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갑무림 8화
“그럼 같이 가자. 가는 길이 같으니 같이 가면 좋겠네.”
“아니, 난 너와 같이 가지 않아.”
당연히 승낙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의 입에서는 거절이 바로 튀어나왔다.
“왜……?”
모용설화가 상냥하게 사람들을 대한다고 해서 그녀의 집안이 가진 위세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냥 보기에도 앞의 소년은 집안이 좋지 않은 듯했고, 자신과 같이 간다면 나쁘지 않을 터였다.
“나와 같이 가면 너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을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
모용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냉정한 물음에 그녀는 말이 막혔다.
당장 자신의 작은 할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과연, 이 소년과 어울리는 걸 허락하실까?
아니다.
반대를 넘어 소년에게 불이익을 주실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충동적인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소년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 나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는 말을 잇지 못해 입술만 뻐끔거리는 모용설화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나도 너와 어울리는 건 싫어.”
“……그냥 같은 동기 친구잖아. 다른 아이들은 나와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려 하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아니, 계속 묻고 싶었는데 괜한 자존심에 묻지 못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왔다.
“너는 정말로 모든 아이가 너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해?”
“모두는 아니겠지만 친한 친구 몇 명은 그랬다고 생각해.”
친하게 지내고 있는 당가나 남궁세가의 소저만 봐도 그냥 친해졌을 뿐이다.
“최소한 이해관계로 얽히진 않았어.”
“그래?”
그녀는 자신했다.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덜하지 않은 친구들이 왜 순수하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모용설화의 믿음은 다음 말에 여지없이 깨졌다.
“네가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이 아니더라도?”
“그, 그건……!”
다들 무인들이다.
자신과 비슷한 세가이거나 혹은 구대문파의 친우들.
그 친구들이 과연 아무것도 아닌 나와 친구가 되었을까?
답은 ‘아니다’였다.
그들은 모용의 성을 달지 않은 자신과 친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우정 역시 가문의 결합 속에 돈독히 유지되는 하나의 끈이었을 뿐이었다.
“봐봐. 너도 말 못 하지? 그리고 설사 친구가 된다 한들 그 관계가 공평할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문 모용설화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난 그런 관계가 싫은 거야. 그건 친구도 뭣도 아니잖아.”
나는 등을 돌리며 모용설화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니 이곳이 아닌 현무학관에서 날 아는 척하지 마. 네가 그런 관계를 즐기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차가운 말을 남기며 가버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모용설화는 두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 *
“말을 좀 심하게 했나?”
노숙할 자리에서 모용설화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사실, 그 아이는 유명 세가의 아이치곤 순수하고 괜찮은 소녀였다.
고작 지방 유지인 진가장의 사람들조차 거들먹거렸는데.
모용세가의 아이가 그러니 처음엔 가식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말을 나눠보니 가식이 아니라 진심인 듯했다.
‘얼마나 애지중지 귀하게 제대로 키웠으면 애가 저럴까.’
주변의 사랑과 관심만을 받고, 제대로 된 교육 속에서 자란 아이.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에 서 있는 아이가 모용설화였다.
“그런 아이와 친해져 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야.”
그럴 바엔 처음부터 싹을 자르는 게 나았다.
내 목표가 현무학관에서 여자아이들과 노는 건 아니었으니.
그래도 모처럼 친구로 지내려 하는 아이를 냉정한 말로 잘라내다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번잡한 생각을 끊게 만든 건 장 씨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자휘야, 저녁 먹으렴!”
“네, 곧 갈게요.”
노숙을 하다 보니, 밖에서 밥을 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죽 같은 밥을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오 씨 아저씨가 죽을 뜨며 히죽 웃었다.
“자, 많이 먹으렴.”
오 씨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식에서 독이 감지됩니다.]
……독이라니?
뜬금없는 목소리의 경고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오 씨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더 달라는 말이지? 듬뿍 줄 테니 많이 먹거라.”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평소보다 친절한 태도로 내게 죽을 두 번이나 더 떠주었다.
“아…… 네.”
우선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했기에, 그가 떠준 죽을 먹는 척하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외따로 떨어진 자리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내 자리인 게 다행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독이 들어갔다는 거지?’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목소리는 답을 해주었다.
[신경에 관련된 독입니다.]
[맹독은 아니나 섭취 시 졸음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수면 독이란 소리였다.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죽을 떠주고 있는 오 씨를 바라보았다.
‘이걸 어쩐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한다 한들, 저들이 나를 믿을까.
게다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오 씨가 그 범인을 나로 몬다면 오히려 내가 불리했다.
‘일단, 생명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두고 보자.’
지금 나서봐야 소용없을 터였다.
차라리, 저 오 씨라는 사람이 독을 푼 것이 맞다면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잠시 두고 보는 편이 맞았다.
스륵.
죽을 먹는 척하며 땅에 쏟아버리고는 티 나지 않게 위를 낙엽으로 덮었다.
그리고 죽을 받아든 모용인후와 모용설화를 바라보았다.
만약, 큰일이 생긴다면 도움을 청할 건 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역시 안 먹는군.’
모용인후는 경험이 많을뿐더러,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다.
그런 고수가 이런 수면 독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겠지. 고작 수면 독이니 별다른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지켜보는 게 나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이, 밤이 깊어졌다.
이 시간이면 흔히 울리는 쟁자수 아저씨들의 코골이조차 들리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함.
이 기이한 정적은 되려 불안함을 불러왔다.
‘역시 수면 독이 맞았구나!’
