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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20화 (20/200)

기갑무림 20화

“저 생도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제갈신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지반 생도가 결국 사실을 내뱉었다.

이 상황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총 교관이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가 점혈을 잘못한 것이 맞느냐?”

그는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말속에는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할 수 있냐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반 생도 또한 포함된 의도를 알았다.

그러나 제갈신의 말대로 그는 정파다. 무엇이 무서워 신념대로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는 사람들을 향해 또렷이 답했다.

“네, 맞습니다.”

단번에 잘못을 인정하는 지반 생도를 보는 총 교관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렇군.”

당장에라도 자휘라는 놈을 감싸는 놈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사파도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압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궁비천이 대신 나서서 지반 생도를 윽박질렀다.

“어떻게 지반 삼 년 차 생도가 수혈하나 못 짚는단 말이냐? 총 교관님, 수련을 제대로 못 한 벌을 주셔야 함이 마땅합니다!”

총 교관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러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명분이 마땅찮았다.

울타리 훼손 건이야 큰 건이라 해도, 생도 하나가 점혈을 잘못한 것이 뭐가 큰일이란 말인가.

그 덕에 아이들을 구한 마당이었다.

총 교관이 나서기에는 모호한 일.

하나, 감히 그에게 반기를 드는 아이들을 보는 그의 마음은 무척 좋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울타리 훼손 건은 무림맹에서 직접 조사가 나올 것이다.”

총 교관은 굳은 얼굴로 일어났다.

중소문파의 특혜로 들어온 아이가 공을 세운 것이 못마땅해 꼬투리를 잡아 내치려 했건만.

놈은 인반 아이들의 마음을 이미 휘저어 놓았다.

특히, 미래의 군사가 될지도 모르는 제갈세가주의 외동아들인 제갈신까지.

총 교관의 뒤돌아선 입술이 비틀렸다.

‘굴러들어온 잡돌 주제에 감히.’

그러나 오늘만 날은 아니었다.

현무학관에서의 생활은 길다.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아나.

“진자휘라고 했나? 내 기억하도록 하지. 오늘의 공은 조만간 크게 보답하겠다.”

그는 등을 홱 돌리고는 소강당 밖으로 나갔다.

남궁비천 또한 아이들을 쏘아보고는 그를 따라나서자 선배 생도들도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진실을 말한 지반 생도는 잠시 홀로 서 있다가 자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럼 나는 가 보겠다. 만약 다음에도 증언이 필요하다면 이야기해 주렴.”

“감사합니다.”

나는 그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진실을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런 결정을 하다니.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애초에 점혈 자체를 할 수 없었으니까.’

점혈 당시 부분 기갑화가 되는 바람에 혈도 자체가 보호되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기갑 기능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다만, 왠지 후련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언젠간 이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이제 끝났구나.”

“우아, 피곤해 죽겠다. 설마 오늘 훈련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럼 난 정말 힘들어서 죽을지 몰라.”

소강당에 남은 인반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자휘는 아이들을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다.”

그러자 인반 생도들이 웃으며 화답했다.

“고맙긴. 너는 우리의 은인이잖아.”

“은인을 몰라보면 그게 정파인이야?”

“맞아. 아까 제갈신이 우리는 정파라고 말할 때 괜히 소름 돋았다니까.”

“나도 그래. 정파라는 단어가 그렇게 멋진 단어인지 몰랐네.”

“크흠, 그것도 모르고 여기 온 거야? 난 현무학관에서 의협(義俠)이 되는 걸 꿈꾸며 왔다고.”

의협을 꿈꾼다는 생도를 보며 다른 이가 웃었다.

“협은 무슨. 너 어제 구덩이에서 늑대 보면서 오줌 지리지 않았냐?”

“뭐? 너, 너는……!”

“구덩이에서 나올 때 봤거든. 크큭.”

“그, 그거 아니야! 네가 잘못 본 거라고!”

투덕거리는 생도들을 보는 자휘의 눈가가 시큰거리며 괜스레 달아올랐다.

