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11화
“저 사람은 모용인후 님이 아닌가?”
사람들이 앞을 보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흰 인영이 보였다.
모용인후는 흰 수염을 흩날리며 매우 빠르게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건 뭐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곧이어 의문은 풀렸다.
이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온 모용인후가 바닥에 어깨에 메었던 것을 내쳤기 때문이다.
퍼억!
사람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검은 물체를 보고는 희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사람?”
자세히 보니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검은 복면을 썼었던 오 씨였다.
그것도 온몸이 짓뭉개진 상태의 시체.
“히익!”
깜짝 놀란 사람들은 뒤로 비켜섰고, 흉흉한 얼굴의 모용인후가 모용설화를 급히 찾았다.
“설화야, 설화야! 어디 있느냐?”
그의 커다란 외침에 놀란 모용설화가 급히 마차에서 내려섰다.
“작은할아버지!”
모용인후는 모용설화를 보더니 덥석 껴안고는, 혹시나 다친 곳이 없나 살폈다.
무사함을 확인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가야, 무사하구나!”
순식간에 사라진 흉흉함.
그는 초췌하긴 하나,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무사한 모용설화를 보고는 이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네가 무슨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건가요?”
모용설화는 넝마가 된 옷을 입고 나타난 그에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말이다…….”
모용인후는 자신이 늦게 온 이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차 위에 수상한 놈을 보고 쫓아갔는데, 중간에 그만 진법에 걸리고 말았단다.”
“함정이었군요.”
“그래. 놈은 여기서 날 나오게 만든 후 함정에 빠뜨린 거지. 진법이 까다로워 나오는 데 꽤 고생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했다.
이상한 진법에 갇힌 것만 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도망치던 오 씨가 되돌아오더니 진짜 흉수는 이곳에 있다며 비아냥대며 조롱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미칠 것 같던지!
모용인후는 내기를 폭발시켜 진법을 강제로 찢고 나왔다.
모용설화가 걱정된 나머지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은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저 시체는 오 씨라는 사람인가요?”
“저놈이 수면 독을 먹이고 날 유인했던 오 씨라는 녀석이지.”
모용인후는 시체를 보며 이를 갈았다.
예상보다 강했던 모용인후의 공력에 놀란 오 씨는 도망가려 했지만, 진법을 찢고 나온 그에게 금방 잡혀버렸다.
그러나 오 씨는 그에게 잡히자마자 어금니 안의 독을 깨물고 죽었다.
기껏 잡으러 간 소득이 사라지자, 혹시 몰라 오 씨의 시체를 이곳까지 들고 왔던 것.
모용인후의 말이 끝나자, 표두가 시체가 된 오 씨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역시 오 씨가 범인이었군요. 모용인후 님께서는 몸은 괜찮으십니까?”
“진법을 빠져나오느라 조금 다치긴 했지만 괜찮네.”
모용인후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모두 모용인후가 늦게 온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모용인후가 의아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우리 설화를 제외하고 다들 수면 독을 먹었을 텐데, 어떻게 깨어난 것이지?”
모용설화가 수면 독을 먹지 않긴 했지만, 실전을 겪어본 적이 없어 흉악한 범인을 이길 수준은 못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막상 와보니, 모두 무사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행 중 한 명이 수면 독이 든 저녁을 먹지 않아 남은 복면인을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희가 무사했지요.”
“……그랬군.”
표두의 답에 모용인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빠졌다.
오 씨라는 놈의 무공은 경공만 빠를 뿐 실제 무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죽은 오 씨라는 놈은 이곳에 남은 복면인을 꽤 두려워하던데.’
그러니 심문도 하기 전 자진한 것이었다.
평범하지 않을 흉수의 정체를 생각하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죽어 있는 저 복면인이 오 씨의 동료인가?”
“맞습니다.”
모용인후는 곧바로 시체에게 다가가 복면을 벗겼다.
나타나는 복면인의 정체에 모용인후와 표두의 눈이 커졌다.
“……!”
특이한 붉은 머리칼에 수염, 이마에 자리한 혈(血)이란 표식까지.
이 특징이 말하는 바는 하나였다.
‘혈천교의 인물이구나!’
이마의 표식으로 봤을 때 못해도 중간급 위치의 혈천교인이 틀림없었다.
“범인들이 평범하진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혈천교라니. 정말 큰일이 날 뻔했군요.”
“그러게 말일세. 까딱 잘못했다간 여기 모든 사람이 죽을 뻔했어.”
혈천교는 이름처럼 피에 미친 놈들이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잔악한 방법을 쓰는 놈들.
죽은 복면인이 혈천교인임을 알자, 사람들의 눈에는 공포가 스쳤다.
잠시 후, 놀라움을 가라앉힌 모용인후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혈천교인이라면 무공이 약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누가 이 복면인을 죽인 것이지?”
사람들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혈천교인 복면인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자휘였기 때문이다.
이상해진 분위기에 다시 한번 물어보려는데 모용설화가 조심스레 나섰다.
“작은할아버지. 복면인을 죽인 사람은…… 저 소년이에요.”
모용설화가 고운 손으로 자휘를 가리키며 답을 했다.
모용인후는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네가 꿈을 꾸었나 보구나. 어떻게 저 아이가 혈천교인을 죽인단 말이냐?”
