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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무림-7화 (7/200)

기갑무림 7화

“나는 모용세가의 모용인후라고 한다네. 근처에 있다가 불빛을 보고 이곳으로 온 것이지.”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노인을 보던 표사의 눈이 커졌다.

표행을 하려면 주변 정세나 인물들에 해박할 수밖에 없는데, 머릿속에 기억된 노인의 이름이 유명했던 탓이다.

“모용인후라면…… 혹시 백염천수(白髥千手) 아니십니까?”

무림에서는 보통 이름보다는 별호가 더 알려져 있다.

이름을 듣고 별호까지 불러주자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노부가 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

그의 답에 놀란 표두가 허리를 땅에 닿도록 꺾었다.

그러나 겉과 달리 속으로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저런 대단한 인물이 이런 밤중에 황량한 이곳으로 왜 온단 말인가?’

그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염천수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곳엔 왜 오셨는지요……?”

표두의 물음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무한으로 가는 도중 그만 마차가 고장 났지 뭔가. 그런데 하필 허허벌판이라…….”

그는 보라는 듯 손가락을 가리켰다.

표두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가며 안력을 키웠다.

그러자 저 멀리에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마차에 달아둔 등인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몸만 빠져나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네.”

노인은 꽤 난감한 듯 말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가야 하는데, 아무 도움도 구할 수 없는 곳에서 마차가 고장나 버렸다.

모용인후야 워낙 무공이 고강하니 계속 경공을 펼치면 된다지만 옆의 소녀는 그 정도의 내공이 없었다.

“무척 곤란하셨겠군요. 이 근방은 마차로 가도 삼사일 정도는 이런 곳뿐일 텐데…….”

수긍하는 표두의 말을 노인이 재빨리 받았다.

“난감하던 차였는데, 이쪽에서 불빛이 보여 염치 불고하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네.”

모용인후의 말에 표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상황도 상황이려니와, 그가 정말 모용인후라면 안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의 무력이라면 혹시 모를 위험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표두는 결심한 듯 말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표를 보여주신다면, 원하시는 만큼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옆에 조용히 있던 소녀의 구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모용설화라 합니다. 증표는 제 것으로 보여드리지요.”

모용인후의 옆에 있는 소녀는 흰 경장 차림에 면사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나온 작고 고급스러운 호패는 모용세가의 사람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모용설화라면 모용세가의 아름다운 금지옥엽이었다.

표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으로 증표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유명한 무인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었는데, 소녀가 미리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표행과 소녀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표행엔 모두 남자뿐이라 머물 곳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지금도 노숙을 하려는 참인데 소저께서 저희와 함께 땅바닥에서 주무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표두의 말에, 모용인후가 아무렇지 않게 짐마차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 짐마차에서 짐을 빼고 아이를 재우면 될 일 아닌가?”

표두는 잠시 망설였다.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을 더러운 짐마차 안에서 재운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는 이미 소년이 있었다.

“나 모용인후는 오늘 천하표국이 도와준 일을 잊지 않을 걸세. 그러니 우리의 사정을 봐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하도록 하지요.”

모용인후가 저리 말하는데 그로서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작은 도움으로 모용세가와 연을 만들게 된다면 천하표국도 손해는 아니었고.

표두가 쟁자수 장 씨에게 눈짓하자, 장씨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휘를 내보내려 마차로 가려는데.

“그럼 저도 같이 노숙을 하면 되는 건가요?”

눈치 빠른 소년은 이미 마차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스레 더 미안해진 장 씨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저분들의 상황이 안 좋게 되어 이리되었단다. 대신, 내가 가는 요금은 반만 받도록 표두님께 이야기해 주마.”

요금이 반이나 싸진 다면야.

노숙 따윈 상관없었다.

진가장에서도 찬밥 취급받았던 터라 이런 상황이 낯설지도 않았고.

“저도 짐 빼는 걸 도와드릴게요.”

