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6화
목소리가 물었다.
‘부분 기갑 기능?’
지난번 투명화 기능을 사용할 때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인지 바로 발동되더니, 이번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 선택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니겠는가.
[현재 동화율은 47입니다.]
[부분 기갑 기능 선택 시 동화율이 45까지 개방됩니다.]
지난번 적미륵을 얻고 나서 추가로 얻은 동화율이었다.
‘부분 기갑 기능이라면 좋은 것 같긴 한데.’
기능 선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보니, 괜찮은 뽑기가 나온다면 골라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동화율이 마음에 걸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문이 스르륵 열렸다.
‘누구지?’
나는 자는 척을 하며 들어온 이들이 누군가를 살폈다.
그러자 조용히 열린 문 사이로 기척 없이 들어오는 검은 인영.
호리호리한 체격의 검은 인영은 무려 다섯 명이나 되었다.
[부분 기갑 기능 선택을 취소하시겠습니까?]
[5를 셀 동안 답이 없으면 자동으로 취소됩니다.]
검은 인영이 들어옴과 동시에 선택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선택하면 이젠 없다고!’
이번 한 번으로 동화율을 써버린다면 이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적미륵을 지난번처럼 운 좋게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으니까.
급하다 한들, 무턱대고 선택할 수는 없었다.
이불 속에서 눈을 살짝 드니 인영 중 하나가 하후홍의 점혈을 짚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하려고 점혈까지 하는 거야?’
목소리는 취소될 시간을 알려오고, 검은 인영은 이번에는 날 점혈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2.]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명의 위험이 적긴 해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남은 동화율이 아깝더라도 써야만 했다. 설령, 이것이 마지막 남은 선택일지라도 말이다.
[1.]
난 어쩔 수 없이 소리쳤다.
‘부분 기갑 기능 선택!’
[부분 기갑 기능이 설정되었습니다.]
[지속 가능 시각은 반 시진입니다.]
목소리가 부분 기갑 기능을 설정하자마자, 검은 인영이 내 몸의 혈도를 재빠르게 누르려 손을 들었다.
아주 찰나의 사이.
촤르르-
점혈을 하려던 부분이 투명한 기갑으로 빠르게 덮였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막혀 버린 점혈.
투툭.
순간, 검은 인영이 멈칫했다.
“……?”
내 몸이 부분 기갑화가 되는 바람에 뭔가 잘 안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무거우니 얼른 가자고.”
검은 인영은 다시 한번 날 점혈하려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멈췄다.
“……그래.”
하후홍을 짊어진 한 명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날 점혈했던 인영이 움직이지 않는 날 보고는 괜찮겠다 싶었는지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검은 인영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쓰린 속을 달랬다.
이제 남은 동화율이 거의 없음에 속이 쓰려왔던 것.
그러나 쓴 것을 어떻게 하겠나.
점혈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했다.
‘적은 아닌 것 같고. 선배들인가?’
듣기에 의하면 학관에 따라 입학신고식을 심하게 치르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행동들이 신고식인가 싶었다.
‘지금 깨어나 봐야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그럼 일단 당한 척하자.’
어떤 신고식이길래 목소리가 부분 기갑화 기능까지 줬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두고 보자 싶었다.
정 안되면 튀면 그만이었다.
부분 기갑화 기능의 지속시간이 반 시진이나 된다고 하니 여유도 있고.
가만히 있는데, 하후영을 맨 인영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이놈의 뚱땡이는 뭘 먹었길래 이렇게 무거워?”
“넌 지반 삼 년 차면서 돼지 한 마리 못 들고 가냐?”
“몰라. 이상하게 더 무겁다고.”
그들이 움직인 방향은 현무학관 뒤의 산이었다.
산을 타게 되자, 하후홍을 짊어진 인영이 숨을 헐떡거렸다.
“헉, 헉. 죽겠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널따란 공터에 무덤이 가득한 곳이었다.
눈을 살짝 떠보니, 무덤 앞마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깊게 패어 있었다.
‘설마 저 구덩이에 신입생을 넣는 건가?’