각자의 문파는 다를지 몰라도 그들은 의와 협을 꿈꾸는 아직은 해맑은 소년, 소녀들이었다.

그런 자휘를 보던 제갈신이 먼저 밖으로 한 발짝 나섰다.

“자, 그럼 우리도 이제 숙소로 가자!”

제갈신의 말에 투덕대던 인반 생도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나를 제갈신이 툭 쳤다.

“뭐 해? 안 가고.”

“그냥.”

뭔가 뒷말을 하려는데 이상하게 목이 메어왔다.

현무학관에 들어온 목적은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몸이 강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진가장에서 늘 외로웠었는데.

이곳은 아닌 것 같아서.

“……좋네.”

“뭐가?”

왁자지껄한 생도들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하는 내게, 궁금한 듯 제갈신이 물었다.

“현무학관이라는 곳이 꼭 나쁜 곳만은 아닌 것 같이 느껴져서.”

“음. 내가 이곳을 뭐라 정의할 수 없겠지만, 사람은 보는 대로 보인다고 생각한다.”

제갈신은 옅은 미소를 띠고 현무학관을 둘러보았다.

“나는 네가 이곳에서 좋은 것만 보길 바라.”

그 역시 자휘가 현재 어떤 처지인지 모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탈일 정도였다.

“걱정 마. 좋은 것만 보고, 쫓아내려고 해도 이곳에 꼭 달라붙어 있을 테니.”

자휘의 답에 제갈신이 옅게 웃었다.

“나도 옆에서 조금이라도 도울게. 사실, 현무학관은 너무 고여 있어서 썩기 직전이었거든. 너라는 새로운 물이 들어오니 우선은 막고 보는 것이겠지.”

“내가 새로운 물이라고?”

“그래, 새로운 물길을 틔우는 하나의 도전과 시도지. 기존의 모든 것을 새로움으로 물들이려 하는 널 윗선은 탐탁지 않아 할 수밖에 없어.”

제갈신이 보기에 그들은 너무 꽉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겨우 중소문파에서 특혜로 아이가 들어왔다고 쫓아내려는 꼬락서니를 보라.

그게 어떻게 정의와 협을 부르짖는 정파의 높은 이들이 할 행동이란 말인가.

그는 무림이 좋은 방향으로 새롭게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그릇으로는 흐름을 바꾸기엔 부족하다. 그러나 이 아이라면…….’

이백 년 전, 정파는 그들만의 가문의 영광을 추구하다가 마교에게 당했다.

힘만 있다면 누구도 가리지 않고 우대해주는 마교에 무공이 높은 이가 몰렸던 탓이었다.

다행히 천갑무신이 나타나 마교천하는 되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을 정파인들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었다.

“어쩌면 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뭐가?”

이번엔 자휘가 되물었으나, 제갈신은 답 없이 그저 미소 지었다.

* * *

다행히 그날 훈련은 없었다.

전통대로 신고식 다음 날은 선배와 신입생 모두 힘든 날이었기에 훈련 일정을 하루 뒤로 잡아 놨던 것.

아이들은 숙소에서 쉬며 못 잔 잠을 자거나 훈련을 미리 대비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깊은 밤이 되어 아이들 모두가 잠에 빠져 있을 무렵.

나는 슬며시 일어났다.

‘이 시간이면 사람들이 많지 않겠지.’

조심스레 코를 골며 자는 하후홍을 바라보았다.

어제 일로 무척이나 힘들었는지, 정신없이 잠에 곯아떨어진 하후홍.

방을 같이 쓴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가장 먼저 나서준 사람은 하후홍이었다.

‘먼저 나서준 덕에 선배 생도가 사실을 말해 준 거나 다름없었어.’

내가 나간다면 그다음 목표가 특혜를 받은 다른 한 명인 하후홍이 될 터였다.

그 목표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순수한 호의로 나서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갈신은 내가 목숨을 구해줘서 그렇다 쳐도, 넌 그렇진 않았으니까.’

어제 생도들에게 받은 감동과는 별개로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나였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이지.’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영약 때문.

어제 갑자기 쏘아 올려진 신호탄에 영약을 구하다 말았다.

