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42화
처음 듣는 목소리는 기이하게도 자휘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나는 혈천교의 신녀다.]
여인의 목소리에 예전 복면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동안 혈천교는 대처방안을 마련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 대처방안 중 하나가 이 신녀일 것이다.
자휘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신녀에게 물었다.
“적미륵을 만든 것이 너희인가?”
[아니다. 적미륵은 이미 이 세상의 물건. 세상 속으로 숨어든 적미륵을 발견한 게 우리였을 뿐.]
“어떻게 적미륵이 천갑무신의 후인을 찾는 도구로 쓰이는 거지?”
자휘의 물음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너는 네 질문에 대한 답을 거저 들으려고 하는구나. 하지만 처음 만난 기념으로 그 정도는 이야기해 주도록 하지.]
신녀가 말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현의 얼굴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전능하신 ‘그분’께서 적미륵이 가진 기능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그리고 천갑무신의 후인인 너를 없애야만 우리의 혈천하가 된다는 것까지도.]
“그분은 누구를 말하는 거지?”
[너와 긴 악연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이지.]
신녀의 말투는 마치 누군가를 그리듯 아련했다.
[너 역시 언젠가 ‘그분’을 볼 날이 있을지니…….]
신녀의 말이 더해질수록 더욱 부풀어지며 푸들거리기까지 하는 이현의 얼굴.
그녀 또한 한계에 다다랐음을 아는지 다음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날을 기대하도록 하마.]
‘그분’이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또한 신녀와 난 분명 적임에도 왜 적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증은 더 쌓여갔다.
푸들푸들.
부풀어 오른 이현의 머리와 부들대다 못해 마구 흔들리는 그의 몸은 이상을 알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겠구나.’
자휘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며 폭발하는 그의 머리.
푸확!
사방으로 비산하는 뇌수와 함께 이현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 덕에 기갑에 놈의 핏자국이 묻진 않았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혹들로 인해 머릿속은 번잡스러웠다.
[기갑의 완전 개방 상태가 해제됩니다.]
적을 죽여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목소리가 해제를 알려왔다.
촤르르르.
동시에 기갑은 작은 회오리 치듯 가슴안의 마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핏.
방패 역시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순간에 기갑들이 해제되자 극심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허물어지는 몸.
“허억.”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처음에 완전 기갑화가 되었을 때보단 나았다.
‘중급 마석을 흡수해서일까.’
기갑화가 된 상태로 마석을 흡수하니 더욱 흡수가 잘된 듯했다.
그러니 탈력감 또한 덜한 것이고.
“불안정한 마석을 흡수했을 땐 남은 기운이 내공으로 변환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전부 다 기갑의 힘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니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진화하는 기갑이라니.’
조금 전 있던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강렬한 쾌감과 뭐든 할 수 있을듯한 자신감.
전보다 신체적 능력이 많이 좋아졌음에도 그 고양감은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이번에 방어구를 얻었으니 혈천교 놈들이 와도 막을 수는 있을 거야.”
약 네자 길이에, 두 자의 넓이를 가진 방패.
단순히 적의 공격만을 막는 방패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써보면 알겠지.’
그리고 동화율 50이 넘자 전체적인 강화가 이루어졌다.
아마도 연쇄적인 반응으로 얻어진 결과물일듯했다.
잠시 숨을 고르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생겨났다.
정신을 차린 자휘의 시선이 머리가 터져 버린 이현에게로 향했다.
죽었음에도 이현의 몸은 아직도 마인화가 된 상태.
자휘의 차가운 눈이 놈의 품에 그대로 있는 적미륵을 바라보았다.
“역시 마석만 사라졌네.”
이제 곧 위급 신호탄으로 인해 교관들과 다른 생도들이 이곳에 올 터였다.
자휘는 차분히 이 상황을 설명할 것들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 * *
자휘가 있는 곳으로 제일 먼저 온 사람은 모용설화였다.