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려 마차 쪽을 바라보았다.
표행이기에 당연히 밤새 돌아가며 보초를 서게 마련인데, 보초는커녕 불까지 꺼져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이들이 마치 죽은 듯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나마 가까이서 잠을 자고 있는 장 씨 아저씨를 흔들었으나,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숨을 쉬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니다.’
옆자리의 다른 쟁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부 잠에 깊이 취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온 사람은 모용인후였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자, 모용설화의 작은 할아버지.
그는 모용설화가 잠자고 있는 마차 앞을 지키듯 바로 앞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 수면 독을 먹지 않았으니 자고 있진 않겠지.’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니 나 역시 구석진 내 자리에 누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마차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그러더니, 마차 지붕 위로 뛰어오르는 검은 복면인!
복면인은 지붕 위를 뜯고는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하는 중요 물품이 마차 지붕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했다 한들, 마차 밑에 있는 모용인후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복면인의 기척에 모용인후가 눈을 번쩍 떴다.
“네놈은 누구냐?”
“……!”
잠들지 않은 모용인후를 보고 놀란 복면인은 재빨리 도망쳤다.
“멈추지 못할까!”
복면인의 경공은 꽤 빨랐고, 모용인후는 바로 뒤쫓기 시작했다.
어두운 데다가 워낙 빨라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된 두 신형.
‘저 복면인이 수면 독을 탄 범인인가 보구나.’
백염천수라는 위명처럼 모용인후의 무공은 고절했다.
그런 인물이니 당연히 범인을 잡아 올 것이라 믿었다.
‘단순 절도범이라서 다행이야.’
약간 찜찜하긴 했지만, 수면 독에 대한 사건이 풀린 건가 싶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누우려는 순간.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백대 고수라니.”
욕설과 함께 마차 뒤쪽에서 또 다른 복면인이 나타났다.
그에게서는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와 같은 느긋한 위압감이 풍겼다.
‘설마, 조호이산(調虎離山)에 당한 건가?’
이 표행에서 복면인들이 두려워할 자는 단 하나, 모용인후였다.
모용인후라는 호랑이를 미끼를 이용해 밖으로 떠나게 만든 후, 진짜 적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모용인후는 복면인의 수하를 쫓아간 상황.
‘젠장! 찜찜함의 원인이 이거였나?’
나는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속으로 욕을 뱉었다.
“흐음, 여기에 그 물건이 있단 말이지?”
복면인은 가볍게 마차 위로 올라서더니 지붕 속에서 목함을 꺼내었다.
팔뚝 크기의 기다란 목함이었다.
목함을 열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불상.
쩌적.
그냥 평범한 불상이었는데, 복면인이 내기를 주입하자 불상의 겉면이 떨어져 나갔다.
위장된 겉면이 없어지자 나타난 것은 적미륵(赤彌勒).
특이하게도 온몸에 붉은 칠이 된 불상은 보기만 해도 오싹함이 돌았다.
붉은 불상을 보는 복면인의 눈에 광기가 피어올랐다.
“크하하! 적미륵을 이제야 손에 넣었구나!”
진가장 안에만 있던 터라, 무림의 정보를 잘 몰랐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불길한 물건이 복면인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위험에 처하면 최적화된 기능이 개방된다고 했지만, 그것에 기대어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복면인의 무위는 결코 낮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나섰다간 개죽음당하기 십상.
적미륵이란 것을 빼앗기긴 하겠지만 그것이 내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어도 죽지는 않을 거야.’
복면인 역시 미끼로 수하를 이용한 데다, 수면 독을 사용한 것을 보아 조용하게 처리하려는 모양새였다.
이대로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 순간.
“……작은 할아버지?”
제길, 하필이면 모용설화가 마차 밖으로 나와 버렸다.
모용인후의 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밖으로 나와본 것 같았다.
“누, 누구세요?”
모용설화는 믿었던 작은 할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복면을 쓴 서늘한 눈과 마주치자 놀라 몸이 굳었다.
“쯧, 모용세가의 금지옥엽께서 나와 버리셨네?”
복면인은 그녀를 보고 혀를 차더니 적미륵을 자신의 품에 넣었다.
“수면 독이나 먹고 자지 그랬어. 그러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로서도 모용세가의 외동딸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랬기에 수면 독을 썼건만.
이미 적미륵을 봤다.
“널 죽이면 모용세가에서 죽어라 따라붙을 텐데, 꽤 귀찮게 되었어.”
모용설화는 복면인이 피우는 살기를 느끼고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무공수준은 실전을 치르지 않은 이류 수준.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 한 복면인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돼……!”
복면인이 펼친 빠른 점혈에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뻣뻣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투툭.
충격으로 끊어진 면사의 한쪽 끈.
달빛 아래 드러난 모용설화의 얼굴은 밤임에도 환한 빛이 나는 듯 고왔다.
순간, 모용설화를 보는 복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과연……. 무림 삼봉 중 하나라 불릴 만하군. 이 노부의 심장이 한순간 덜컥거릴 정도였으니 말이야.”
그는 혀를 차며 정말로 아깝다는 듯 손을 올렸다.
“혼자 죽는다고 외로워 말아라. 네 덕에 여기 있는 사람들도 같이 죽을 테니까.”
모용설화가 죽는다면 그 여파가 만만치 않을 것은 자명했다.
무림맹과 모용세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죽이고 불태워 증거를 인멸할 작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복면인의 내기를 실은 손이 모용설화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찰나.
“크흑!”
그는 몸에 갑작스러운 격통을 느끼고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