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9화
원인은 칼로 인한 자상이었다.
복면인의 목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다.
“어떤 놈이냐!”
그는 뒤로 홱 물러선 후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칼이 날라왔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 묻은 칼만이 떨어져 있을 뿐.
그는 주변을 살피며 재빨리 피가 흐르는 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손바닥의 열에 의해 타는 내음과 함께 지져지는 목의 상처.
“크윽.”
저릿한 고통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모용설화를 죽이려는 순간, 날카로운 쇠붙이가 갑자기 날아와 그의 목을 갈랐다.
‘이해할 수가 없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서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목이 잘릴 뻔했다.
복면인은 기감을 넓게 퍼뜨려 혹시 자신이 빠뜨린 것이 있나 살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주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이가 없었다.
방심했다지만, 그의 이목을 피해 뒤에서 칼질을 허용할 만큼 복면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눈이 쓰러져 있는 모용설화를 향했다.
“누가 그랬는지 보았느냐?”
그러나 그녀 역시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점혈을 당해 아무 말 못 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모습에 복면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쯧, 넌 아무것도 못 보았겠구나.”
모용설화는 지금 볼 수만 있을 뿐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본다는 것도 방향이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도 못 본 것을 볼까.
복면인이 또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빨리 널 죽인 후 이곳을 정리해야겠어.”
모용설화에게 살수를 전개하려는데 또다시 허공에서 날붙이가 날아들었다.
순간, 공격을 기다렸다는 듯 복면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이미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날붙이로 향했다.
턱!
빠른 회전과 동시에 그의 손이 자신을 찌르려던 것을 낚아챘다.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한다!”
이번에는 복면인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의 반대편 팔꿈치가 호선을 그리며 상대를 강하게 연달아 가격했다.
퍽!
보이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타격감!
이 공격으로 복면인의 품에 있던 적미륵이 떨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였다.
“……!”
그는 또다시 공격하기 위해 적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타격했으나 그의 손에 잡힌 검만 있을 뿐, 그것을 휘두르던 존재는 없었다.
“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칼이 멀리서 날아들었으면 모를까, 그는 뒤에서 휘둘러지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자신은 공격까지 했건만.
이기어검을 쓰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떤 고수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술인가 싶어 그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으음?”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어둠 속에서 뭔가 투명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눈에 보일 정도의 탁한 투명함이 점차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것도, 그가 아주 잘 아는 형태로.
* * *
반 각 전.
모용설화가 복면인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걸 보던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지금 나오는 거냐고?’
조금만 뒤에 나왔더라면 적미륵을 가지고 복면인은 사라졌을 텐데.
하필 지금 마차에서 나오는 바람에 복면인의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게다가 적미륵까지 본 이상, 복면인은 모용설화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여기 있는 사람들 또한 살인 멸구 당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지?’
모용인후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면 복면인은 느긋했다.
그 여유로움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올 수 없는 함정을 파놓았구나!’
설령 그가 오더라도 모두 죽은 후일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놈이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려 모용설화 앞에 선 것이 보였다.
“널 죽이면 모용세가에서 죽어라 따라붙을 텐데, 꽤 귀찮게 되었어.”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그는 이미 살인 멸구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모용설화가 죽으면 끝이다.’
그녀를 죽게 둬서는 안 됐다.
모용설화 다음 차례는 다른 사람들과 내가 될 테니.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할 방법은 단 하나.
얼마 전 얻은 기갑의 능력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내가 원한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기 상황에 맞춰 기능이 발휘된다며? 제발, 뭐라도 튀어나와라!’
어떤 기능이 튀어나올지는 나도 몰랐다.?
안다 해도 아직 익숙지 않은 능력인 데다, 무림에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몰라 숨겨야 하는 능력.
하지만 죽을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초조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강하게 짓씹으며 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빨리!’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위험 상황을 감지합니다.]
피를 보고 나서야 목소리는 주변 위험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주변 상황을 종합해 위험도를 산출합니다.]
[적에게 생명을 잃을 가능성 99.]
[최적의 기능을 탐색합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기능 탐색에 들어간 목소리는 곧바로 결과를 내뱉었다.
[탐색 결과. 최적의 기능으로 투명화가 선택되었습니다.]
[투명화 기능이 개방됩니다.]
투명화 기능이라고?
놀랄 틈도 없이 이상 반응은 바로 시작됐다.
‘으읏.’
온몸이 차가운 촉감으로 둘러싸이더니, 투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투명함은 가슴 부분을 시작으로 스멀거리며 몸 전체로 번졌다.
스슷-
몸이 투명한 막에 둘러싸이면서, 알 수 없는 힘들이 온몸을 휘저었다.
어른거리는 눈엔 사물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투명화가 된 부작용인 듯했다.
‘허억.’
어질어질한 눈앞.
그럼에도 극도로 예민해진 신체는 어두운 밤임에도 주변의 사물들을 낮처럼 인지시켜 주고 있었다.
[기능이 지속하는 동안. 상대방은 기척을 느끼지 못합니다.]
적용된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보았다.
그러나 손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변.
‘정말 안 보이잖아!’
신기한 현상에 감탄이 튀어나왔다.
온몸에는 알 수 없는 힘이 넘쳐 기이한 쾌감이 고통과 함께 몸을 휘돌았다.
[지속시간은 반 각입니다.]
희열감은 잠시.
목소리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기능은 최대 반 각이 끝이었다.
‘반각 전에 처리해야 한다.’