“고맙다. 나도 네가 무한까지 가는 길에 최대한 많이 도와주도록 하마.”

장 씨 아저씨는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큰 짐을 밖으로 옮기고 자휘가 안의 작은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데, 모용인후가 마차로 왔다.

종손녀가 잘 곳을 보러 온 것.

“크흠. 마차가 생각보다는 상태가 좋지는 않군.”

마차를 훑어보던 그는 짐을 정리하던 자휘를 보고는 미간이 구겨졌다.

‘쯧, 우리 고운 아이가 하인 녀석이 쓰던 곳에서 자야 한다니.’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어도 표정에서 티가 났기에 장 씨가 얼른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손님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자리가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짐칸에 앉게 된 것이지요.”

“우리 때문에 저 아이가 노숙을 하는 것인가?”

“그렇습죠.”

하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탔다는 말에 그의 표정은 약간의 미안함을 띄웠다.

그러나 모용인후의 그런 모습에도 자휘는 아무 말 없이 짐 정리를 했다.

대놓고 멸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말을 걸어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

모용인후는 멋쩍게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모용설화에게로 돌아갔다.

자휘는 그가 돌아간 후, 자신의 옷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너무 거지꼴로 하고 나왔나?’

일부러 꼴을 거지같이 한 게 결국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공자님 모습으로 홀로 다니다간 강도 맞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하인이나 입고 다닐 법한 옷에 더벅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오해할 수밖에.

정리를 다 하고 일어서려는데, 코에 옅은 모란 냄새가 풍겼다.

“원래 선객이 있던 자리였구나.”

눈을 들어보니 모용설화라는 소녀가 앞에 있었다.

비슷한 키에 여린 체구를 가진 소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나 때문에 밖에서 자게 되었다고 들었어. 미안해.”

“…….”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이면 떠받들 듯 자랐을 텐데 미안하다고?

저 말이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몰라 잠시간 가만히 있는데 소녀가 다시 말했다.

“최소한 며칠간은 같이 길을 갈 텐데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 네가 입은 손해가 있다면 우리 쪽에서 부담할게.”

여전히 아무 말 없자, 모용설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말할 생각도 없는 소년에게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가려는데.

“은 한 냥이야.”

벙어리처럼 가만있던 소년이 대뜸 돈에 대해 말했다.

“내가 무한까지 가기로 한 금액이 한 냥이라고.”

“그, 그렇구나.”

“난 알려줬으니 그걸 대신 내주든 말든 알아서 해.”

모용설화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은 그녀에게 무척 친절하거나, 돈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 소년은 거침이 없달까?

“……알았어, 대신 내주도록 할게.”

“그럼 됐어. 이제 미안할 필요가 없어진 거네.”

자휘는 일어서며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가도 되지?”

앞에서 먼저 자리를 뜨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의 눈에 살짝 이채가 띠었다.

“그래, 가도 돼.”

저 아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보통의 또래들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 난리인데, 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꽤 잘나기도 했고…….

모용설화는 자신이 쓴 면사를 만지작거리며 자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모용인후가 표행에 합류한 지 이틀이 흘렀다.

모용설화는 말을 탈 수 있기에 고장 난 모용세가의 마차에 매어 있던 말을 탔다.

그녀가 말을 타는 동안 마차는 내 차지가 되었다.

저녁에는 모용설화가, 낮에는 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차에 타는 순서가 정해졌다.

“넓으니까 좋네.”

모용설화 덕에 넓어진 마차 안은 한결 쾌적했다.

밤마다 물건을 쌓고 치울 수는 없으니 다른 마차에 물건을 분배해 더 쌓은 것.

하기야, 거지 몰골을 한 나와 모용세가의 귀중한 딸이 같을까.

그래도 모용설화의 배려로 얻은 마차 안에서의 시간은 좋았다.

그 동안 내 몸을 관조하고 조금이나마 내공을 수련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몸이 좋아진 만큼, 현재 내가 지닌 무공의 빈약함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내공과 무공이 너무 약하다.’

