공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것이라 개인 수련시간이 많이 주어졌던 탓도 컸지만…….
“크윽!”
“이 새끼 뭐냐?”
“야! 다 덤벼!”
수련실의 용도가 자휘의 실전 능력 향상을 위한 곳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인반이었던 놈 맞아?”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지금 덤비고 있는 생도는 다름 아닌 지반의 소후였다.
명실상부한 지반 상급생도의 일인자인 곤륜 출신의 소후는 지금 자휘에게 당하는 중이었다.
눈에 거슬리던 자휘가 홀로 수련실에서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따르는 지반 생도들을 데리고 온 참이었건만.
참교육을 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젠장, 뭔 놈이 이렇게 빨라? 도무지 잡을 수가 없어!”
“이 새끼 혹시 여기에 덫을 놓고 우리를 기다린 거 아니야?”
“설마?”
그러나 그들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그들은 수련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널브러져 자는 자휘를 공격했음에도.
당하는 것은 자신들이라니!
“이게 말이 돼?”
분노로 소리치는 그들 중 한 명이 자휘를 피해 도망쳤다.
“으윽,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문 앞으로 겨우 도망친 그가 문을 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왜 안 열리는 거지?”
자세히 보니 어느새 잠겨 있는 문.
기겁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자휘가 싱긋 웃으며 열쇠 하나를 보란 듯 들어 올렸다.
“이거 찾고 있어? 어쩌지? 나가려면 최소한 기절은 해야 해서 말이야.”
한마디로 기절할 만큼 맞아야 보내주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지반 생도들이 하나같이 소리쳤다.
“이 악귀 같은 놈!”
자휘는 그들의 질린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진짜 악귀를 만나서 죽느니 이렇게 실전을 겸한 수련을 하는 게 낫지 않아?”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향해 쏘아져 오는 자휘의 신형.
“으아아!”
굳게 닫힌 철문 안쪽으로 지반 생도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얼마 뒤 현무학관 전체에 생도들의 말을 타고 번져 나갔다.
“천반 개인 수련실 한쪽에서 매일 비명이 울려 퍼진다며?”
“매일 덫에 당했다느니, 악귀를 만났다느니 하면서 얻어터진 지반 생도들이 나온다더니만.”
“뭐? 지반 생도들이?”
“응. 천반 생도 중 하나가 지반 생도들하고 매일같이 수련하나 봐.”
“가끔은 천반 생도들도 간대.”
“그중 지반의 소후라는 생도는 복수하겠다며 매일 찾아간다던데.”
“그래 봐야 복수는커녕 매일 맞고 나온다며?”
말을 하던 인반 생도 하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싸움에 미친 놈들도 아니고, 다들 단체로 왜 그러는 거지?”
“왜긴 왜겠어? 혈천교가 밖으로 나오니 다들 열심히 수련하는 거겠지.”
“하긴. 현무대전이 중지된 것도 혈천교때문이니까…….”
혈천교 이야기가 나오자 생도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다들 얻어터지긴 했지만, 실력은 많이 늘었다더라.”
“진짜?”
“형식적인 대련이 아니라 진짜 죽자 사자 싸우나 봐.”
“거의 실전이네?”
“그렇지. 그러니까 실력이 확 느나 봐. 그 맛에 처음에 맞았던 놈들이 자꾸 천반의 수련실에 가는 것도 있대.”
“미친놈들이긴 한데 어떻게 보면 부럽네.”
부럽다는 생도의 말에 다른 생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진 수련하고 싶지 않아. 너무 무식하달까.”
“오죽하면 생도들이 그 수련실 이름을 마귀 굴로 부르겠어.”
“방법이 무식하면 어때. 실력만 늘면 장땡이지.”
“참, 내가 들은 소문이 있는데…… 그 수련실 주인이 자휘래.”
“뭐?”
마귀 굴의 주인이 자휘라는 말에 다들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걔는 얼마 전까지 인반 신입이었잖아. 이번 천반 승급을 하게 되면서 천반 수련실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설마 그러려고.”
“……그런가?”
“말도 안 되잖아. 지반 생도뿐만 아니라 천반 생도들도 가는 곳이라던데, 설마 자휘가 마귀 굴의 주인이겠어?”
“…….”
그러나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일임에도 의심이 생겼다.
자휘라면 진짜 마귀 굴의 주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생도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있잖아, 마귀 굴의 주인이 자휘가 아니더라도 인반 신입이 천반으로 승급한 건 사실이잖아. 그걸 보면 우리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맞아. 우리도 열심히 하면 승급이 가능하다는 거겠지.”
“우리 모두 자휘보다 처음엔 더 무위가 높았다고.”
“이렇게 노닥거릴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수련을 해야겠어.”
“나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생도들이 수련하기 위해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천반으로 승급한 자휘를 보며 그들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명문가의 자제가 아니라면 천반 진급은 꿈도 못 꿨던 생도들.
늘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의 생각이 자휘로 인해 깨졌다.
바야흐로 현무학관 전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 * *
“또 녹림의 짓인가?”
무림맹에서 온 중년 수사관 하나가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코를 막으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수법은 녹림의 수법이긴 합니다만.”
“녹림 놈들이 이렇게 이유 없이 잔인하게 사람을 해친다고?”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그들이 보복 삼아 이런 짓을 저지르긴 하지만 이렇게 자주 하진 않습니다.”
“흐음. 그럼 다른 놈들이 녹림의 짓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은?”
이곳은 백무관이라 불렸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잔인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 사이로 벌레가 날아다니고 역한 냄새는 멀리까지 퍼지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조사관 지인호는 고심하더니 답했다.