그게 못내 찜찜하고 아쉬워 밤이 되자마자 자리를 뜬 것이었다.

‘역시 현무학관을 지키는 보초들이 있군.’

살며시 밖으로 나가보니 울타리 사건 덕에 더 많은 인력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위험해지면 알아서 투명화가 될까?’

궁금했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능은 투명화 기능과 부분 기갑 기능.

그런데 이 기능들은 내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갑이 알아서 판단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기능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언제쯤 편하게 기능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까?’

아직 반절도 안 되는 동화율이니 기능조차 마음대로 못 쓰는 것일 테다.

‘그래도 위험하면 기능이 발현된다고 했으니 믿어보자.’

마음먹은 대로 기능이 발현되지 않는다고 손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두운 곳을 향해 대담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보초들에게 걸린다면 화장실에 가다가 실수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셈이었다.

그러나 발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두근댔다.

보초를 피해 담장을 넘으려는데.

[위험을 감지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초들이 여럿이 담장 너머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현재 상황에서 최적의 기능인 투명화를 펼칩니다.]

[지속시간은 반 각입니다.]

스스―

투명화 기능을 알림과 동시에 온몸이 심장 부근부터 꿀렁대며 투명화가 되기 시작했다.

‘흐읍!’

전과 똑같은 느낌.

바로 투명화가 되어서 다행이지, 가뜩이나 의심을 받는 판에 담장을 넘는 것을 현장에서 들킬 뻔했다.

‘역시 되는구나.’

예상대로 위험 순간에 투명화 기능이 발현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음대로 기능을 쓸 수 없다면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된다.

그리고 모험은 성공했다.

일부러 위험하게 만든 행동에 기갑은 반응했고 원하던 투명화 기능을 불러낸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나는 투명화를 유지한 채로 재빨리 담장을 넘었다.

기갑의 기능을 쓸 때는 몸 전체의 기능도 한 단계 높아졌기에 담장을 넘기는 쉬웠다.

[위험요소가 사라졌습니다.]

[투명화를 해제하시겠습니까?]

현무학관의 담장 밖으로 내려서자 목소리가 투명화 해제 여부를 물었다.

‘흠, 그대로 기능을 쓰는 게 아니라 위험한 요인이 있을 때만 기능이 계속 유지되는구나.’

묻는 걸로 보아 한 번 쓰면 계속 쓸 수도 있지만, 위험요소가 사라진다면 지속시간을 멈출 수 있는 듯했다.

내 대답은 당연했다.

“투명화 해제.”

해제를 말하자, 투명했던 온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시에 훅하니 끼치는 탈력감.

그러나 투명화 기능을 많이 쓰지는 않아서인지 지난번과 같이 탈진할 정도의 탈력감은 들지 않았다.

“이 기능은 볼수록 신기하네.”

한순간 투명화가 되었다가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온 손은 조금이 빛이 맴돌았다.

“그럼 가 볼까.”

기갑이 위험요소를 감지 못한 만큼 주변에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한 나는 거리낌 없이 산을 올랐다.

일각 정도 산을 오르자 나타난 무덤가.

어제는 아이들이 있어 몰랐는데 무덤가의 공기는 서늘하고 주변은 휑했다.

“어제 저쪽으로 갔던가?”

나는 무덤에서부터 어제 갔던 길을 더듬었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 황소 모양의 커다란 돌과 그 앞에 있는 나무가 보였다.

[근처에 영약이 있습니다.]

내 생각을 확신시켜주듯 목소리가 영약이 근처에 있음을 알렸다.

나는 빠르게 황소 모양의 바위로 향했다. 그러나 여전히 영약은 보이지 않고 바위와 나무뿐이었다.

“어디에 영약이 있다는 걸까?”

나무와 바위를 살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바위 밑에 있는 건가?”

황소 모양의 바위 밑을 파보아도 그저 흙만 나왔다.

[이곳에 영약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영약이 있다는 말만 나왔다.

자세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근처에 있다고만 나오는 목소리.

‘하, 뭐지?’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러자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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