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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27화 (27/200)

기갑무림 27화

자휘를 위해 나선 생도는 다름 아닌 모용설화였다.

남궁비천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인반 생도다. 그것도 특혜로 들어온 아이지. 지금 지반과 천반에서 특혜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나서겠다는 말이냐?”

“그럼, 특혜자는 죽어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 텐데? 굳이 저런 녀석을 위해 우리가 나서서 얼굴에 먹칠해서야 되겠냐는 말이다.”

“말을 재미있게 하시네요. 먹칠하는 것은 불의에 눈감는 우리 스스로입니다.”

모용설화는 남궁비천과 주변을 둘러싼 다른 생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학관 내에서 살인이 벌어질 뻔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치죠? 지금 선배님들께서는 이 행동이 정파가 할 일이라 보시나요?”

그녀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닫았다.

모용설화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화산파의 혜연 선배님과 무당파의 연운 선배님.”

그녀가 보기에 정의롭다고 생각한 선배들을 향해 모용설화가 물었다.

“선배님께서도 이 상황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망설이던 천반의 생도, 무당의 연운이 나섰다.

“생도끼리 살수를 쓴 것은 잘못이다.”

그러자 화산의 혜연도 동조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건 팽지휴가 잘못한 건 맞아요.”

연운의 말에 화산의 혜연까지 맞다고 나서자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 일은 징계위원회에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요.”

그들의 말에 동조해서 몇 명의 생도들이 조심히 나섰다.

이 상황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불이익이 있을까 봐 먼저 나서지는 못했던 생도들이었다.

“보세요. 이래도 증인이 없다고 하실 생각인가요?”

“…….”

남궁비천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모용설화를 굳은 얼굴로 한동안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는 정파지. 설사 지금 손해가 날지라도 옳은 말을 하는.”

남궁비천이 모용설화에 동조한 생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겠다는 듯 보았다.

“그러나 모두의 정의와 신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수의 정의를 위해서 입을 다무는 것 또한 하나의 정의지.”

그는 이 사태의 원흉은 자휘를 쏘아보았다.

“이제 네 마음대로 되었군. 이제 만족하나?”

그의 눈빛에는 그도 알지 못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

“네. 만족합니다.”

자휘의 답에 남궁비천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그럼 증인들과 징계위원회에 잘 다녀오려무나.”

그는 생도들과 모용설화를 바라보고는 등을 돌렸다.

그를 따르는 대다수의 따가운 눈빛이 남은 생도들을 찔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던 혜연과 청운이 혀를 차더니 증인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라 말한 후 그들도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생도는 모용설화와 자휘, 그리고 당문의 당하연.

모용설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자휘야, 괜찮니?”

“난 괜찮아. 그런데…….”

내상이야 입긴 했지만, 며칠 요양하면 나을 정도였다.

기갑이 잘 막아준 데다 천년화조의 알을 먹은 뒤 신체적 능력 또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 때문에 곤란해진 건 아니야?”

자휘는 천반인 모용설화가 이번 일로 인해 남궁비천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 생각을 눈치챈 모용설화가 빙긋 웃었다.

“남궁세가가 강하긴 해도, 나도 모용세가의 딸이거든. 그리고…….”

모용설화는 옆의 소녀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얘도 당문의 아이고. 같은 오대세가끼리 불이익을 줘봐야 얼마나 주겠어.”

“맞아, 만약 그렇게 하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말하는 소녀는 당가의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있는 딸, 당하연이었다.

꽤 친해 보이는 둘은 말을 주고받았다.

“팽지휴는 늘 약한 아이들만 건드려서 눈에 거슬렸는데 잘됐어.”

“그런데도 남궁비천 선배가 감싸고 돌아서 불만이 많았거든. 이번 일로 저렇게 돼서 아주 고소하지 뭐야.”

그녀들은 이번 일이 진심으로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힘 있는 문파끼리 친목이 있다 한들 그런 인간은 없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만들기가 힘들었을 뿐.

“증인은 일부러 남궁비천이 손대기 힘든 사람들만 콕 집어서 나서게 한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생각은 있다고요.”

“어쩐지. 설화 요게 은근 여우라니까?”

당하연의 말에 모용설화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힘 있는 문파의 사람들만 증인으로 만들었다.

나선 이들 역시 당하연처럼 감당할 만한 자신이 있는 생도들.

그녀는 이 상황을 충분히 계산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자휘는 여전히 밝은 그녀들을 보자 걱정이 수그러들었다.

전혀 불이익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의 일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목숨 빚을 갚으려는 것일 수도.’

자휘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그녀에게 빚을 진다 해도 언젠가 갚으면 될 일이니까.

자휘가 잠시 가만히 있는데, 당하연이 약간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일은 그렇다 쳐도…… 남궁비천 선배가 널 보는 눈빛이 뭔가 있어 보이던데.”

“있긴 뭐가 있어. 그냥 동생 친구니까 좀 더 관심 가져 주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 어휴, 말을 말아야지.”

당하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모용설화가 웃었다.

“하연아, 고마워.”

“고맙긴. 친구 사이에 당연한 거지.”

투덜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당하연. 모용설화와 말을 주고받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번에 네가 나선 게 좀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요즘 바뀌었다곤 하지만 얌전하던 애가 그렇게 대차게 나선 게 좀 수상해서.”

꽤 오래전부터 모용설화와 친했던 당하연이다.

그래서 현무학관에 그녀가 온다고 했을 때 가장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곳에 온 모용설화는 변해 있었다.

전에 알던 그녀가 아닌 것처럼.

