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43화
“적미륵 조사를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다른 이도 아닌 현무학관의 학관장이 직접 적미륵을 조사하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왜 그렇게 바라보느냐?”
“너무 의외여서 그렇습니다.”
자휘의 대답에 무량후가 미소를 지었다.
“적미륵이란 것 자체가 연구가 필요한 물건이다. 연구라는 것은 모름지기 학관에서 해야 하는 것. 학관장인 내가 하는 게 어찌 의외인 것이냐?”
“그렇군요.”
그의 물음을 듣고 생각해 보니 일견 그럴듯했다.
그리고 현무학관이란 곳에서 적미륵을 연구한다는 생각을 보통은 못 할 것이니 감추기에도 좋지 않은가?
그런데 왜 모용후는 감춰야만 하는 적미륵에 대해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휘는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그렇다 쳐도 비밀스러운 일을 이렇게 쉽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것입니까?”
자휘의 경계 어린 물음에 무량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야, 모용인후 님께서 무림맹에 가시기 전 비밀리에 내게 다녀가셨기 때문이지.”
모용인후의 말이 나오자 모용설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저희의 이야기도 해주신 거예요?”
“그렇단다.”
무량후의 답에 긴장이 풀어진 모용설화가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그가 이미 복면인에 대해 아는 만큼 상황을 풀어가기 쉬운 탓이다.
무량후는 자휘와 모용설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적미륵에 관련해서는 아주 작은 것도 놓쳐선 안 된다. 그렇기에 너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서 저희가 적미륵에 관해 물었을 때도 놀라시지 않은 것이로군요.”
“그렇지. 그런데 너희야말로 왜 내게 적미륵을 아냐고 물은 것이지?”
무량후의 물음에 자휘가 답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뒤 나타난 자휘는 작은 불상은 하나 가져왔다.
새빨간 몸체를 가지고 요기를 피워올리는 작은 불상.
적미륵이었다.
“이것은……!”
자휘가 직접 적미륵을 가져오자 무량후는 단말마를 내뱉었다.
적미륵을 조사한다고는 하나, 적미륵이 귀하다 보니 평생 몇 개밖에 보지 못했다.
그런데 불쑥 나타난 적미륵이라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무량후에게 적미륵을 보이자, 이번에는 모용설화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현이란 생도와 싸우게 된 이유는 바로 적미륵 때문입니다.”
“적미륵 때문이라?”
“네. 제가 천반 선배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던 도중 동굴에서 나오는 이현을 목격했습니다.”
모용설화는 말을 이었다.
“그와 마주치면서 적미륵을 담은 목함을 보았사온데, 목함으로 인해 시비가 붙었고 이현은 저희와 싸우는 도중 붉은 단약을 먹고 마인화가 된 것입니다.”
그녀의 설명에 무량후가 굳은 얼굴로 흰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고생이 많았구나.”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많이 다친 지호연과 자휘가 걱정되어서…….”
모용설화의 답에 무량후의 눈이 자휘가 다친 부위에 머물렀다.
그러더니 소매의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것은 신의가 만든 금창약이다. 네게 줄 테니 잘 바르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자휘는 거절도 없이 냉큼 금창약을 받았다.
사고 싶어도 못 사는 것이 신의의 금창약이다.
이것만 바르면 며칠 만에 상처가 씻은 듯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의 자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휘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은 무량후가 말했다.
“이제 너희가 힘들게 구해온 적미륵을 보자꾸나.”
자휘가 조심스레 적미륵을 넘겨주었다.
그는 건네받은 적미륵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적미륵을 바라보던 무량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흠. 이 적미륵은 상등품이구나. 그렇다면 이마에 달린 돌의 색은 황금색이었을 텐데, 황금색 돌은 어디로 간 것이냐?”
“죽은 혈천교인이 돌의 능력을 흡수하려 했기에 빠진 것입니다.”
“황금색 돌은 그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인가?”
특정한 주문만 있으면 일반인들도 적미륵에 담긴 돌의 힘을 흡수할 수 있었기에 물은 질문이었다.
아울러 혹시나 남은 기운이 있나 궁금했다.
자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혈천교인이 흡수하려 했으나 황금빛은 한동안 맴돌기만 했습니다. 강제로 흡수하려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는지 얼굴이 점차 부풀어 오르더군요.”
