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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47화 (47/200)

기갑무림 47화

이백현의 혼신을 다한 공격은 이가장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혈부와 맞닿은 백검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으윽!”

입가로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

온몸의 선천지기까지 불살라 혈천대주를 공격했으나, 혈부의 힘을 이기지 못했던 탓이었다.

챙그랑!

결국 백검은 부서졌다.

이가장의 가보인 백검이 그의 눈앞에서 조각나 버리자 이백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안 돼…….”

그리고 그 순간.

입꼬리를 쭉 찢으며 웃는 혈천대주의 혈부가 그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푸확!

동시에 주변으로 흩날리는 피.

이백현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둘로 나뉘어 버렸다.

“자, 장주님……!”

그 모습에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의 눈은 깊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으아악!”

또다시 이어지는 비명들.

곤륜산맥 아래에 외따로 떨어져 있기에 그들의 비명은 불행히도 다른 이에게 전달되지 못했고…….

남은 생명들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게 죽여라!”

혈천교인들은 삽시간에 이가장 내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크하하!”

광기에 찬 혈천대원들은 시체를 짓밟고 재물을 약탈했다.

그리고 이가장의 곳간을 뒤져 만찬을 열었다.

그들은 시체를 배경으로 그들은 쉬고 마시며 낄낄댔다.

“증거를 남기지 말고 모두 태워라!”

혈천대주의 명이 떨어지자 곧이어 붉게 혀를 날름대는 불길이 이가장을 뒤엎었다.

화르륵!

이가장은 시체들과 함께 잿더미가 되어 밤새 타올랐다.

혈천대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모조리 태워 버렸고, 그들의 만행이 빚은 이가장의 참혹한 멸문은 녹림의 짓으로 위장되었다.

이가장의 멸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으나, 녹림의 잔혹함만이 소문으로 간간히 돌 뿐이었다.

* * *

이가장의 참사로부터 이틀 뒤.

자휘는 천반 신입생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원했던 대로 인반의 숙소였다.

‘역시 옮기지 않길 잘했어.’

자휘가 천반의 숙소를 마다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여기가 밖으로 나가기 쉬우니까.’

진천비급을 연마를 하려면 현무학관의 사람이 없는 곳이 필요했다.

또한 청독각망의 내단이 마석이 되는 것을 보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는데 천반 숙소에서는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쟁쟁한 천반 생도들이 있다 보니 신경 쓰이기도 하고.’

특히 선배 생도의 경우 높은 무위를 가지고 있기에 꼬리가 길면 밟힐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왠지 자신을 믿어주는 제갈신과 하후홍 곁을 떠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자휘가 오늘 밤도 밖에서 수련을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 앞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 무량후일세. 혹시 자는가?]

들려오는 전음.

‘무슨 일이지?’

자휘는 코를 골며 자는 하후홍을 흘긋 바라보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무량후가 뒷짐을 선 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몸은 좀 어떤가?”

“신의께서 만드신 금창약 효과가 참 좋더군요. 덕분에 거의 나았습니다.”

“다행이로군.”

그는 만족스러운 듯 흰 수염을 천천히 쓸더니 밖을 턱으로 가리켰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지 않겠나?”

“네.”

자휘는 전처럼 무량후의 등 뒤를 따라나섰다. 가는 곳은 지난번 갔었던 <백엽정>이었다.

작은 정자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춘 무량후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자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뭔가 좀 이상한걸.’

그의 눈빛은 마치 탐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휘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밤중에 저를 이곳까지 데려오신 것인지요?”

무량후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에 대해 알아보니, 예전에 네 몸이 약했다고 들었다.”

“예. 한때 몸이 약했었지요.”

무량후가 갑자기 던진 말에 잠시 놀랐으나,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설마 나에 대해 조사를 한 걸까?’

대답하며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현무학관에 온 이래로 네가 워낙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이다 보니 너에 대해 좀 알아보았지.”

“그래서 제가 약했던 걸 아셨던 겁니까?”

“그래. 그리고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문이 생기더구나.”

의문점이라니.

찔리는 건 너무도 많았기에 속으로 침을 삼켰다.

“어떤 의문 말씀입니까?”

“첫 번째 의문은 네 병을 고친 사람에 대한 것이다.”

무량후는 개방에 의뢰해 자휘의 정보를 일차로 들은 바가 있다.

어느 정도 자휘에 대해 알았으니 이번엔 직접 묻고자 찾아온 것이다.

“제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절 구해줬던 기인 말씀입니까?”

“그래. 그 기인에 관한 것이지.”

“그런데 그것은 왜……?”

“네가 심한 절맥을 앓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인이라 한들, 어떻게 절맥을 쉽게 고칠 수가 있지?”

자휘에게 질문하는 무량후의 눈이 이상하게 검어졌다.

무량후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작은 회오리가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음?’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무량후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음성은 마치 머릿속을 헤집는듯했다.

“기인이 어떻게 널 고쳤는지 말해보아라.”

“그건…….”

눈동자가 멍해지며 나도 모르게 말을 하려는 찰나.

[정신계 침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마력으로 뇌를 방어합니다.]

기갑의 안내음이 정신을 깨우며 정신계 침입을 방어했음을 알렸다.

경고로 깨어나긴 했으나, 어지러운 시야를 기를 쓰고 견뎌내야만 했다.

‘내게 섭심술을 쓰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당해준 척을 해야 할 터.

난 여전히 멍한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모릅니다.”

