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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14화 (14/200)

기갑무림 14화

그가 주변 아이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진가장이라는 코딱지만 한 지방 무관에서 현무학관에 들어오다니. 참 대단한 특혜네.”

팽지휴의 말속에는 무시가 기본으로 깔렸지만, 아이들은 속으로 동조했다.

무림명숙의 혈육인 그들도 현무학관에 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앞의 아이는 자격도 안 되는 데도 그저 운이 좋아서 뽑히지 않았는가.

그들로서는 역차별이라 느낄 정도로 자휘가 고깝게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맞아. 줘도 받아먹지 못할 병신같은 놈들에게 특혜라니 말이 돼?”

“지금껏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백대 고수들의 혈육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 곳이었는데 말이야.”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거는 지반 생도의 말에 자휘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어느 정도 텃세가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벌써 시작인가?’

이제 처음 구경나왔을 뿐인데 벌써 세 명이나 시비를 걸고 있었다.

자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중소문파 특혜라는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학관장님께 따져. 애꿎은 내게 성질부리지 말고.”

자휘의 말에 팽지휴가 비아냥거리며 피식 웃었다.

“못 따지니까 너한테 이러는 거지. 너도 운이 좋았던 대가를 이런 식으로라도 치러야 하지 않아?”

“운이 좋았다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진가장에서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현무학관의 입학권을 빼앗기고 떨어진 절벽에서 기연을 얻어 이곳으로 오긴 했다만, 그걸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나?

자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진짜로 운이 좋은 건 너희들이겠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귀한 대접을 받으며, 현무학관에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너희들 모두가 말이야.”

소년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마따나 진짜 운으로 따진다면 작은 진가장 따위에 태어난 저 아이가 아니라 자신들의 운이 더 좋았으니까.

“……흥! 어쨌건 네놈 실력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곳에 들어온 것은 맞잖아?”

팽지휴가 억지를 부리자, 자휘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곳의 교육이나 무학 수준이 높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럼 내가 못 따라가면 자연히 도태되거나 쫓겨날 것 아니야?”

“그렇지. 여기 수련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데! 너 따위는 따라갈 수도 없을걸?”

“그래. 너희 말대로 내가 줘도 받아먹지 못할 놈이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끝날 거 아니겠어? 굳이 너희들이 이렇게 대해주지 않아도 말이야.”

자휘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학관의 이름이 높은 만큼 무공을 수련하거나 공부하는 게 결코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설마, 내가 수련하는 게 힘들어 보여서 걱정해 주는 건 아니겠지?”

자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러자 팽지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강하게 쳤다.

“그게 무슨……! 나는 그저 네 선배로서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말한 거라고!”

놈은 지옥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곧 쫓겨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풀에 지쳐서 도망가거나.

그만큼 생도 일 년 차가 받는 훈련은 가혹했다.

그러자 이번엔 지켜보던 다른 선배 생도들이 나섰다.

“야, 팽지휴. 그만해. 어차피 쫓겨날 불쌍한 아이에게 뭘 그리 신경을 써?”

“너도 일 년 차 훈련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저 애도 지옥 같은 훈련을 받다보면 이곳에 온걸 후회할지도 몰라.”

선배의 말에 팽지휴가 긍정했다.

“하긴. 기껏 촌구석 중소문파에서 올라왔는데 고생만 하고 곧 나가떨어질 운이라니. 불쌍하긴 하네.”

그들의 말대로 저 아이는 수련시간 동안 망신만 당하고 고생은 실컷 할 것이다.

‘가문에서 지원을 받았던 나도 개고생한 훈련이다. 한번 당해봐라.’

팽지휴는 오히려 저놈이 수련을 견디지 못해 빌빌거릴 걸 생각하자 기분마저 좋아졌다.

“마음 넓은 우리가 네놈을 불쌍히 여기는 걸 감사히 생각하고 수련을 열심히 하도록 해라.”

팽지휴는 좋은 선배마냥 자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버텨야지.”

“맞아, 열심히 좀 해보라고. 그래야 수련을 오래 받지.”

이제는 팽지휴를 뒤따라 응원까지 하는 지반 생도 놈들.

놈들은 뭐가 좋은지 시시덕대며 지반 숙소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어?’

자휘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자기네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더니 낄낄대며 사라지는 꼴이라니.

저 모습에 이곳이 정말 그 유명한 현무학관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차라리 저놈들처럼 뇌가 근육으로만 간 인간들이 낫지.’

덤벼들면 말로나마 되갚아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만하면서 능력과 머리, 무공까지 되는 놈들과 부딪혔다면 오늘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터였다.

“하아. 기분만 잡쳤네.”

놈들의 시비를 잘 넘어갔음에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현무학관을 구경할 마음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저런 놈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더 돌아다녀 봐야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터벅터벅 숙소로 가는데, 누군가가 급히 오며 자휘를 불렀다.

“……잠깐만!”

돌아보니 검은 옷에 금색 띠를 한 아이가 보였다.

‘검은 옷에 금색 띠라면 천(天)반인가?’

지반과 인반이 흰색과 청색을 섞어 무복을 만들었다면, 천반은 아예 다르게 흑색의 고급 무복에 천자가 수놓아진 금색 띠를 매고 있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티가 나는 현격한 차이.

‘누구지?’

고개를 기울이는데, 달려온 아이가 반갑게 말했다.

“나야. 모용설화.”

앞의 천반 아이가 모용설화라는 말에 자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행에서 면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휘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얘는 면사를 왜 벗은 거지? 그냥 여기서도 쓰고 있지.’