내공은 삼 년 수준에 불과했다.

열다섯이라는 나이를 생각해 보면 무가 아이치곤 얼마 없는 편.

무공 또한 가전무공을 익혔음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의 절맥과 같은 상태의 몸이었으니.’

무공은 머리로 외우기만 했을 뿐 제대로 된 수련은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수련하려 하면 몸이 비명을 질러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까?

현무학관이 무공과 학문을 기초부터 가르치는 곳이라지만, 다들 손만 빨다가 오지는 않았을 터다.

물론, 나에게는 얼마 전 얻은 기연이 있지만 그것은 함부로 드러낼 것이 못 되었다.

‘보통은 모용설화 정도의 수련은 하고 왔겠지.’

유명한 무가 집안들의 자제다 보니, 지원을 아낌이 없는 받았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 틈에서 무공을 수련하려면…….

“잠깐, 저 애는 왜 무한으로 가는 거지?”

내 또래이며 무가의 아이가 이 시기에 급하게 갈 곳이 얼마나 있을까.

떠오르는 곳은 한군데밖에 없었다.

“설마, 현무학관?”

처음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가 얼마 전 알았다.

그만큼 관심이 없기도 했고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 여겼던 탓이다.

모용설화의 목적이 현무학관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귀한 딸을 따로 보낼 만큼의 사안이 몇 안 되는 것도 사실.

“지금이라도 좀 친한 척해야 하나?”

솔직히 모용세가와 친해지면 나쁠 것은 없었다.

지방의 유지, 그것도 이름뿐인 진가장의 적자는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딱 좋았다.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서라, 아서. 그래 봐야 무슨 큰 도움 되겠어.”

내 목적은 강해지는 것.

그 강함이 다른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서 오는 것이라면 거절이다.

인맥이란, 서로 주고받아야 가치가 있는 것인데 한쪽에서만 준다면 그건 인맥이 아니라 빌붙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무공이나 갈고닦아 스스로 강해지는 게 훨씬 유익했다.

똑똑.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밤이 되어 이제 모용설화가 마차를 사용할 차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마차를 이용할 시간이야.”

“알았어, 곧 나갈게.”

이미 마차 안은 정리해 놨기에 바로 밖으로 나왔다.

곁을 지나쳐 노숙할 자리로 가려는데 모용설화가 머뭇대며 입술을 열었다.

“참, 네가 무한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어. 왜 가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렇지 않아도 나도 궁금했던 차였기에, 모용설화의 물음을 되돌려 주었다.

“너는 왜 가는데?”

“……올해 현무학관의 신입생으로 뽑혀서 가는 거야. 우리 가문에 초대장이 왔거든.”

역시.

짐작이 맞았다.

모용설화는 현무학관으로 가는 길에 나를 만난 것이다.

“나도 현무학관으로 가는 길이야.”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을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기에 한 대답이었다.

모용설화의 눈에는 불신이 어렸다.

“왜? 거짓말 같아?”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좀…… 보기와 달라서.”

모용설화는 소년이 오해할까 봐 뭔가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 재빨리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무공을 익힌 줄 몰랐어. 그래서 현무학관으로 간다는 말에 놀란 거야.”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저 아이가 보기엔 내가 무공을 익힌 티는 거의 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골골하던 몸이다 보니 몸 자체도 무인치고는 너무 부실했다.

게다가 유명한 학관에 가는 것치곤 꼴도 너무 안 좋았고.

“진짜야. 널 안 믿은 건 아니야.”

“알아.”

모용설화는 앞의 소년이 같은 학관으로 간다는 말에 은근히 반가웠다.

여자인 친구들은 있어도 남자 또래와는 친한 이가 없었다.

남자아이들이 보내오는 부담스러운 눈빛이 싫었다.

그런데 앞의 소년은 그런 게 없어서 좋았다.

오히려 저런 무심한 반응에 약간의 오기가 생길 정도로.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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