“흐음,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라.”
“그러더니 얼굴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그와 함께 황금빛 돌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적혈단의 부작용이었겠지.”
모용설화와 자휘가 적혈단에 대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붉은 단약은 적혈단이라 불린다. 일시적으로 기운을 증폭시켜주는 약이지.”
“어쩐지. 그래서 놈이 천반 생도를 두 명이나 상대할 수 있었군요.”
“하지만 반나절이면 기운은 사라지고, 선천지기를 끌어 썼기에 최소 석 달은 운신이 힘들어진다. 끌어다 쓴 힘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란다.”
한마디로 효과만큼 부작용도 큰 게 적혈단이었다.
그런 적혈단과 마석이 만났으니,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도 진실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적미륵을 연구하는 학관장이라 그런지 무량후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럼, 적미륵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볼까?’
모용인후와 신녀를 통해 적미륵에 알긴 했으나, 자세히 알진 못했다.
한번 물어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은 혈천교인이 말하길, 적미륵은 천갑무신과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무량후는 자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잠시 뒤,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적미륵의 힘으로 혈천하를 이루려고 하지. 그리고 적미륵의 힘을 막을 사람은 오직 천갑무신의 후인뿐이라 생각하고 있다.”
무량후의 말은 놀라웠다.
적미륵의 힘을 막을 사람이 오직 천갑무신의 후인이라니.
그러나 조금 전의 싸움으로 보건대, 그들이 적미륵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나도 얻을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석으로 강해지니까.’
그러나 다른 무인들은 적미륵의 힘을 얻고 있는 혈천교인들을 지켜봐야만 할 터였다.
막을 이는 오직, 천갑무신의 후인뿐.
잘만 하면 오히려 그들의 힘을 빼앗아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혈천교는 천갑무신에 반응하는 적미륵을 이용해 후인을 찾아 없애려 하고 있다. 그래야 마음 놓고 혈천하를 이룰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적미륵은 몇 개 없지 않습니까?”
“최근 연달아 적미륵이 나오는 걸 보면 그들이 천갑무신의 후인에 대한 정보를 찾은 듯하구나.”
정보라면, 신녀가 예언으로 나를 찾아낸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무량후는 심각한 얼굴로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한 적미륵이 이렇게 계속 나올 턱이 있겠느냐?”
그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숨어 있었던 혈천교와 적미륵이 계속 나오는 것은 나 때문 아닌가.
‘날 찾기 위해 사방에 숨겨둔 적미륵을 꺼내기 시작한 거야!’
신녀는 적미륵을 혈천교에서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분’이란 존재가 천갑무신과 적대적 관계이며, 그녀를 통해 적미륵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다면…….
내 정체는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 그분이란 사람이 누구길래.’
갑자기 드는 긴장감에 곰곰이 생각하는데, 적미륵을 살펴보던 무량후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 적미륵은 황금색 돌이 없으니 큰 연구가치는 없겠구나.”
“……그렇습니까?”
이미 마석을 자동으로 흡수해 버린 자휘는 답을 하며 살짝 양심에 찔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 역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기에 그냥 어깨를 펴기로 했다.
“안타깝군요.”
말 그대로의 약간의 안타까움이 실린 자휘의 말에 그가 보이지 않게 웃었다.
오랜 시간 살아온 그의 느낌이 자휘가 뭔가 숨긴단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휘에 대한 조사가 들어갔기에 조만간 진짜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모용설화가 긴장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대로 현무대전은 중지되는 것인가요?”
* * *
모용설화가 지급의 신호탄을 한밤중에 쏘아 올린 후, 갑자기 현무대전이 멈췄다.
어차피 밤 시간대라 싸우는 시간은 아니었으나 생도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 천반의 지호연이 들것에 실려 가던데.”
“그뿐이야? 학관장님도 급하게 산 쪽으로 가시더라고.”
“교관들도 그렇고. 불안하게 왜 이러는 거야.”
“이대로 현무대전이 멈추는 건가?”
지반 생도들은 잘 시간이 되었음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현무대전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그냥 지금 점수로 끝나는 거지.”
