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8화
제갈신이 교관에게 가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신입 신고식이 어느 정도는 위험 요소가 있다곤 하나, 이번 일은 잘못했으면 생도가 죽을 수도 있었다.
‘아마 남궁비천 선배도 이번 일에서 자유롭진 못할 거야.’
처음 인반으로 배정한 교관에게도 느꼈지만, 이곳은 차별대우가 심했다.
차별받기 싫으면 강해지라는 건데 명문세가의 풍족한 지원을 어떻게 따라잡나.
‘한마디로 네 주제를 알라는 거지.’
이번 신고식은 강한 생도들에게는 피나는 수련을 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그러나 약한 생도들은 비참함을 느끼게 만드는 장치와 같았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문파들의 자제들을 사전에 길들이고,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갈신이 올 때까지 인상을 찡그리며 생도들을 보고 있는데, 드디어 하나씩 구덩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름이 자휘…… 라고 했나? 우리가 점혈을 풀 동안 지켜줘서 고맙다.”
제갈신 다음으로 구덩이에서 나온 생도는 성운과 연엽이었다.
오대세가 다음으로 유명한 신흥방파 소속의 자제들.
“고맙긴 뭘. 그럼 이젠 너희가 아이들을 지켜봐 주지 않을래?”
자휘가 피곤한 얼굴을 하자, 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네가 지금껏 우리를 지켜줬는데.”
“가서 좀 쉬어. 여기는 우리가 지키고 있을게.”
나는 자리를 뜨기 전 여전히 점혈을 푸느라 애쓰는 하후홍을 바라보았다.
“하후홍, 그럼 이따가 보자.”
“그, 그래. 오늘 고생 많았어.”
이제 웃기까지 하며 대답하는 그는 처음보다는 나아 보였다.
‘점혈을 조금씩 풀다 보니 피가 통해 나아진 듯하네.’
어쨌건 다행이었다.
하후홍의 몸이 더 안 좋았다면 아무래도 곁에 더 있어야 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해.”
나는 남겨진 아이들을 두고 먼저 숙소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야에서 내 모습이 사라질 때쯤, 재빨리 방향을 바꿨다.
내가 가는 곳은 숙소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던 것.
그런데도 발걸음은 빨라지고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찼다.
이유는 아까부터 계속 들리던 목소리 때문이었다.
[영약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기갑화 기능이 종료된 후,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가 주변에 영약이 있음을 알려왔다.
‘근처에 영약이 있을 줄이야.’
처음 기갑이 영약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속으로 무척 놀랐다.
생도들이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강해질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잘됐다.
어떤 영약인지는 몰라도, 강해지는 데는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이놈의 목소리는 불친절했다.
“어디에 있다는 거지?”
목소리는 영약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기갑의 기능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고 꺼내쓸 수도 없는 것처럼 영약 또한 같았다.
“계속 산속을 헤맬 수는 없는데.”
조만간 인반 생도들은 점혈을 풀고 숙소로 돌아갈 것이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과 같이 숙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리저리 숲속을 헤매고 있는데 목소리가 울렸다.
[삼 장 거리에 영약이 있습니다.]
삼 장 거리라면, 내 걸음으로 스무 걸음 정도다.
넓기는 하나 눈에 보이는 거리.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나무와 풀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없잖아?”
목소리가 잘못 안 것인가 싶었다.
[이 장 거리에 영약이 있습니다.]
여전히 목소리는 영약의 존재를 알려왔다.
“이 장 거리라 해봐야 이 근처인데.”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 눈에 띈 커다란 나무.
나무 바로 뒤에는 황소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정도가 이장 거리다.’
바위 쪽을 바라보는데, 바위가 나무 밑동과 거의 맞닿아 있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영약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있을 곳이 아닌데 목소리는 줄기차게 이곳에 영약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나무와 바위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삐이―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하늘 위에서 터지는 하얀 신호탄.
‘흰 신호탄이라면 인반 아이들을 부르는 신호 아닌가?’
입학식 때, 흰색의 신호탄은 인반을 부르는 것이라 들었다.
“어쩌지?”
기껏 찾은 곳이다.
그러나 아직 영약을 발견하지는 못했기에 우선은 호각 소리에 맞춰 현무학관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곳의 지형이 특이한 편이니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시 오자.’
나무와 황소 모양의 바위를 바라보는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 * *
“신고식을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제갈신의 연락을 받은 총 교관이 신입생도 신고식을 준비한 생도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하마터면 인반 생도가 죽을 뻔했다!”
총 교관의 화에 생도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현무학관 생도들의 대표인 남궁비천이 나섰다.
“죄송합니다. 근처 짐승들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늑대 한 마리가 몰래 들어간 듯합니다.”
“너희는 후배들을 지키지 않고 무엇을 한 것이냐?”
“그것이…… 지난 삼십여 년간 사고 한번 나지 않았던 것이라, 약 오 년 전부터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뭐라? 오 년 전부터 지키지 않아?”
총 교관이 탁자를 소리 나게 내려쳤다.
“이제 이곳에 갓 입학한 생도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그냥 두고 가다니!”
선배 생도들이 준비한 이 신고식은 효과가 좋았기에 그도 눈감아 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단순히 다치는 것을 넘어 생도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제갈세가의 아이가 말이다.
총 교관은 굳은 얼굴로 남궁비천을 향해 말했다.
“이럴 거라면 신고식은 없애야 할지도 모른다.”