생매장하는 것 같았지만 진짜로 그럴까 싶어 이번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짐작대로 날 매고 왔던 사람이 무덤 앞 하나를 골라 그 안에 내 몸을 쑤셔 넣었다.
철퍼덕!
풀썩.
나뿐만이 아니라 구덩이 안에 각자 둘러맨 신입생들을 던지는 검은 인영들.
하후홍은 바로 내 옆자리의 구덩이에 던져졌는데, 그만 몸이 엉덩이 부근에서 껴버렸다.
구덩이는 얼굴만 내밀게끔 세로로 깊게 파여 있었는데, 하후홍의 덩치가 워낙 커 걸려 버린 것이다.
몸만 못 움직일 뿐, 이미 정신을 차린 하후홍.
“……?!”
그의 눈이 당황으로 떨려오는 것이 내 자리에서도 보였다.
“아, 이 돼지 새끼가!”
검은 인영이 성질을 내며 주변을 파자, 겨우 하후홍의 몸이 들어갔다.
신입생도 모두가 구덩이에 들어가고 나서야 인영들이 앞으로 일렬로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나타난 한 사람이 검은 인영들에 물었다.
“전부 구덩이에 넣은 건가?”
“네!”
검은 인영 수십이 복면을 한 사람을 향해 답했다.
“새로 들어온 생도 중에 눈치챈 아이는 없고?”
“천반 생도들이 기척을 느끼고 반항을 하긴 했으나, 곧바로 제압당했습니다.”
“그렇군.”
천반의 신입생을 제압한 사람들은 같은 천반의 선배들이다.
아무리 뛰어난 신입생이라 한들, 그보다 뛰어난 선배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앞에 선 검은 인영이 얼굴에 쓴 복면을 벗자,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남궁비천이다!’
그는 현무학관 생도 중 가장 강한 무인이자, 생도들의 대표인 남궁세가의 남궁비천이었다.
“신입생도들은 들어라.”
그가 구덩이에서 눈만 뜨고 있는 서른세 명의 신입생도를 향해 크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적이었다면 너희는 죽었다.”
그와 함께 신입생도들이 묻힌 구덩이 앞에 선 검은 인영들이 칼을 빼 들었다.
“……!”
달빛을 받은 시퍼런 칼날이 신입생도들의 목에 닿자 움직이지 못하는 몸들이 떨려왔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이곳에 묻혔겠지.”
새벽 동이 터오기 전, 신입 생도들이 묻혀 있는 무덤 앞의 땅속은 차가웠다.
땅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마치 죽음처럼 소름 끼치게 몸을 감쌌다.
“너희 뒤에 자리한 무덤들은 현무학관에서 죽은 선배들의 무덤이다.”
가라앉은 남궁비천의 목소리가 놀란 생도들의 귀에 얹혔다.
“이들은 너희와 같이 꿈을 안고 현무학관에 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임무 도중 적을 만나 숨졌다. 너희들도 앞으로 이들처럼 죽을지도 모른다.”
무림에서 아직 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신입생도들에게, 죽은 선배가 있는 무덤 앞의 땅속은…….
죽음이 그들에게도 올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이 결코 남의 손에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적에게서 개죽음당하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
몸을 떨며 집중하는 신입생도들의 눈이 남궁비천에게 향했다.
“피땀 흘린 수련뿐이다.”
그는 자신을 보는 아이들의 눈을 보며 말에 힘을 주었다.
“가문의 단물만을 빨아먹으며 배부른 짐승이 되어 적에게 잡아먹히지 말고, 수련을 통해 한 명의 무인이 되어라.”
수련을 강조하는 남궁비천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가문의 영광을 지운 채 스스로 강해져라. 현무학관은 그런 너희를 응원하며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남궁비천의 말에 땅속에 묻힌 아이 중 일부는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솟아 나왔다.
지금 땅속에 묻혀 남궁비천의 말을 듣는 이들은 귀하게만 자라온 자제들이었다.
그들이 언제 이런 말을 들었겠는가.