그녀는 위급용 신호탄을 터뜨린 후, 근처에 있던 생도에게 지호연을 부탁했다.
그리고 신호탄이 터진 곳으로 몰려온 교관들과 함께 힘껏 달려온 것이다.
모용설화는 머리가 터져 죽은 이현을 더럽다는 듯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자휘에게 향했다.
“자휘야! 괜찮아?”
자휘를 보는 모용설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왜냐하면 옆구리 부분에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가 나잖아!”
“싸우다 보니 그렇게 됐어.”
“마인이 된 사람과 싸우는데 상처 하나 없이 이기긴 힘들었겠지.”
“응.”
사실 이 상처는 마인과 싸운 증거로 자휘가 낸 상처였다.
그녀 말대로 이상한 약까지 먹은 마인을 아무 상처 없이 이길 수는 없을 테니.
모용설화의 눈이 무척 안타깝고 속상하다는 듯 자휘의 상처로 향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긴 거야? 우리랑 싸울 땐 처음엔 강하지 않았는데, 붉은 단약을 먹고 갑자기 세졌거든.”
“갑자기 마인이 된 적과 싸우다가 네 동기가 배를 찔린 거구나.”
“맞아.”
마인으로 변한 이현의 한쪽 손이 갑자기 길어지며 흉기가 되어 지호연의 배를 꿰뚫은 것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네가 말한 단약의 효과가 다 떨어져 있는 상태였나 봐. 그래서 싸울 만했지.”
“그렇구나. 아까…… 널 혼자 두고 가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네가 이겨서 정말 다행이야.”
자휘만 두고 떠났던 그녀의 등은 무척 무거웠다.
주변인들을 지키고자 마음먹었건만.
오히려 자휘에게 도움만 받았다.
아까도 그냥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자신과 지호연을 위기에서 구한 후 홀로 적과 싸웠다.
그리고 상처까지 얻은 소년.
입술을 꾹 다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왜 울어?”
“내가 바보 같고 네가 다친 게 너무 속상해서 그래.”
그녀는 소맷단으로 눈물을 훔쳤다.
‘괜히 상처를 보여줬나?’
자휘는 모용설화가 너무 자책하고 슬퍼하자 슬며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지호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음, 네 동기는 좀 어때?”
“지호연은…… 의방으로 갔겠지.”
“아까 봤을 때 많이 다쳤던데 같이 가지 그랬어.”
“그 사람은 나 말고도 봐줄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지만 상황을 설명할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너는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있고?”
자휘의 말에 모용설화가 버럭 화를 내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그는 무당파 출신이니, 누구보다 치료를 잘 받을 거야. 대변해 줄 사람도 많고.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아무래도 현무학관 자체가 무림맹과 하위호환되는 학관이다 보니 무당파 관계자 또한 많았다.
심하게 다치긴 했어도, 치료가 가능한 지호연과 달리 자휘는 이곳에 기댈 곳이 없었다.
촤악.
자휘의 상처를 보며 모용설화가 자신의 소맷단을 통째로 뜯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잘게 찢은 후 자휘의 옆구리를 붕대 감듯 감았다.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조사만 끝나면 함께 의방으로 가자.”
“어, 그런데 너 옷이…….”
자휘의 눈이 반 이상 드러난 그녀의 흰 팔뚝으로 향했다.
“지금 옷 좀 망가진 게 대수야? 네가 다친 게 문제지.”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모용설화가 좀 거칠어졌네.’
자휘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 같았는데.
이제는 제법 화도 내고 서툴게나마 붕대도 감을 줄 알았다.
벌써 두 번의 죽음의 위기에서 힘들게 빠져나온 만큼 거칠어진 것 이리라.
자휘가 붕대를 감는 모용설화를 조용히 바라보는데, 그녀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관들에게는 적미륵에 대해 말할 수는 없어. 너도 알지?]
