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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38화 (38/200)

기갑무림 38화

가장 먼저 뭍에 내린 생도들은 역시 인반이었다.

그들은 미리 말을 맞추었는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인반 놈들 도망치는 것 좀 봐.”

“칠십육 명이나 있으면서 왜 저런대?”

“신입까지 합하면 거의 백 명이잖아. 머릿수는 제일 많은 것들이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꼴이라니.”

“아주 밥이네, 밥.”

도망치는 모습을 보던 지반 생도들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던 연가의 지영랑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천반 녀석들을 피해야 하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천반에서 가장 강한 선배들은 무림맹 실습에서 돌아오지 않았어. 해볼 만하지 않아?”

생도들의 말을 듣던 지반의 강자, 곤륜의 소후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천반이래 봐야 고작 아홉이고 우리는 사십이잖아.”

신입들은 아예 수에 넣지도 않은 소후가 반대편 배로 눈길을 돌렸다.

“재작년에 현무대전에서 승리한 반은 지반이었지.”

“맞아. 그래서 남궁비천 선배가 천반으로 승급했었고.”

“그때도 지금처럼 가장 강한 천반 생도들이 무림맹에 갔던 때야. 우리라고 남궁비천 선배처럼 못할 게 뭐가 있어?”

생도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홉 명 대 사십 명.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일등을 해보겠는가?

이미 한 번 남궁비천이 승리한 전적이 있기에 그들 또한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우리도 이긴다!’

호승심 가득한 지반 생도들의 눈빛이 아홉 명의 천반 생도들을 찌를 듯했다.

* * *

자휘 일행이 자리 잡은 곳은 현무도 뒤편에 있는 절벽 중간이었다.

옆으로 고개를 내밀면 배에서 내린 선착장이 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선착장을 주시하던 백미령이 상황을 전하기 위해 아래로 뛰어내렸다.

경공법으로 유명한 백가답게 가볍게 착지한 뒤, 자휘를 찾았다.

“인반은 도망가고 지반과 천반이 대치 중이야.”

나무 밑에 자리 잡은 제갈신과 자휘는 백미령의 말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백미령이 뭍 쪽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은 신입인 우리 따윈 신경 쓰고 있지 않아. 자기네들끼리 어떻게든 이기려고 머리를 쓰고 있는걸. 이대로 들키지 않고 계속 버티면 되지 않을까?”

그 말에 제갈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들은 힘없는 생도들을 먼저 공격해서 머리띠를 수집할 가능성이 커.”

“자기네들끼리 먼저 싸워봐야 우리 좋은 꼴밖에 안 되니까.”

그들은 인반부터 정리하고 그다음에 맞붙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절벽 위의 생도 하나가 다급하게 손짓했다.

급히 절벽 위로 올라가니, 여린 심성을 지닌 진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지반의 몇 명이 천반 쪽으로 가더니 갑자기 흩어졌어.”

“역시 인반부터 사냥하기로 합의한 모양이네.”

“인반부터……? 그럼 우린 어쩌지? 바로 들키는 거 아니야?”

진혜가 불안해하자 백미령이 말했다.

“여기는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진법까지 있어서 금방 들키진 않을 거야.”

그녀의 말에 하후홍도 불안한 듯 자휘에게 물었다.

“저, 정말 그럴까?”

“들켜도 싸우면 돼. 우리의 목표는 그냥 버티는 게 아니라, 머리띠를 모으는 거잖아.”

“어떻게…… 윗반 생도를 이겨?”

하후홍이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머, 머리띠를 빼앗기면 현무도 감옥에 갇힌다던데, 거기에 쥐가 득실득실하대.”

“……쥐?”

“쥐뿐만 아니라 바, 바퀴벌레도 있대. 그리고 식량을 안 줘서 쥐랑 바퀴벌레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진혜가 헛구역질을 했다.

“나, 난 감옥에 가기 싫어!”

“나도!”

하후홍과 다른 생도들이 질색하며 말하자 백미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 아직 머리띠를 빼앗기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버틸 방법을 생각해야지.”

그러나 백미령은 말과 달리 얼굴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아까 제갈신이랑 너랑 나무 주변에 뭔가를 하는 것 같던데. 혹시 이렇게 숨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방법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물음에 자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까 설치한 건 덫이야.”

덫이라는 말에 하후홍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혹시…… 진법을 이용한 덫이야?”