“범인들이 녹림의 짓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 녹림의 짓으로 위장한 거지?”
“녹림이라 해봐야 힘 좀 쓰는 놈들 아닙니까? 높은 놈들이나 무공을 쓰지, 나머지 놈들은 무공이라 부르기도 힘든 단순 초식을 사용합니다.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기에 딱 좋죠.”
“하지만 당한 문파들이 하나같이 무력이 있는 집단이다. 이가장, 적마장, 백무관의 가주 모두 일류급의 무인이었어.”
“그래서 더 의심이 가는 겁니다. 분명 죽은 사유는 단순한 칼질인데, 죽은 사람들이 전부 다 무인이니까요.”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무위에 있는 범인이 최대한 단순한 칼질로 위장을 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일류 이상의 무인이 말이다.
“그렇다면 녹림으로 위장해 작은 문파의 사람들을 전부 죽였단 말인데…….”
중년의 수사관이 턱을 천천히 쓸었다.
“범인들의 목적이 원한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물도 아니란 말이야.”
귀중품을 가져가긴 했어도, 소나 말은 가져가지 않았다.
적마장의 경우 꽤 품질 좋은 말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가져가지 않았던 것.
녹림으로 위장은 했으나 아무리 봐도 범인들은 녹림이 아니었다.
그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지인호가 어떤 시체를 보더니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보십시오!”
중년 수사관이 지인호에게 다가서자, 그가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시체 아래에서 드러나는 글자.
“이건……!”
죽은 이가 남긴 글자는 단 하나였다.
마지막 획은 다 긋지 못한 채 죽었음에도 이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혈(血)이라…….”
글자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똑같았다.
혈이란 글자와 관계되고, 잔인한 수법을 즐기는 데다가 강한 무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혈천교!”
그들은 혈천교라는 단어를 내뱉고 나서 잠시간 말을 잃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중년 수사관이었다.
“……아니겠지. 그들은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뒤로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
“그들이 천갑무신의 후인이 두려워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는 말은 저도 듣긴 했습니다.”
지인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만약, 나올 이유가 생겼다면요?”
“글자 하나만 가지고 혈천교가 나왔다고 판단하기엔 이르다. 만에 하나, 적들이 우리를 교란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으니.”
“그렇더라도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인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살펴볼 때 작을 가능성이라도 조사해 보는 것이 옳았으니 말이다.
중년 수사관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혈천교인들이 밖으로 나왔다면 두 가지 이유가 있겠지.”
“두 가지라 하시면?”
“첫째, 혈천교인들이 무림으로 나섰다는 것은 그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야.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사고를 친 거지.”
“그렇다면 이제 힘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이군요.”
“맞다. 그리고 두 번째는…….”
중년 수사관은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찾거나 처리하기 위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지인호가 긍정했다.
“왠지 제감으로는 두 번째일 것 같습니다.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면, 녹림으로 위장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는 숨길 수 있으면 숨기되, 드러나도 감당할 힘이 있다는 게 은연중에 보이고 있어.”
세 번의 혈사에서 모든 시체는 정파 무인들의 것이었다.
적의 시체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봤을 때, 꽤 실력 있는 놈들이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같은 행동을 연달아 하고 있다.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정체가 어느 정도 드러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야.”
“그게 무엇일까요?”
“지금은 알 수 없더라도 조만간 드러날 수밖에 없겠지. 지금도 이렇게 과격한데 처리해야 할 일을 하게 되면 더 심해질 테니.”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무거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 드러날 때까지 생겨나는 사상자들이다.”
그의 눈이 참혹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로 향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목적을 밝혀내는 것과 인명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것이지.”
만약 단순한 유희로 이런 참사를 저지르는 것이라면 무림맹의 개입만으로도 막을 수 있을지 몰랐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왔다면, 그들 역시 무림맹의 주의를 끌긴 싫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그들을 찾아내야 했다.
지인호는 가방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건 근래 일어난 혈사의 위치와 정보가 아닌가?”
“맞습니다. 이걸 보면 놈들의 다음 행보를 예측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는 곧바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처음 혈사가 일어난 것은 보름 전 곤륜산맥 아래에 있는 이가장입니다. 그 후로는 청해의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비슷한 문파들이 당했습니다.”
“마치 이동하는 모양새군.”
“맞습니다. 혈천교의 본거지가 서장 쪽이니 곤륜산맥을 넘어 어딘가로 가면서 작은 문파들을 약탈하며 죽인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겠구나.”
중년 수사관은 침음을 흘렸다.
“세 건의 사건이 정말 혈천교의 짓이라면,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이 될 장소는…….”
지인호의 손가락이 참사가 일어난 백무관에서 서쪽에 가장 가깝게 위치한 세 개의 무관을 가리켰다.
“이 세 곳 중 하나가 되겠군요.”
그가 가리킨 세 곳은 연남장과 백호관, 흑남파였다.
“흑남파는 흑도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혈천교인들도 머리가 있다면 계속 정파를 건드리진 않겠지요. 이번 목표는 이곳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연통을 보내 녹림이 덮칠 수 있다고 경고해라.”
의심은 가는 상황이지만 혈사를 저지른 놈이 혈천교라는 증거는 없었다.
괜히 혈천교라고 말했다가 추후에 문제가 생기느니, 일단 있는 증거로 경고를 하는 게 맞았다.
“연남장과 백호관은 연통을 보내도 수긍하겠지만, 흑남파가 과연 수긍할까요?”
지인호가 묻자 중년 수사관이 입술을 비죽이며 답했다.
“연통까지 보냈으면 우린 할 일을 충분히 한 셈이다. 무시하고 죽더라도 그건 놈들의 팔자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