게다가 말을 하는 이는 현무학관의 대표이자, 정도 무림의 빛이라 불리는 남궁비천이었다.
“자랑스러운 너희들의 현무학관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는 마지막에서야 고개를 숙이며 신입생도들에게 환영의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남궁비천이 손짓하자 거두어지는 칼날들.
죽음을 온몸으로 두르고 들었던 남궁비천의 말은 신입생도들에게 크게 각인되었다.
‘죽지 않으려면 수련을 해라. 오직 수련만이 살길이다.’
남궁비천이 전하는 말은 간단했으나, 더욱 절실히 와닿았다.
“…….”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생도들의 눈 속에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일부러 생각하는 시간을 준 듯, 잠시 뒤에 검은 인영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를 점혈한 혈도는 약 두 시진이 지나야 풀릴 것이다.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 생도는 더 빨리 풀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생도는 늦게 풀리겠지.”
그가 손을 들자, 검은 인영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점혈이 풀리는 시간 동안 무공이 약한 놈들은 자신을 돌이켜보길 바란다. 먼저 풀린 아이들은 절대 남은 아이의 점혈을 풀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검은 인영이 아이들을 한번 훑고는 등을 돌렸다.
그들의 행동에 자휘의 눈이 커졌다.
무공이 약한 하후홍이나 자신은 그럼 두시진 동안 땅에 처박혀 있으란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이대로 있으라는 거야?’
자휘는 소리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들짐승들이라도 달려들면 어떡하려고?’
혹시나 남은 사람이 있나 싶어 보았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제길! 억울하면 무공을 늘리라는 건가?’
몰래 주변을 돌아보니, 천반과 지반 아이들은 벌써 점혈이 풀리는지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반면 인반 아이들은 얼굴만 벌겋게 변해 있을 뿐.
탓.
잠시 뒤, 천반 복장을 한 생도 하나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같은 천반 생도가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두 번째로 나온 생도도 천반이었다.
세 번째 역시 천반인 모용설화.
그녀는 같은 천반 아이와 자리를 뜨기 전 나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고 경공을 전개해 무덤가를 빠져나갔다.
‘뭐 이런……!’
지금 이 신고식은 무공이 얕은 이에게는 더없이 두렵고, 다른 반과의 격차를 느끼게 해주는 장치였다.
남궁비천의 감동스러운 말은, 오직 그를 따라올 실력이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
“끄으으…….”
신음 소리에 눈을 돌려보니 하후홍의 얼굴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작은 구덩이에 몸을 쑤셔 넣다 보니 피가 통하지 않아 몸에 이상이 오고 있었다.
우리의 상황과는 달리, 이번에는 지반 생도들이 하나씩 구덩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모든 지반 생도들이 빠져나가고 이번에는 인반 생도들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헉!”
그런데, 이제 조금씩 움직이는 인반 생도들 앞에 굶주림에 헐떡대는 늑대가 한 마리 나타났다.
신고식을 위해 주변의 모든 짐승을 치워 놓은 상태였으나 어쩐 일인지 한 마리가 남아 있었다.
“……으르릉.”
두려움에 가득 찬 인반 생도들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늑대의 눈이 누렇게 빛났다.
[곧 부분 기갑 기능이 종료됩니다.]
‘안 돼!’ 최대한 늦게 구덩이에서 나가려 했었으나 상황이 급했다.
기갑의 기능은 곧 종료되고 늦게 나갔다간 인반 생도들이 다칠 테다.
벌써 늑대는 인반 생도들에게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서고 있었다.
“에잇!”
나는 재빨리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인반 생도들은 나를 보며 놀랐다.
무시하던 내가 제일 먼저 나왔으니 당황한 것이다.
“크르릉!”
늑대의 시선이 구덩이에서 나온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주변에 있던 막대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저리 비켜!”
그러자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커다란 늑대!
“크앙!”
내가 팔을 내밀자 위험을 인식한 기갑이 옷 안쪽에서 팔을 감쌌다.
촤르르―
그 순간 늑대가 나를 향해 도약하며 팔을 향해 큰 입을 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