“응.”

“어떻게 지, 진법을 이용해 덫을 만든다는 거야?”

“그건…….”

자휘가 설명을 좀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반의 상급 생도 두 명이 현무도 뒤편까지 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버, 벌써!”

당황한 하후홍이 외마디 말을 외치려 하자 백미령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지반 생도들은 듣지 못한 듯,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인반 생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하후홍과 백미령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

“쥐새끼 같은 인반 놈들이 아주 잘 숨었나 보네.”

그들이 돌아가려 등을 돌리려는 순간.

앞에 있는 나무 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에 뭔가 있는데?”

“설마 신입들은 아니겠지? 그놈들 잡아봐야 점수도 별로 못 얻는데.”

“그래도 머릿수가 많으니 괜찮지 않을까?”

지반 생도들은 여유만만하게 소리가 난 수풀 쪽으로 향했다.

“어디, 몇 명이나…….”

그들이 수풀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앞에서 무언가 달려들었다.

검은 늑대 비슷한 생물체였다.

“막아!”

하나가 소리치자 옆의 놈도 앞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돌진하던 검은 물체는 팔을 통과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릉!”

그리고 또다시 다른 늑대 형상이 그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당황한 그들이 목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또다시 목검을 통과하는 검은 늑대들.

“이건 뭐야? 왜 이러는 거지?”

검은 늑대들은 끊임없이 덤벼들었고, 지반 생도들은 환상들을 베었다.

“혹시 환상인가?”

“환상이라면…… 설마!”

그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자신들이 있는 곳이 진법임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파앗.

뒤편에서 순식간에 날아온 신형 둘.

자휘와 제갈신이 그들의 머리띠를 뒤에서 빠르게 낚아챘다.

“이런……!”

머리띠가 풀림과 동시에 지반 생도들이 땅에 털썩 쓰러졌다.

머리띠에는 금제가 걸려 있어 빼앗기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던 것.

이것은 현무대전에 승복하지 못하는 생도들을 위한 조치였다.

“……!”

그들은 머리띠를 빼앗은 이의 정체를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흠. 꽤 놀랐나 본데?”

“인반의 신입 생도들에게 머리띠를 빼앗길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제갈신의 말에 자휘가 피식 웃었다.

함정으로 설치한 진법 근처에 오면 수풀이 흔들렸고, 적이 환상과 싸울 때, 뒤에서 머리띠를 잡아채면 끝이었다.

자휘가 어느 정도 자신한 것은 바로 이 함정 진법에 있었다.

제갈신은 빼앗은 머리띠를 살펴보았다.

청색의 머리끈에 새겨진 칠(七)자.

“칠이로군. 지반의 이 년 차 생도야.”

“운이 좋았네.”

“그러게. 간단한 함정이다 보니 이게 먹힐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말이지.”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방심해서 그렇지, 진짜로 싸웠으면 못 이겼을 거야.”

자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반 생도들의 방심 덕에 머리띠를 얻을 수 있었다.

“진짜 실력자가 왔다면 함정에 걸려도 당한 건 우리겠지.”

“맞아. 좀 더 진법을 보완할 수 있을까? 이 녀석들이 안 오는 걸 알면 또 사람들을 보낼 거야.”

“알았어. 그래도 조금의 시간을 벌었으니 진법을 좀 더 손볼게.”

제갈신이 진법을 손보는 동안, 자휘는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을 진법 안으로 보이지 않게 옮겼다.

펑! 펑!

그때, 하늘에서 신호탄이 동시에 여러 개가 터지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열 개가 넘는 흰색의 줄기들이 푸른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자휘는 신호가 전부 흰색인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주 신나게 인반 선배들을 사냥하고 있나 보네.”

생도들은 모두 신호탄을 지녔다.

천반은 흑색, 지반은 청색, 인반은 흰색.

머리띠를 빼앗게 되면 쓰러져 있는 생도들의 신호탄을 날려야 했다.

신호탄이 터지면 대기하던 교관들이 와서 움직이지 못하는 생도들을 감옥으로 옮겼다.

그 신호탄들이 지금 계속 터지고 있었다.

전부 흰색으로.

“좀 참아. 어두워지면 청색 신호탄도 날려 줄게.”

지반 생도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자휘가 사뭇 위로하듯 말했다.