농담처럼 건네는 모용인후의 말에 사람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설마…… 진짜로 저 아이가 죽인 거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모용인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그는 어이없는 탄성을 내뱉었다.
모두가 저 소년이 그랬다 하니, 믿어야 하건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앞의 시체가 된 복면인은 잔혹하며 무공이 강하다고 알려진 혈천교인이었다.
‘무위라고 해봐야 삼류도 못되어 보이는 아이가 혈천교인을 죽였다니?’
그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차라리, 모용설화가 그랬다면 조금이나마 믿음이 갔을 터다.
“증인은 저예요. 복면인이 절 점혈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죽이려 했는데, 저 소년이 절 구해주었어요.”
모용설화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가장 위험하다고 여겼던 작은 할아버지가 이곳을 벗어나자, 방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소년이 급습하는 걸 못 봤을 거예요.”
사실, 점혈 당했을 때 자신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그런 걸 뭐하러 이야기한단 말인가?
어찌 되었건 저 소년은 자신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모용설화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모용인후는 난감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저 소년이 혈천교인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일 테다.
그러나,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여태껏 가만있던 자휘가 입을 열었다.
“모용인후 님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제가 저 복면인을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너보다 고수다. 어떻게 네가 그를 죽일 수 있었단 말이냐?”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말씀드리기 전에 사람들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을 물려달라? 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지?”
모용인후가 더욱 의심의 눈초리로 자휘를 쏘아 보았다.
“그것은, 모용인후 님께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용인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선이 모용설화에게 향했다.
“다들 수면 독에 빠져 있고 설화 너만이 정신이 있다 들었다. 저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너는 아느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짐작되는 것이 있긴 해요. 아무래도 저 소년의 말대로 사람들을 물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표두도 말이냐?”
“네. 표행 목록의 물건 중 사라진 것은 없으니까요.”
모용설화의 말에 모용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까지 그렇게 말하니, 한번 저 아이의 말을 들어봐야겠구나.”
그는 표두에게 사람들을 물려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흔쾌히 물러가는 표두와 사람들. 모용설화 또한 자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 말대로 사람들을 물린 데다가 기막까지 펼쳤다. 행여, 네 말에 수상한 점이 보인다면 나는 널 심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여전히 의심을 담은 탐탁지 않은 눈길이 소년에게 향했다.
“이제 네가 어떻게 복면인을 죽였는지 말해 보아라.”
자휘는 모용인후의 불신에 찬 눈빛에 굴하지 않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를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서 복면인이 방심했었던 영향이 큽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자휘는 죽은 복면인에게 다가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온 것은 길쭉한 목함이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깨기 전 자휘가 복면인에게 몰래 넣어 둔 것이었다.
“이 물건으로 인해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였기 때문에 기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휘가 상자 뚜껑을 열자 나오는 것은 요사스러운 형상의 적미륵이었다.
“……!”
흰 돌이 사라졌더라도 피처럼 붉은 미륵은 그의 눈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저것이 어떻게 여기에……!”
적미륵을 보는 순간, 모용인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적미륵이 무엇인지 아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 상자에서 꺼낸 붉은 불상을 보더니 광기에 사로잡히더군요. 그러더니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본 모용설화를 점혈로 못 움직이게 했습니다.”
“설화가 이것을 보았단 말이냐?”
“네. 그래서 그가 모용설화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어허, 그런 일이……!”
모용인후는 모용설화를 자휘가 구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에 그녀의 말을 흘려들었었다.
그런데, 정말 죽을 뻔했던 것이 아닌가?
그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자휘의 말은 계속되었다.
“복면인이 모용설화를 해하기 직전에 불상을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불상에서 빛이 나와 주변이 환해졌습니다.”
“혹시 어떤 빛인지 말해줄 수 있느냐?”
“흰빛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빛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는 빛을 보고 잠깐 몸을 움직이지 못하더군요. 저는 그 순간을 노렸습니다.”
“복면인은 빛을 보고 광기에 사로잡혀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너는 그 틈을 노렸다는 것인가?”
“네. 그 순간을 노려 급습했고, 운이 좋아 그를 죽일 수 있었죠.”
자휘는 잠시간 뜸을 들인 후, 아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것을 ‘적미륵’이라 부르더군요. 모용인후 님은 적미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적미륵이 무엇이냐는 자휘의 물음.
충격에 젖어 있던 그가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위험한 물건이다.”
위험한 물건이라는 말과 함께 돌연 모용인후가 자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적미륵을 내게 주지 않겠느냐? 그 보답은 충분히 하도록 하겠다.”
자휘는 무거운 표정으로 부탁하는 그를 보며 정중하게 답했다.
“이것은 제가 복면인을 죽이고 얻은 물건이니 제 것입니다.”
적미륵은 어쨌든 자휘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용인후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저 물건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지 알아야 감당을 할지 못 할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물음에 대한 답도 없이 그저 가져가시겠다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건…….”
사실 자휘로서는 알맹이를 빼먹고 껍데기만 남은 적미륵 따윈 필요 없었다.
그러나 적미륵에 있는 마석의 출처는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또한 자신을 쫓는 단체에 대해서도.
“적미륵이 위험한 것이라면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래야 이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자휘의 말에 모용인후는 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너는 천갑무신에 대해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