자휘는 면사를 벗은 모용설화를 보고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응. 작은할아버지가 네가 발견한 물건을 무림맹에 빨리 갖다 줘야 한다고 하셔서 금방 헤어졌어.”

“그렇구나.”

적미륵이 중요한 물건인 만큼 모용인후는 급했을 것이다.

혈천교가 적미륵을 이렇게 찾는 모습을 보건대, 그들이 뭔가 실마리를 찾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무림맹에 가서 대책을 강구해야 하니 모용설화를 바로 보냈겠지.’

자휘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모용설화가 반갑다는 듯 말을 꺼냈다.

“여기서도 널 보니 좋네.”

자휘는 새삼스레 눈을 들어 밝게 말하는 모용설화를 보았다.

그리고 팽지휴를 비롯한 아이들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편견 없이 자신을 대했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런데…… 너 인반이구나.”

“그렇게 됐네. 너는 천반인 거야?”

“응. 이번 표행에서 얻은 것이 있었는지 무위가 좀 높아졌거든. 그래서 천반이 되었어.”

본래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인 만큼 내력만으로도 충분히 천반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약한 심성에 제대로 된 실전을 치르지 못했기에 가진 무력에 비해 늘 한참 못 미치는 평가를 받던 그녀였다.

“그때…… 복면인에게 당한 이후로 많이 후회했어. 평소에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하는 후회. 그래서 이번엔 독하게 마음먹고 시험을 봤어.”

“그렇구나. 그래도 네가 원래 가진 능력이 있어서 그리된 거겠지. 어쨌든 축하해.”

“……고마워. 네가 축하해 주니 정말 좋다.”

모용설화가 눈을 빛내며 진심으로 고마워하자, 자휘는 괜스레 한쪽 마음이 씁쓸해져 왔다.

‘난 시험조차 치르지 못했는데.’

시험은커녕, 교관에게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자휘가 잠시 말없이 있자 모용설화가 아차 싶은 듯 말을 급히 이었다.

“자, 자랑하려고 너한테 온 건 아니야. 나는 다만…… 네가 정말 고맙고 반가워서. 너 아니었으면 이렇게 현무학관에 오지도 못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야.”

자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어도 모용설화는 자휘를 바로 알아보았다.

반가운 마음으로 이렇게 달려왔는데, 앞의 소년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드는데, 불현듯 예전 대화가 떠올랐다.

“아, 네가 현무학관에 오면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었지. 그만 잊어버리고…… 미안해.”

“이미 인사까지 다 해놓고서 뭘. 괜찮아.”

“그럼 이제 아는 척해도 되는 거야?”

밝게 물어보는 모용설화의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친한 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왜?”

모용설화의 물음에 작게 한숨을 쉰 자휘가 답했다.

“주변을 봐. 벌써부터 아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잖아.”

면사를 벗은 모용설화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게다가 천반인 그녀가 인반인 자휘에게 말을 걸고 있으니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휘가 불편해하자 모용설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아이들이 안 보는 데서는 아는 척해도 되지?”

“그건……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승낙을 얻어낸 모용설화가 환하게 미소 짓자, 주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그 모습에 자휘가 빨리 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도 이제 숙소에 가 봐야겠으니, 너도 얼른 가.”

“알았어. 잘 들어가고 다음에 또 봐!”

모용설화는 손을 흔들더니 자신이 온 곳을 향해 재빠르게 달려갔다.

‘어휴, 내가 이럴 줄 알고 알은척하지 말라 했던 건데.’

가뜩이나 중소문파 특혜로 인해 다른 아이들의 고까움을 산 판이었다.

거기에 무림에서 삼봉 중 하나로 불리는 모용설화의 관심을 받자, 쓸데없는 짐이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면사라도 좀 하고 오든가.’

괜히 더 주목받았다며 툴툴거리며 숙소로 돌아가는 자휘를 멀리서 보던 모용설화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녀는 돌아가던 길을 멈춰 자휘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면사를 벗어도 소용이 없네.’

남들은 다들 곱다고 말하는 제 얼굴이 신기하게도 자휘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모용설화는 다시금 면사를 하면서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현무학관에 오는 게 정말 싫었었는데, 네 덕에 좀 좋아질 것 같아.’

그녀는 이곳에 홀로 와 불안했던 마음이 자휘를 보자 다시 안정되었다.

친우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휘의 말대로 모용세가인 금지옥엽인 자신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곳에선 어쩔 수 없이 경쟁 관계에 놓이기도 했고.

해맑기만 했던 예전처럼 친우들을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도 인반이 될 걸 그랬나?’

잠시 고민하던 모용설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자휘가 조만간 천반으로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수련할게.”

복면인에게 두 눈 뜬 채 죽음만 기다리던 무기력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두 손을 꼭 거머쥔 모용설화는 결심하며 되뇌었다.

“나도, 한 사람의 무인이 되어 너처럼 다른 사람들을 지킬 거야.”

자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 * *

숙소로 돌아가니, 빈자리에 짐이 있었다.

‘같이 쓰는 사람이 온 모양이네.’

어딜 갔는지 자리는 비운 상태였으나 올려져 있는 짐은 생각보다 적었다.

‘나야 진가장에서 내놓은 놈이다 보니 짐이 없지만 저 사람은 왜……. 아, 혹시 나와 같은 중소문파 특혜로 온 생도인가?’

그렇다면 조촐한 짐이 이해가 갔다.

하기야 명문세가 아이들을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게 하진 않겠지 싶었다.

나 말고도 특혜를 받은 아이가 더 있다고 했으니, 같은 방을 쓰는 게 맞을 테다.

자리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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