아예 신고식을 없앤다는 말에 남궁비천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신고식은 현무학관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이번 일에 실수가 있었지만 다친 아이 하나 없지 않습니까?”
“너희가 잘나서 다친 아이가 없는 줄 아느냐?”
총 교관은 더욱 화가 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특혜를 받고 온 중소문파의 놈이 인반 생도들을 구했단 말이다!”
“……네?”
특혜를 받은 아이가 인반 생도들을 구했다는 말에 남궁비천의 얼굴에 불신이 담겼다.
“어떻게 인반의 특혜자 따위가 생도들을 구한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덕분에 중소문파의 입김이 세질 걸 생각하면…….”
총 교관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림맹에 얼굴을 들 수가 없지 않은가!”
총 교관의 말에 남궁비천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 역시 무림맹의 주요세력 중 하나였으니 중소방파의 입김이 세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일부러 약해 빠진 놈을 골랐건만, 그놈이 인반 생도들을 구하다니.”
총 교관은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아이들을 불러 자세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불러야겠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아직 반 정도는 점혈을 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고식은 중지하고 점혈을 못 푼 아이들은 너희들이 데려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남궁비천이 남은 인반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자, 총 교관은 하얀색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인반 아이들을 구했다는 놈을 직접 봐야겠구나.”
이번 일에 특혜로 들어온 놈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흠집을 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의 체면이 살고, 중소문파의 콧대를 죽일 수 있으므로.
‘잡초는 밟아줘야 하겠지.’
잠시 뒤, 신호탄이 쏘아졌다.
인반을 부르는 교각 소리가 현무학관 주변 곳곳에 울리기 시작했다.
총 교관의 명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가에 선배 생도들과 부교관이 도착했다.
이때, 대부분의 인반 생도들은 점혈을 풀고 남은 생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괜찮은가?”
“네. 지금은 괜찮습니다.”
부교관의 물음에 인반 아이가 답했다.
“너희들이 신고식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들었다. 남은 아이들은 선배 생도들이 꺼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마터면 죽거나 크게 다칠 뻔한 아이의 입에서 불퉁한 답이 나왔다.
그러나 부교관은 알면서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의 묵인 아래 선배 생도들이 벌인 일이고, 신입생도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왜 늑대가 들어와서는!’
부교관과 선배 생도들의 눈이 자휘가 죽인 늑대에게 닿았다.
자신들은 분명 근처에 짐승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늑대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좀 떨어진 거리라고는 하나, 근방은 모두 현무학관 소유의 땅이었다.
학관 소유다 보니 주변에는 경계와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의 짐승들만 처리하면 될 줄 알았다.
부교관과 선배 생도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여기 와 보십시오!”
지반 생도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부교관과 다른 생도들이 다가서자, 생도는 울타리 한쪽을 가리켰다.
“분명,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울타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훼손한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울타리 점검을 맡았던 생도는 어제만 해도 울타리가 멀쩡했기에 짐승 따윈 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늑대 한 마리가 들어와 사달을 냈다.
억울한 마음에 다시 이곳에 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울타리가 훼손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부교관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질문했으나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고의로 훼손한 울타리였다.
이는, 인반 아이들을 누군가 일부러 다치게 하려고 해놓은 것이었다.
‘혹시…… 특혜로 들어온 아이들을 싫어한 사람들의 짓인가?’
그렇다면 그 아이들만 상하게 할 것이지 왜 제갈세가의 아이를 죽이려고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현무학관에 악의를 품고 한 행동 같았다.
만약, 인반 아이가 아니라 천반이나 지반 아이들에게 늑대가 다가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나마 인반이라 다행이었어!’
주요 인사들의 자제가 있는 천반과 지반에서 사상자가 나왔다면, 무림맹의 미래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이번 일은 조사가 필요하겠구나.”
처음엔 그저 사고 정도로 생각했던 부교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 *
현무학관의 소강당에 신고식에 있었던 모든 생도가 모였다.
점혈을 풀지 못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다 풀린 상태였다.
그러나 생도들은 밤새 잠을 못 잤기에 얼굴이 퀭했다.
“늑대 사건 때문에 우리를 부른 건가?”
“그럴걸? 그런데 어제 긴장한 데다가 한숨도 못 자서 너무 피곤하다.”
“빨리 가서 잤으면 좋겠는데.”
지반이나 천반의 경우 무공이 높아 큰 피로를 못 느끼겠지만 인반의 생도들은 달랐다.
그들은 아직 무위가 높지 않은 데다 어제의 일에 심력을 소모한 터라, 다들 너무 피곤했다.
‘왜 호각까지 불며 이곳으로 다 부른 거지?’
자휘는 이번 호출이 과하다 생각했다.
단순 사고일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선배들의 얼굴이 다들 굳어 있었다.
‘뭔가가 있어.’
자휘가 속으로 이유를 생각하며 조용히 있는데, 남궁비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 교관님께서 오신다. 다들 자세를 바로 하도록!”
남궁비천의 말에 따라 다들 몸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감이 감도는 소강당의 공기.
잠시 후, 총 교관이 들어섰다.
“어젯밤,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들었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총 교관의 날카로운 눈이 아이들을 훑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아주 잠깐 자휘에게서 멈췄다.
‘뭐지? 설마 날 봤던 건가?’
총 교관은 입학식 빼고는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번 일에 생도들을 구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은 들었을 테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자휘에게 머문 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총 교관은 생도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