천반과의 싸움으로 인해 지반 생도의 반 이상이 현무도의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소후마저 말이다.
남은 인원은 기껏해야 열다섯.
이 인원으로 남은 육 일을 버틸 리가 없었다.
“천반 생도들에게 당해서 감옥에 가느니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는 게 더 좋긴 하겠네.”
“맞아. 이번 현무대전도 천반의 무대였어.”
“재작년의 남궁비천이 워낙 뛰어났던 거지.”
“우리는 언제 천반을 이겨보나.”
옷이 걸레짝이 된 지반 생도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반 생도들이 불안해하는 동안 천반의 천무륭은 신호탄이 터졌던 산 중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있어야 했던 건가.”
홀로 있는 천무륭은 후회했다.
천반의 경우, 신입이 세 명뿐인데 무려 둘이나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
무당의 지호연이 이미 섬 밖의 의방으로 실려 간 지금, 남은 동료라곤 모용설화밖에 없었다.
그녀마저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지금.
어떤 일에도 무심했던 천무륭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자휘가 안 오지?”
잠 못 드는 건 인반 신입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인반 신입생도의 경우 오지 않는 자휘에 대한 걱정이 덧대어졌다.
“자휘가 오지 않으니까 괜히 불안하네.”
불안함은 곧 제갈신에 대한 원망으로 표출되었다.
“제갈신, 너 아까 자휘랑 같이 있지 않았어? 신호탄 같이 쏘기로 했잖아.”
“맞아, 네가 자휘를 책임졌어야지.”
“왜 같이 안 오고 너 혼자 온 거야?”
생도들의 비난 섞인 물음에 제갈신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청색 신호탄은 쐈어. 그 뒤로 자휘가 먼저 돌아가라고 해서 중간에 헤어진 것뿐이야.”
“그래도 그렇지. 다른 선배 생도들이 자휘를 잡을 수도 있었잖아. 네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괜스레 흐르는 원망이 제갈신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원망의 흐름을 잘라낸 사람은 다름 아닌 하후홍이었다.
“자, 자휘는 자주 그래.”
“잘 그런다고?”
“응. 나랑 같은 방을 쓸 때도 어딘가 자주 나가는걸.”
“어딜 가는데?”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수련을 하지 않을까?”
하후홍의 말에 생도들이 무릎을 탁쳤다. 연습벌레라 불린 자휘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와서도 혼자 수련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하지만 왠지 자휘라니 설득력이 있는걸.”
“수련이 아니더라도 자휘는 늘 뭔가를 하니까 어, 어딘가에 잘 있겠지.”
같은 방을 쓰는 하후홍은 자휘가 사라지는 것을 자주 보았다.
굳이 말을 안 하니 무엇을 하느냐고 묻진 못했지만, 사라지는 자휘를 보며 그러려니 할 때가 많았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 걱정도 안 할 텐데.”
그들의 걱정 섞인 말에 하후홍이 조곤조곤 말했다.
“괘, 괜찮을 거야. 자휘가 어디서 당하고 오는 아이도 아니고. 그러니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자. 다른 사람도 아닌 자휘잖아.”
하후홍의 말은 더듬대는 대도 이상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묘한 믿음과 기대가 담긴 하후홍의 말에 생도들이 모두 긍정했다.
“하긴. 우리가 자휘 걱정할 처지냐.”
“걘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려도 살아날 놈이잖아.”
“맞아.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고 내일을 준비하자.”
인반 생도들은 애써 걱정을 한쪽으로 묻어두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작 말 몇 마디를 한 것만으로도 땀을 뻘뻘 흘리는 하후홍을 잠시 바라보던 제갈신이 입을 열었다.
“하후홍, 고맙다.”
“고맙긴. 사실 누구보다 자휘를 걱정하는 건 너잖아?”
그의 물음에 제갈신의 얇고 가느다란 눈이 잠깐 커졌다가 돌아왔다.
“너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해. 하지만…… 자휘가 보통 아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기다려 보면 알겠지.”
하후홍의 말이 옳았다.
걱정한다 한들, 자휘가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래, 자휘는 잘 돌아올거야.”
그의 말에 하후홍이 씩 웃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갈신은 하후홍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홀로 남아 명상을 하던 제갈신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