“너희만 이렇게 된 것 같아서 화나고 수치스러워? 걱정하지 마. 왜냐하면…….”

이어지는 나지막하고도 차가운 말.

“여기에 오는 놈들도 다 너희처럼 될 거거든.”

* * *

지반 상급생도들은 다 쓰고 난 흰 신호탄 수를 세고 있었다.

교관이 머리띠를 빼앗긴 생도를 데리고 갔어도 신호탄 껍데기는 남았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오(五)가 새겨진 머리띠가 둘, 사(四)가 열, 삼(三)이 셋이다.”

빈 신호탄 껍데기에는 각각의 숫자와 신호탄을 얻은 지반 생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부 다 해서 오십구 점이네?”

“그래. 우리 지반이 얻은 점수지.”

“천반은 몇 점이야?”

천반의 점수를 묻는 지영랑의 물음에 소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쪽은 우리보다 많을 거야.”

지반이 잡은 인반 생도의 신호탄은 모두 열여섯 개였다.

그러나 하늘을 덮었던 흰색 연기는 얼추 봐도 마흔 개는 되어 보였다.

놈들은 최소 스무 명 이상의 인반 생도를 잡은 것이다.

‘제길. 우리가 놈들보다 더 많은데 인반 놈들을 더 적게 잡다니.’

고작 아홉 명인 천반 상급 생도들이 인반 놈들을 잡는 걸 보면 기가 막혔다.

천반이 대충 휘두른 듯한 몇 번의 초식에 인반 생도들이 푹푹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격차.

‘그래도 우리는 사십이나 되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천반 상급생도는 최고가 사 년 차였다.

소후 자신은 오 년 차.

차이가 난다 쳐도, 한꺼번에 덤비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그의 눈에 줄어든 지반 생도들이 보였다.

‘뭐지?’

내일까진 인반을 잡기로 약속해서 천반이 지반을 건들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후배들이 안 보이는 것일까.

소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년 차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걔네들? 다섯은 인반 놈들 사냥하러 갔고, 다섯은 식량 구하러 갔어.”

식량이란 말을 듣자 소후는 지금껏 못 느꼈던 허기가 들었다.

워낙 정신없이 사냥을 하다 보니 배고픈 것도 잊었다.

그는 쓰린 위를 쓰다듬으며 대답을 한 생도에게 물었다.

“왜 안 오지?”

“곧 올 거야. 인반 신입생도의 식량을 빼앗아야 하는데 놈들이 깊이 숨었나 보지.”

소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삼 년 차 둘을 가리켰다.

“너무 늦는 것 같으니까 너희도 가 봐.”

“……알았어.”

지반 일인자인 소후의 명령에 삼 년 차 둘이 느릿하게 일어나며 속으로 투덜댔다.

‘에이 씨, 만만한 게 우리지. 이 년 차 녀석들 만나기만 해봐라.’

그들은 속으로 투덜대며 생도들을 찾아 나섰다.

“너랑 나랑 같이 가면 늦으니까 넌 식량을 구한다고 갔던 쪽으로 가 봐. 난 다른 곳을 찾아볼게.”

“해가 곧 질 것 같으니까 찾으면 곧바로 와.”

현무도에서 밤에는 사냥을 금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 년 차 생도를 찾기 위해 지엽은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개방파 출신으로서 추적에 능한 생도였다.

‘흐음. 아까 걔네들을 이쯤에서 봤는데.’

오지 않는 생도들을 보았던 마지막 위치로 가서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럼 그렇지.”

흔적들을 따라 현무도 뒤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 반 각 정도 걸었을까.

음식 냄새가 미약하게 풍겨왔다.

“왜 음식 냄새가 나는 거지?”

그는 개방이니만큼 개 코였다.

‘음식을 꺼내서 먹지 않는 이상 냄새가 이렇게 날 리 없을 텐데. 설마 몰래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킁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 멀리 청색 옷을 입은 지반 생도 몇이 보였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아주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들이!’

주변으로 널브러진 흰옷의 인반 신입들.

아마도 식량을 가진 인반 신입을 사냥하고 먼저 배를 채우는 듯했다.

“하! 자기네들끼리만 처먹는다 이거지?”

다들 목마르고 뱃가죽이 들러붙었는데 동기 놈들이란 게 저따위 인성이라니.

성질이 나서 뒤엎으려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지엽의 앞에 물병이 보였다.

그는 거침없이 물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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