‘그 이유가, 혹시 저 아이 때문은 아니겠지?’

당하연의 눈이 돌연 자휘를 훑었다.

“어디 보자, 이름까지 부르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친한 사이 같은데.”

“어, 그게…….”

모용설화가 말릴 새도 없이 당하연이 자휘의 코앞에 훅하고 다가섰다.

“……!”

그러더니 구석구석 자휘를 관찰하는 그녀.

“……얼굴은 꽤 잘난 편이네. 우리 설화랑 언제부터 알았어?”

자휘는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 당하연을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아.”

당하연이 더 뭔가를 캐물으려는데.

“그, 그래. 어쩌다가 얼마 전 알게 되었어.”

모용설화가 당하연과 자휘 사이에 끼어들며 둘 사이를 띄웠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야. 그리고 이번 일은 자휘가 아니라도 나설 일이었어.”

“……진짜?”

“그래.”

“아하, 우리 설화가 이렇게 정의로운 아이인 줄 난 처음 알았네?”

“휴, 나도 정파야. 당연히 정의를 따라야지.”

“흐응~ 그렇구나아.”

뭔가 촉이 잡힌다는 얼굴로 빙글 웃는 당하연.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을 짓던 모용설화가 재빨리 말했다.

“우리 이제 징계위원회에 가야지. 자휘야, 어서 가자.”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 갑자기 잡아끄는 모용설화.

그녀에게 소매를 잡힌 자휘가 엉겁결에 답했다.

“……어, 그래.”

자휘는 빠른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용설화를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뒤에 서서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당하연이 중얼거렸다.

“저러니까…… 진짜 수상한데?”

그러더니 둘을 보며 소리쳤다.

“야! 같이 가야지. 증인 더 안 필요해?”

* * *

팽지휴의 징계를 요청하고 오 일이 지나서야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고의로 일을 축소하고 시간을 끄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분노한 제갈신이 항의하지 않았다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을 것이다.

간신히 열린 심의에는 관련된 생도들과 총 교관과 부관이 참석했다.

“……그래서, 지반 생도 팽지휴가 인반 생도를 죽이려 했다는 말인가?”

“아니요, 제가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시비였을 뿐입니다.”

팽지휴와 같은 자리에 있던 지반 생도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답했다.

그러자 총 교관의 눈이 자휘에게 향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단순한 시비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다시피, 팽지휴 선배님의 호아지란 무공은 일 성만 돼도 나무를 뚫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삼 성의 공력을 실은 그의 공격을 어떻게 단순 시비로 볼 수 있겠습니까?”

자휘의 말은 옳았다.

자신보다 하위 반의 생도를, 가슴부위에 삼 성의 공격을 가했다는 것은 살해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에 충분했다.

총 교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쯧, 적당히 어디 한군데 부러뜨릴 것이지. 제 분에 못 이겨 사고를 쳤군.’

그 역시 팽지휴의 평소 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안 봐도 상황이 그려졌다.

“하지만, 팽지휴의 말로는 네가 먼저 선배들에게 반말하며 시빗거리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는 두 손에 붕대를 하고 나타난 팽지휴를 흘끗 보더니 자휘에게 물었다.

“보지도 못한 자신에게 인사를 안 한다며 먼저 시비를 건 것은 팽지휴 선배였습니다. 그 후, 저 역시 반말을 한 것입니다.”

자휘의 말에 팽지휴 편에 있던 지반 생도들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놈이야말로 저희를 보자마자 반말로 시비 걸었습니다.”

“맞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와서는 너희는 현천단을 먹어보았냐며 얼마나 잘난 척을 하던지!”

“자기도 조금 있으면 지반으로 올라갈지도 모르니 잘 보이라며 저희를 무시했습니다!”

생도들의 거짓에 자휘가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숨을 내뱉었다.

반면, 사실을 모르는 생도들은 진짜 그랬나 하는 의문을 가지며 자휘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진실을 밝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의 자리에는 팽지휴와 거짓을 말하는 저것들만 있었으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자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래, 하나를 줬으면 열을 받으면 될 일이다.

“전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실 테죠.”

자휘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팽지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가 열린 것은 시비 문제가 아닙니다. 지반 생도가 인반 생도를 상대로 살수를 쓴 것이 이유가 아닙니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비를 누가 먼저 걸었건 간에 중요한 것은 팽지휴가 살수를 썼다는 사실이었다.

“팽지휴 선배가 살수를 쓰는 것을 본 목격자가 다수 있습니다.”

자휘의 말에 총 교관은 증인으로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혜연, 무당의 연운.

그리고 당가의 소저와 나름 이름있는 문파의 생도들.

‘쯧,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저들이 진실도 아닌 일에 지방 장원에서 온 특혜자의 편을 들어주진 않을 테다.

“그러니 총 교관님께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자휘는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총 교관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총 교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저 그런 문파라면 무시라도 하건만.

이름 높은 문파의 자제들이 나서니 그로서도 난감했다.

‘하필 가장 큰 죄를 짓다니.’

현무학관에서의 가장 큰 죄는 고의로 생도를 죽이려 한 행동이다.

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원칙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반의 팽지휴.”

“네.”

팽지휴를 부르자, 체념한 얼굴의 팽지휴가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상황이 자신에게 안 좋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본 교관이 보기엔, 네가 억울한 점도 있을 것 같으나…….”

총 교관의 말에 팽지휴가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혹시나 하는 빛이 맴돌았다.

“현무학관의 교칙 제1조에 따라, 같은 생도를 고의로 죽이려 한 너를 무기정학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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