자휘가 그녀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이현에게는 적미륵이 없는 것 같은데 네가 숨긴 거 맞지? 곧 무량후 님이 오실 테니 그때 그분께 같이 말씀드리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자휘의 답에 모용설화는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급 신호탄을 날린 만큼 무공이 고강한 무량후는 곧 이곳으로 당도할 터였다.
‘교관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심하긴 해야 하니까.’
생도 중 하나가 현무학관으로 잠입한 혈천교도임이 드러났다.
그러니 교관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조심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때, 죽은 이현을 조사하던 교관 하나가 자휘와 모용설화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설명을 해주지 않겠나.”
교관의 말에 모용설화가 나서서 지금껏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말했다.
그러자 교관의 눈이 힐끔 자휘를 향했다.
“그럼 마인이 된 이현과 싸우는 동안 지호연이 중상을 입었고, 이곳을 지나던 인반 신입이 널 도와주었다는 건가?”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떠났을 때쯤에는 붉은 단약의 효과가 거의 다 떨어져서 상대하기가 아주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모용설화의 말에 교관의 눈이 못 믿겠다는 듯 자휘를 훑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혈천교인들은 본래부터 강한 데다가, 천반 생도 둘을 이긴 마인을 인반 신입이 이겼다니.
의심할 상황인 것이다.
“교관님. 이 생도는 인반 신입이지만 얼마 전 현천단을 먹은 데다가 현천관을 12관 모두 통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 여기시는 것인지요?”
모용설화의 말에 교관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교관이 뭐라 입을 열려는데.
“누가 지급 위험신호탄을 쏜 것이지?”
무량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고개를 돌리자, 무량후와 부학관장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급 위험신호탄을 쏜 것은 저입니다.”
무량후의 질문에 답한 사람은 모용설화였다.
무량후가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지급 신호탄을 쏨으로 인해 현무대전이 중단되었다. 지금 이것이 그만큼 중대한 일이더냐?”
“네.”
모용설화의 즉답에 무량후가 이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죽은 이현에게 닿았다.
“저 모습은…… 혈천교인이 적혈단을 먹고 마지막에 폭사한 것인데, 현무학관에 혈천교가 침투를 했다는 것인가?”
담담히 말하는 그의 말과는 달리, 거대한 기세가 꿈틀대고 있었다.
혈천교가 현무학관까지 들어와 분탕을 치자 그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다.
“왕 교관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내게 자세히 고하도록!”
무량후의 명에 지금껏 모용설화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교관이 전했다.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그의 눈길이 이번에는 자휘에게 향했다.
“혈천교 놈을 죽인 게 정말 네가 맞나?”
“맞습니다.”
자휘의 답에 무량후는 거짓을 판별하려는 듯 자휘를 보았다.
그러나 진짜로 혈천교인을 죽인 사람은 자휘이기에 자휘는 더욱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렇군.”
쉽게 수긍하는 무량후의 말에 교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학관장님께서 정말로 저 자휘란 생도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믿지 않으면?”
“그냥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교관의 말에 무량후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휘에게 물었다.
“그렇다는구나. 더 이상 할 말이 있느냐?”
그의 물음에 자휘와 모용설와의 눈이 잠시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학관장님께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만?”
“네.”
“너희 둘이 말을 하려는 것이냐?”
“맞습니다.”
단호한 자휘와 모용설화의 답에 무량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쪽 손을 들었다.
“이 두 아이만 남고 모두 물러가도록.”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교관과 부학장이 뒤로 물러섰다.
자리를 피하는 그들을 따라 다른 이들도 모두 자리를 피했다.
“자, 이제 너희들 말대로 사람들을 치웠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라.”
사람들이 물러나자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투로 무량후가 물었다.
그의 말에 자휘가 입을 열었다.
“학관장님께서는 적미륵에 대해 아십니까?”
적미륵이란 단어를 들은 무량후의 눈이 잠깐 커졌다.
그러나 곧이어 허허 웃는 그.
“알다 뿐이겠느냐.”
이어진 무량후의 답에 이번에는 자휘와 모용설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