급히 눈을 들어보니, 모용설화가 복면인에게 점혈을 당해 쓰러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면사가 풀리며 복면인의 시선이 모용설화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보인 순간의 틈.
‘이때다!’
앞으로 나간다는 생각이 들자 몸은 자동으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흡사 바람과도 같은 신형!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기능은 내공을 전혀 쓰지 않았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복면인이 모용설화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나는 뒤에서 천천히 수면 독에 빠진 표사의 검을 집어 들었다.
복면인은 모용설화를 죽이려 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순간.
곧바로 그의 뒷목을 향해 날아가는 검!
쐐액.
그러나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그는 뒤에서 칼이 날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는 재빨리 몸을 뒤틀었다.
‘젠장!’
회심의 일격을 날렸건만, 그는 고작 목에 약간의 자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어떤 놈이냐!”
당황한 눈빛으로 소리치며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 찾는 복면인.
나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가만히 있었다.
그가 계속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뒤지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시간이 없다.’
복면인 또한 빨리 모용설화를 처리하기 위해 손을 다시 끌어 올렸다.
‘안 돼!’
급한 마음에 장검을 들어 그에게 휘둘렀으나, 장검은 그의 손에 잡혔다.
퍽!
이어진 복면인의 공격에 그만 가슴을 얻어맞고 말았다.
투명화가 되었다 한들, 형편없는 내 무공 실력은 어쩔 수 없었다.
타탓!
찰나의 시간 동안 이어진 연타!
복면인은 공격이 성공하자, 바로 연달아 내게 타격을 가했다.
강한 힘이 가슴팍을 연달아 때리자 단 한 방에 날아가는 몸뚱이.
기갑을 입었음에도 고통이 전해져 올 정도였다.
‘크흑!’
울컥하고 나오는 각혈.
평소 같았으면 단번에 죽었을 공격이지만 기갑으로 인해 목숨은 잃지 않았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던 그 순간.
복면인의 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 역시 몸을 급하게 뒤트느라, 품에 넣어 두었던 적미륵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화악!
떨어진 적미륵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요사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엇!’
가슴 쪽이 이상하게 달아오르며 휘청이는 몸!
동시에 적미륵의 고개가 끼리릭 돌아가더니, 두 눈을 번쩍 빛냈다.
적미륵에서 쏟아낸 기이한 빛이 내 몸에 닿자 목소리가 경고를 쏟아냈다.
[이상 발생.]
[이상 발생.]
[알 수 없는 마력이 개입합니다.]
[―――]
이상 발생을 연거푸 외치던 목소리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다음 말을 뱉어냈다.
[기갑이 완전히 개방됩니다.]
‘뭐? 기갑이 완전 개방…… 으읏!’ 놀랄 시간도 없이 완전 개방이라는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투명화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투명화가 해제되면서 복면인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날 보는 그의 눈이 이상했다.
무언가에 놀란 듯 뚫어지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촤륵, 촤르르르―
쇳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왔다.
가슴팍부터 시작된 은빛 강철은 차곡차곡 맞물리듯 몸을 감쌌다.
온몸에 차오르는 힘.
심장 부근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동력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짜릿함을 전해왔다.
“너, 너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보던 복면인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천갑무신!”
약 칠 척의 키에, 얇지만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는 은빛 갑옷을 두른 남자.
고고히 서 있는 은빛 인영은 달빛을 받아, 그 위용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그와 함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
“하아―”
아.
‘이게 천갑무신의 힘이로구나.’ 넘치는 힘.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엄청난 쾌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난 지금 기갑의 완연한 해방감을 맛보고 있었다.
스스-
거머쥐는 은빛 주먹과 몸에서 피어났다 흩어지는 옅고 흰 연기.
“……이럴 수가!”
복면인은 완연한 천갑무신의 위용에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천갑무신의 후인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본래의 목적은 적미륵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갑무신을 만나게 될 줄이야!
‘적미륵이 천갑무신의 후인을 알려줄 것이란 신녀의 말이 사실이었어!’
그는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경공을 전개하려는 찰나.
[적이 도망치려 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보다 훨씬 더 공손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러나 목소리가 끝나는 시간보다 기갑의 행동이 훨씬 더 빨랐다.
“으윽!”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도 흐르지 않았건만.
손안에는 복면인 멱살이 잡혀 있었다.
생각과 동시에 기갑이 움직였던 것이다.
멱살이 잡힌 복면인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나를 죽인다 한들, 끝이 아니다. 결국 널 찾아냈으니 말이야.”
복면인의 말에 날렵한 은빛 기갑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날 찾아내?”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천갑무신의 후인인 널 찾고 있었다.”
“너희는 누구길래 날 찾고 있던 것이지?”
“크흐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되겠지.”
공포와 광기가 뒤섞인 복면인의 눈이 번들거렸다.
“긴 시간 동안 천갑무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갈았던 우리가 널 찾아갈 테니까!”
복면인의 말을 들어보건대, 적미륵을 찾는 무리는 천갑무신과 대척점에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개방이 곧 풀립니다.]
[적을 죽이십시오.]
완전 개방이 풀린다니.
우습게도 복면인보다 이 힘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안타까움부터 들었다.
“그래, 곧 알 수 있겠지.”
그러나.
앞으로 적미륵으로 인해 또다시 이런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면야.
대환영이었다.
“기대되는군.”
왼손을 들자, 신기하게도 푸른 기를 머금은 날카로운 칼이 촤륵 하고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악!
복면인의 피가 사방에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