겨우 말한 답.

그러나 무량후는 답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물어봤다.

“잘 기억해 보아라. 조금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냐?”

“……절벽에 떨어져 죽을 정도로 다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어났을 때 제 몸은 멀쩡했습니다.”

“그럼 네가 정신을 잃은 사이 몸이 나아졌다는 것인데, 어떻게 기인을 만난 것이라 말한 거지?”

“제가 영약을 먹은 것도 아님에도 몸이 나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나아졌기 때문이라?”

“네. 기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움직이지도 못한 절 낫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기인이 절 살렸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자휘의 답에 무량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혹시 네가 깨어날 때 주변에 작은 돌이 있었느냐?”

작은 돌이라면 혹시 마석을 말하는 걸까?

무량후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그만 몸이 움찔하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얼굴이 아닌 등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멀쩡하다는 것이 그에게 들켰을 테니.

“그렇군. 너는 정말 기억에 없는 것이로구나.”

결론을 내린 그의 얼굴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내 눈을 보고도 이런 대답을 한다면 진실이란 것이겠지.”

기인의 정체를 왜 궁금해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으나, 그의 눈에 어린 검은 회오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정신이 퍼뜩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계 침입이 사라졌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섭심술이 풀렸다.

얼떨떨한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넌 기인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하는구나.”

“……네.”

그는 내게 섭심술을 처음부터 쓰지 않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중간 부분만 솔직하게 말하게 만들고 기억 못 하게 하는 섭심술인가?’

그래야 좀 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니 말이다.

당하는 사람은 경계조차 못 하고 있다가 말하는 도중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는 술법.

기갑이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모두 다 술술 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억 못 하는 부분을 꺼내려 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둘 다 나로서는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괜히 말실수했다간 기갑의 비밀마저 나와 버릴 테니.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무량후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로는 네 무공에 관해서다.”

“제 무공 말입니까?”

“조사해 보니 네 말이 맞긴 하더구나. 진가장에는 진씨 일족만 익히는 보호기공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무량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변두리에 있는 작은 무관의 무공치고는 너무 훌륭하더구나. 그 정도 무공이라면 주변에서 유명했을 터인데,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해서 말이다.”

“그것은 진씨 일족이 워낙 몸들이 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이 몸이 약해?”

“네. 저야 기인을 만나 몸이 건강해져 진씨가문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몸을 고치지 못하니 가문의 무공을 익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호기공의 경우 진씨의 피를 이은 자만 익혀야 한다는 금제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숙부나 진영현의 경우는 진씨가문의 외공을 익혔을 뿐, 진짜 무공은 익히지 못했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으로 공교롭구나.”

무량후는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느 정도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량후는 자꾸만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뭘 물어본단 말인가?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자휘의 물음에 무량후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에 대한 의문은 여기까지다.”

“그럼 가도 됩니까?”

“오는 길은 모두 진법이 설치되어 있다. 조금만 있다가 같이 나가자꾸나.”

그는 바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휘는 무량후가 심안을 쓴 뒤로 이 자리가 불편했기에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저 혼자 갈 수 있을 듯합니다.”

“혼자 갈 수 있다고?”

“네. 아까 따라오며 무량후 님의 모든 발자국을 외웠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인데 모두 외웠단 말인가?”

“예, 그리 어렵지도 않던데요.”

말을 하는 자휘를 보는 무량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곳 백엽정은 무량후의 심신 안정을 위해 찾는 곳이자 피신처였다.

피신처인 만큼 어려운 진법들을 가득 깔아 두었는데, 저 아이는 쉽게 파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무량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말했다.

“허허. 그렇다면 혼자 빠져나가 보거라. 어려우면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네.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잘 들어가도록 하여라.”

“예.”

자휘는 무량후에게 포권을 취한 후, 그가 밟았던 발자국들을 그대로 밟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대나무가 가득한 백엽정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자휘의 뒷모습을 보는 무량후의 부리부리한 눈이 더욱 커졌다.

“저렇게 쉽게 빠져나갈 줄이야.”

그는 대나무 사이를 빠져나가 진법을 완전히 파훼한 자휘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최소 몇백 걸음이다.

그 걸음을 전부 외운 것도 모자라 반대로 되짚어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빠져나가다니.

“머리까지 좋은 녀석이구먼.”

그는 허허 웃으며 자휘의 멀어지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 * *

나는 아무래도 뒤가 찜찜한 나머지 매일 가던 밤 수련을 가지 않았다.

투명화 기능을 써서 빠져나가는 것까진 좋았으나, 혹시라도 무량후가 뒤를 밟을까 저어됐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조심해야겠어.’

그러나 가뜩이나 혈천교가 가까워지는 와중에 수련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개인 수련장이나 가 볼까?”

천반 승급을 했으니, 천반의 숙소에 있는 개인 수련장의 사용은 가능했다.

자는 곳만 인반의 숙소일 뿐, 나머지 혜택은 그대로 받은 것이다.

이미 근처에는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 내 발걸음은 바로 천반 쪽으로 향했다.

반 각 정도 걷자 천반의 영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화려한 전각과 아름다운 정원. 그에 못지않은 개별 연무장.

왼편에는 화려하고 큰 천반의 숙소로 사용되는 전각이 있다면, 오른편에는 약 스무 개의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만 완전 딴 세상이라니까.’

왜 생도들이 천반을 가길 그토록 원했는지 겉만 봐도 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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